원구식 시인 / 연천가는 길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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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구식 시인 / 연천가는 길
연천 가는 길은 다른 길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세상의 모든 길이 길로 연결되어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나는 여기서 발견했다 나는 이 길에서 몇 편의 괜찮은 시를 썼는데 이 시들 역시 내가 다른 길에서 쓴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가끔 먼지를 뿌리며 지나는 버스도 그 먼지를 받아내는 길가의 잡목들도 다른 길과 마찬가지다. 날이 저물어 땅거미가 내리면 이 길은 섬뜩할 만큼이나 다른 길과 똑같아진다 어둠이 고집 센 염소처럼 딱 버티어 서서 그 어떤 길도 이 길과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 바로 그때, 산자를 예외없이 죽음으로 몰고가는 시간이 다가온다 보라, 더 이상 평범할 수 없는 이 길이 자신을 스쳐간 바큇자국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기억해내는 것을 추억을 신문지처럼 구겨버리고 도망치듯 연천을 떠났지만 이 길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나는 알지못했다 다른 길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으로써 저 홀로 독립된 공화국 연천, 거기 내 아버지의 무덤이 있다
원구식 시인 / 바퀴들 2
바퀴를 보면 나는 기계가 되고 싶어진다. 바퀴가 없는 칼은 활은 삽은 책은 펜은 꽃은 벌은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오, 이 극단적인 깨달음!
바퀴는 오로지 기계에만 달려 있다. 두 바퀴로 가는 자전거가 그러하고, 요구르트를 만드는 믹서가 그러하고,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그러하고, 컴퓨터의 하드디스크가 그러하고, 선풍기의 날개가 그러하고, 엘리베이터의 도르래가 그러하고, 열병합발전소의 터빈이 그러하고, 네 바퀴로 가는 자동차의 엔진이 그러하다…… 인간은 결코 바퀴가 달린 인간을 낳을 수 없으니 이는 기계가 될 수 없는 인간의 슬픈 숙명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신의 심판을 끝장내기 위해* 바퀴를 손가락에 끼고 목에 걸며 귀와 코에 구멍을 뚫고 부착하며, 오늘도 바퀴와 함께 잠들고, 깨어나고, 싸우고, 치고받고, 자리를 찾고, 밥을 먹고, 똥을 누고, 침투하고 침투당하고, 사랑한다.**
그리하여 세상은 바퀴에 의한, 바퀴를 위한, 바퀴의 연결이다. 나는 이미 자전거이며 자동차이며 비행기이며 섹스하는 인간이다.
음, 저 바퀴들.
* 앙토냉 아르토, 「시」. ** 질 들뢰즈·펠릭스 과타리, 「천개의 고원」.
원구식 시인 / 풀밭에서 금지된 것들
초록빛은 언제나 나를 무장해제시킨다. 나는 애인과 함께 신발을 벗고 조심스럽게 풀밭으로 들어선다. 아,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쾌락의 계집애들. 그 연약한 풀잎 꼭대기까지 물이 올라와 있다. 나는 기꺼이, 시간의 독재자인 물을 받아들인다. 그 속엔 풀의 독이 들어 있다. 애인은 내게 늘 엄마처럼 풀독을 조심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 나는 벌거벗은 채 온몸으로 그 독을 먹고 서둘러 금지된 물질의 영역으로 들어선다.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생각은 말할 수 없이 단순해지고 걷잡을 수 없는 원시의 본능만이 꿈틀거린다. 물질이여, 너는 불 속에서도 뜨거워하지 않고 물속에서도 질식을 모르니 네가 바로 쾌락이로구나. 슬픔도 기쁨도 애간장을 녹이는 이별도 권력도 계급도 골 아픈 이데올로기도 없으니 내가 진정으로 당도해야 할 해방의 유물론이 바로 너로구나. 애인이여, 성스러운 바람의 매춘부여, 내게 좀 더 강한 풀독을 다오. 오늘은 원시의 본능을 타고 물질이 되고 싶구나. 만용을 부리며 나는 깊은 잠의 늪 속에 빠져든다. 지금 내가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이 여인은 일찍이 사랑의 여신이었거나 전쟁의 여신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가 나무 그늘 아래서 풀독을 먹은 애욕의 노예를 위해 이렇게 정성껏 귓밥을 파주며 치유의 노래를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그녀의 노래가 해와 달이 없던 시절 비탄의 근원이었던 태초의 상처에서 연유하고 있음을. 그리하여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밤이 오고 하늘에서 별똥이 떨어져 건너편 숲의 머리가 온통 은빛으로 하얗게 빛나는 것을. 순간 시간이 정지되고, 어리석은 나는 벼락같이 깨닫는다, 보잘것없는 인간의 육체가 바로 인간이라는 사물의 소중한 기호임을.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이미 위대한 물질인 것이다. 갑자기 눈앞이 밝아지고 세상의 모든 별이 중심을 잃고 한꺼번에 내게로 쏟아진다. 아, 이제 그만! 나는 소리친다. 하루아침에 진리의 오묘함을 깨닫는 일도 이제 그만! 금지된 물질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일도 이제 그만! 경고하건대 이런 것들은 모두 풀밭에선 금지된 것들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계속 소리친다. 그러나 내 몸은 이미 그것을 매우 즐기는 구조로 되어 있다.
원구식 시인 / 불멸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고작 이 시를 수도 없이 고치며 많은 불면의 밤을 보냈다. 이제 그만 그 짓을 멈추고 여기에 못 박아 둔다.
1 이 노래는 분명히 죽음의 강가에서 불리어질 것이다. 오, 달빛에 물든 목관악기들이 부드러운 비누거품처럼 관능을 노래하는 밤. 불멸이여, 안락의 두 눈은 차라리 저 산에 묻어버려라, 다시는 볼 수 없게. 이제 천의 혀를 가진 물의 요정이 밤의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고락에 겨운 욕망의 성기를 빨아줄 것이다.
오, 빠롤!
불멸이여, 순간 너는 뒤돌아보고 말았던 것이다. 그날 네가 비파의 현으로 지하의 하데스를 울리고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나왔을 때처럼, 너는 보아선 안 될 것을 보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은 네 의식 속에 도저히 가둘 수 없는 정념들의 무한. 그리하여, 네 손끝에서 천사가 사라졌을 때처럼 너는 또 이렇게 외치고 말았던 것이다.
오, 빠롤!
2 이 부드러움은 도대체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떨리는 밤의 현악기들이 수증기처럼 인과율(因果律)을 희롱하는 밤, 불멸이여, 타락의 두 눈은 차라리 저 바다에 던져버려라, 물고기들이 먹어버리게. 이제 무한의 혀를 가진 물의 요정이 욕망의 무릎 위에 희디흰 두 손을 얹고 돼지꼬리보다 짧은 밤의 성기를 빨아줄 것이다.
오, 빠롤!
불멸이여, 순간 너는 발화되고 말았던 것이다. 에우리디케가 네 손끝에서 사라지는 바로 그 순간 너는 마침내 절대 무(無)를 보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은 죽음을 능가하는 동물의 쾌락. 너는 그만 얼떨결에 죽음의 강을 건너고 말았던 것이다. 시간을 어린애처럼 희롱하는 물의 요정이여. 사라져버린 세상의 기원이여, 불멸이여.
오, 빠롤!
원구식 시인 / 부활-바흐의 시간
그날 이후 나는 느린 템포 속의 바흐를 편애했다. 아, 그 황홀한 순간. 눈을 감으면, 한없이 길게 늘어난 시간의 부드러운 손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허무여, 어찌하여 나는 네가 기쁜가?
오, 저 높은 하늘에서 내 동공 속으로 쏜살같이 내려오는 독수리 한 마리.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각도에서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소리가 경건하게 우당탕 쿵쾅.
이제 잠든 풀잎을 깨울 시간이 되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자여, 일어나라 일어나라.
눈을 뜨면 멀리, 여자인 듯한 피아노 연주자의 발뒤꿈치 소리. 허무여, 어찌하여 나는 네가 기쁜가?
눈을 뜨면 그 옆에, 사내인 듯한 첼리스트의 뭉뚝한 손가락. 시간의 인이 박인 첼로의 현을 간절하게 어루만지는.
일어나라 일어나라.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자여, 운명이 네게 은밀하고도 친절하게 다가가길. 폭풍이 천둥이 번개가 너의 눈뜸을 방해하지 말길.
원구식 시인 / 탕진
내 꿈은 하루하루를 헛되이 보내는 것이다. 나는 이 일을 유난히 잘한다. 그저 무심히 하루를 보내다 보면 생은 저절로 살아진다. 주위에선 이런 나를 불쌍히 여겨 훈수하며 타이른다. 신문지 몇 장으로 노숙의 찬 서리를 견딜 수 있겠느냐? 네 영혼이 과연 육체의 굶주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느냐? 그래, 나도 안다. 하루하루를 덧없이 보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일단 밥을 먹어야 하고 가정을 무시해야 하며 알량한 직업도 갖지 말아야 한다. 이런 시도 쓰지 말고 생의 목적도, 연애도, 사랑도, 증오도 피식! 한 방의 코웃음으로 날려 보낼 철학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판단력이 흐려져 머리도 감게 되지 않고 매사가 귀찮아지며, 품었던 생각마저 사라지게 된다. 친구도, 처자도, 부모도 모두 지쳐 떠나고 자잘한 세속의 인연마저 모두 끊어져 마침내 정신이 파탄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불쌍하도다, 나여! 무일푼이 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구나. 드러누울 땅 한 평 없으니 온 우주가 내 것이로구나. 내가 끊어버린 세속의 인연들아. 이제야 겨우 아무런 이유 없이 인생을 헛되이 써버릴 준비가 되었으니 나를 너무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마라. 나는 난봉꾼도, 노름꾼도, 파락호도 아니다. 나는 앵벌이도, 뽕쟁이도, 양아치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나는 오늘밤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는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 탕진이여,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여, 새로운 시작이여.
원구식 시인 / 시감도 2013
13인의 시인이 도로로 질주하고, (모두 마침표를 찍지 않는 시인들이오.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제1의 시인이 요즘은 시에 마침표를 찍지 않는 게 대세라 하오. 제2의 시인이 한심하다는 듯 그걸 이제 알았느냐 하오. 제3의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마침표를 아예 다 빼버렸다 하오. 제4의 시인이 실수로 찍힐 수가 있으니 조심하라 하오. 제5의 시인이 시를 쓰기 전에 무조건 마침표를 빼는 것부터 가르친다 하오. 제6의 시인이 그거 괜찮은 교습법이라 하오. 제7의 시인이 산문시에서 마침표를 찍지 않아 성공한 시인이 있다 하오. 제8의 시인이 그나마 마침표가 없어서 겨우 시의 꼴을 갖추었다 하오. 제9의 시인이 그런데 아직도 마침표를 찍는 무식한 시인이 있다 하오. 제10의 시인이 어느 사회나 꼴통이 있는 법이니 그냥 내버려 두라 하오.
제11의 시인이 마침표를 안 찍으니 알딸딸해서 좋다 하오. 제12의 시인이 마침표를 모두 빼버리니 골이 안 아파 좋다 하오. 제13의 시인이 마침표가 없으니 뭔가 있어 보여 좋다 하오. 13인의 시인은 마침표를 안 찍는 시인과 빼버린 시인과 그렇게뿐이 모였소. (다른 사정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나았소.)
그중에 1인의 시인이 문학상을 받은 시인이라도 좋소. 그중에 2인의 시인이 시잡지를 내는 시인이라도 좋소. 그중에 2인의 시인이 교과서에 실린 시인이라도 좋소. 그중에 1인의 시인이 예술원 회원이라도 좋소.
(쥐나 개나 마침표를 찍지 않는 세상이오. 길은 뚫린 골목이라도 적당하오.) 13인의 시인이 도로로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소. 아, 오늘밤도 별들이 밤하늘에 마침표처럼 박혀 반짝거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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