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백은선 시인 / 픽션다이어리 외 4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13. 13:29
백은선 시인 / 픽션다이어리

백은선 시인 / 픽션다이어리

 창백한 나의 장면은 허공에서 시작된다

 달

 감정이 언어를 압도할 때 우리는 말을 잃는다

 운다는 말은

 눈물의 실제를

 얼마나 가질 수 있어서

 울다 사랑하다 아프다 같은 말들이 싫다

 모래를 파내려가는데

 아무리 파도 모래뿐이어서

 모래를 두고 모래다 하고

 모래모래모래 하고

 다시 보면

 모래라는 말은 모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낭떠러지

 계피

 검고 검은 결혼식

 나는 가끔 신과 유사하고 모든 것을 동시에 보고 겪는다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탐스러운 황도의 냄새를 맡는다

 달고 물크러질 것 같은

 새로 산 침대 새로 산 세탁기 새로 산 냉장고 ...... 반짝이는 티스푼들

 이렇게 많은 새것이 한자리에 있는 건 처음 봐

 신혼부부

 신혼생활

 아름답고 황홀한 냄새

 나는 병을 사랑했다

 더이상 아프지 않을까 무서워서 울었다

 달에는 기지가 있고

 발은 흙속에

 손은 얼음 속에

 머리는 불속에

 둔 채

 뒤집힌 풍뎅이 같다

 징그러워

 그런 말을 우물거린다

 나를 본다면

 직전이라는 말이 떠오를 것이다

 날아오르는 새들

 이제와 같이 항상 영원히

 이제와 같이 항상 영원히

 내게도 달이 있고

 차가움과 뜨거움을 동시에 안다

 믿지 않겠지만

 빈다는 게 얼마나

 사람을 부러뜨리는 일인지

 안다

 안다는 계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나를 지켜주지 마

 엑셀을 밟는 건 오른발

 뛰어오는 소를 피하는 것도

 나야

 너는 맹세 때문에 수수에 빠져 죽을 거니까

 떠나자고 하지 마

 장갑을 벗는 건 내 몫이고

 내가 원할 때마다

 나는 다

 불살라버릴 거니까

​​

 기록된 절망과 기록되지 않은 절망 사이에는 강이 흐른다

 기다란 막대기 기다란 막대기 왼발 다음 오른발 믿음이 없는 사람과 믿음이 충만한 자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본다 강가는 비옥하고 풀은 높다 왼발 다음 오른발, 왼발 다음 오른발 발 한쪽이 혼자 뭘 할 수 있겠어 믿음이 충만한 자 믿음의 깊이에 휘청이는 자 강물은 푸르고 풀은 높다

 가장 좋아하는 건 마트의 통조림 코너 로고가 보이게 정 리된 선반 위 색색의 캔

 사람이 이 이상 다정할 수 있어? 묻지만 단 한 번도 원한 적 없어요

 손에 물도 안 묻히게 해준다는 말

 죽어도 함께 있자는 말

 전부

 내려다보는 것은 지루하다

 절박이 너무 커서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아

 한낮의 풍경을

 집안에 가두려 했던 것

 나무 아래에는

 무성한 잔디

 잔디와 잔디

 거봐

 깊이 파인 운석공이 검게 물들어서

 네가 본 것이 나이고

 내가 본 것이 너라면

 어둠은 어디에 자리하고 있어서

 우리는 말을 잃고

 달달달

 흩어지는 눈과 지워진 입으로

 떨며

 내가 알려준다고 했잖아

 다윗이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연주했던 선율을

 내가 다 알려준다고 했잖아

 그건 너의 말

 몸을 잃어버린다는 건 기쁜 일

 모든 곳에 존재하고 모든 것을 겪는다는 건

 무엇 하나 진심인 적 없다는 것

 그런 것도 가끔 산다고 하고

 낡아가는 것과 함께

 눕는 것

 믿음이 흐르는 방향으로

흑과 백이 첨예하지 않다

 앞면과 뒷면 사이에서

 균형잡기의 나날

 열린 팔의 형태로

 발은 흙속에

 손은 얼음 속에

 머리는 불속에

 둔 채

 지워지지 않는 냄새 속에서

 불을 만든다

 그것이 내가 세상에서 배운

 가장 분명한 기도

​​

*소와 수수, 장갑 이야기는 영화 <드레스메이커>(2015 ) 에서, 다윗과 선율 이야기는 레너드 코언의 <할렐루야>(1984) 에서 착안하였다.

 

 


 

 

백은선 시인 / 섭(攝)

 

 

 동물을 먹으면 그 동물의 기억도 함께 갖게 된다고 믿었다. 파란 밤. 어째서 얼굴은 습자지처럼 자꾸만 찢어지게 된 걸까. 알고 있니. 네가 뺨을 때리던 날 잠깐 검은 날개가 날아오르는 걸 봤다는 거. 그것을 지옥이라고 생각했다는 거.

 

 악마가 윙크하면 노래가 시작되고 불이 번진다. 여태 먹은 것 때문이다. 착실히 씹어 삼킨 것들이 지금의 나야. 그러니 억울하지 않다.

 

 다음 생이라는 걸 상상하게 된 계기는 네 손.

 

 손바닥은 주먹보다 약하고 주먹보다 비겁하다. 분노한 새들처럼 꺅꺅대며 퍼득거리 던 것. 그런 데에도 힘을 쓰는 사람이었다는 것.

 

 우리가 너무 많은 얼굴을 얼굴 위에 덧칠했기 때문이라는 걸. 그래서 엇나가 찢겨져도 어쩔 수 없다는 걸. 너는 울면서 고백했다. 네 뺨을 지나간 무수한 손들에 대해.

 

 정말 유감이다.

 

 문을 열고 나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결말, 어디서 본 것 같지 않니. 아무리 많은 고통도 현재의 방패가 되어주진 않는다고,

 

 


 

 

백은선 시인 / 밤과 낮이라고 두 번 말하지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한단 말이야?

 

작아진 페니스를 쥐고 흔들며

 

이건 꿈이구나

 

꿈인 줄 알지만 그래도 묻고 싶다

 

철창 너머에는 잘린 손과 유리병이 있다

 

종이 울리고

 

이렇게 깊은 창 속으로

이렇게 어두운 집 속으로

 

빛과 유사한 소리가 흐르고

 

나는 내 귀를 의심했어

 

사냥꾼이 잡아온 두 아이를

 

철창에 가두고

 

아름다움에 대해 토론할 때

 

나는 입이 없는 것처럼

 

엘리베이터가 오층을 향하고 있었다

 

떠오르는 느낌도 가끔 들어

 

얼마나 더 써멀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써멀 수 있냐고 스스로 묻는다 스스로 묻고 여기에도 적어 놓는다 아이들은 말을 할 수 없었고 우리는 추위를 대비해 열매와 땔감과 마른풀을 모았다 얼마간은 이렇게 생존할 수 있을 거야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철창은 방 한가운데 놓여 있다

 

누가 무엇을 하는지 잘 지켜볼 수 있도록 잘 보고 서로가 자리를 비웠을 때에도 누군가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도록

 

너는 밤과 낮이라고 한다

 

너는 그게 사랑이라고 한다

 

아니야 사랑은 기다리는 거지

 

기다릴 것이 없어질 때까지

 

고층 건물이 세찬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본다고

 

네 비밀을 내가 다 알면

내 비밀을 네가 다 알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그래도 우린 잠든다 그르렁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서로의 꿈에서 둥을 돌린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천막 위로 빗줄기가 쏟아진다 투둑투둑 천장과 바닥이 호응하고 우리는 그 사이에 누워 기다린다 열매가 떨어지기를 땔감이 모자라기를 마른풀이 전부 젖어버리기를 우리가 관통하는 물 방울들

 

모두 서로 배반할 거라고 맨 뒷장에 씌어져 있었지

 

우리는 기다린다

 

우리가 서로를 죽이기 전에

너희가 서로를 죽이기를

 

떠오를 때는 가라앉는 느낌도 들곤 해

 

저 산산이 부서지는 아름다운 창들을 보렴

 

이토록 커다란 텅 빔을

 

끝과 끝이 연쇄하는 골을

 

다 지워버릴 것을 계속해서 적어 내려가는 저 불쌍한 손들을 이미 씌어진 것들을 다시 반복하는 아무도 붙잡아주지 않는 차가운 마디를 아름다운 것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구나 그렇지 않니 네가 나를 죽이는 꿈을 꿨고 그 꿈을 믿어 그래서 더 큰 기다림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그렇게 사랑해

 

이것은 언어가 아니고 이것은 빛이 아니고

 

이것은 거울이 아니고 이것은 칫솔이 아니고

 

이것은 향기가 아니고 이것은 십자가가 아니고

 

엎드린 너희가 포개져 있을 때

 

나는 인생이란 뭘까 생각해

 

빨간 십자가가 멀리 깜박거리고

 

아무도 엿듣지 않았지만

 

계단위로 계단을 구기며

 

들통난 거짓을 다시 꾸며 말하려고 해

 

아무 의미 없이

의미 없는 표정을 지으며

 

너희가 발악하며 철창을 쥐고 흔들 때까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네 옆에 누워

 

마지막 말은 뭘까 마지막 말은 뭘까 생각해

 

철창 안에 철창이 있고

철창 밖에 철창이 있고

 

이런 것도 있고

 

갑자기 눈이 먼 늙은 여자도 있지

 

배운 적 없지만 우리는 보살펴야 하지

 

철학적이고 무심한 듯

 

철창에 대해 이야기하고

 

거울 뒤에 숨어 얼굴을 훔쳐본다

 

내 눈을 의심했어

 

왜 나는 이것을 손에서 놓지 못할까

 

끝을 안다고 적어놓고서

 

의미 없다고 말해놓고서

 

끝도 없이

 

가라앉는 섬들을 옥상에 올라가 지켜봤어

 

등대가 하나둘 마지막으로 반짝, 잠겨버릴 때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

 

모든 것을

 

미친 듯 비가 내리기 시작한 지 정확히 두 달이 되었다 노래는 빛을 이길까 네가 물었어 그건 나도 모르지 그래도 모르는 일을 질문해보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나는 운명을 믿는 사람의 눈을 쳐다볼 수가 없다는 생각을 했어 가라앉을 때도 떠오르는 느낌이 들어서 첫 장을 펼쳐 다시 읽어본다

 

너는 내게 진실만을 말했으면 좋겠어

진실만은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철창을 가운데 둔 채 벽에 등을 붙이고 마주 앉아 우리는 두 아이에 겹쳐진 서로의 모습을 바라볼 뿐이다

 

우리는 사랑에 관한 비유들로 낱말 놀이를 하기로 했어

 

너는 치즈, 소금, 얼음이라고 말했어

나는 입이 없는 것처럼

 

조용히 웃었어

 

왜 사라진 것들뿐이니

 

구름, 바람, 비라고 내가 대답했어

 

그렇다면 도처에 사랑이 있겠네

 

빈정대며 네가 말했지

 

나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어

우리라고

 

사냥꾼이 두 아이를 철창에서 꺼냈어 이 녀석들은 한입거리도 안 되겠군 더 마르기 전에 끝장을 내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러자 눈먼 여자가 웃었어 차라리 나를 먹지 그래요 아니면 그 눈을 내게 줘요 그 눈을 내게 줘요

 

그 눈

여자가 점점 크게 눈, 눈, 눈하고 외쳐댔어

 

너는 가만히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지

 

나는 귀를 틀어막고 옥상으로 갔어

 

엘리베이터는 오 층에 있다

 

영원히 머물 것처럼 매 층을 스쳐 지나가고

영원히 올라갈 것처럼

 

나는 물에 잠긴 어두운 도시를 바라봤어

 

검은 눈이 내린다

 

우리는 사랑을 나눈 적이 없어

 

우리는 비유 단지 비유로만

 

눈발을 뒤흔드는 비명

 

내 귀를 의심할 수 없었어 더 이상

 

의심할 것이 남아 있지 않으면 그때 우린 어떻게 될까

 

나는 무섭다 나라는 말이 무섭고

 

네 서툰 다정함이 무섭고

 

서로를 끌어안고 울던

 

두 아이가 미친 듯이 서로를 두들겨 패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는 게

 

그걸 적어놓기 위해 일지를 펼치는 나의 두 손이

 

-시집 <가능세계>에서

 

 


 

 

백은선 시인 / 연결 지점

 

 

노랑과 검정

빨강과 검정

초록과 검정

 

텅 빈 무대에서 노래 불러

노래 불러

 

엄마 아빠

안녕히 계세요

 

이제부터 누구에게 미안해야할지

사슴의 마음으로 고민하고

사진의 발톱으로 점쳐보았지요

 

세상에는 나쁜 것이 너무 많고

자꾸다 다 보이는데

왜요?

 

말하면 안 되는 것처럼

고자질하는 애를 혼내는 눈빛으로

보세요?

 

재스민은 몇 년 동안 꽃 피우지 않고

유리호프스도 꽃 피우지 않아요

블루베리도요

 

엄마

엄마

 

부르면 아파져요

 

토끼의 귀로 듣고

조개의 발로 이동하며

 

꽃이 없어도 죽지 않으면 좋아요

 

반성은 짧고요

 

질 나쁜 생각하며 살아요

일희일비하며

 

검정 다음 검정

검정 다음 검정

 

다정하고 아름다운

갈피갈피 정다운

하얗게 빛나는

 

섬을 섬이라고 말해도 누구도 눈총 주지 않는

 

구름입니다

총입니다

초록 잉크입니다

달력입니다

 

한없이 풀리는 길고 긴 실타래입니다

 

커다랗고 커다란 숨을 쉬었지요

그림자의 방향이 바뀔 때까지

 

선아

사랑해

 

꽃도 열매도 없이 오래 살자

 

누구의 꽃도 되지 않으면서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시집 <도움받는 기분>에서

 

 


 

 

백은선 시인 / 화빈禍彬

 

 

가시가 많은 섬이었다. 가시가 많은 섬을 보며 가시가 많은 섬이구나, 생각했다. 네가 말했다. 가시가 많은 섬이네. 응, 가시가 많은 섬이다. 내가 대답했다.

 

가시가 너무 많아 발을 뗄 수 없다 우리는 꼼짝없이 어깨를 붙이고 서서 파도가 밀려왔다 부서지는 걸 본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지. 너는 옛날 얘기를 한다. 있잖아, 이렇게 가시가 많은 섬을 표시할 때 지도 위 에 화빈禍彬이라고 쓰곤 했대. 할머니가 가르쳐준 적 있어. 잘못 알고 그 섬에 들어가지 않도록 말야.

 

이 가시들은 다 어디서 왔을까, 끝없이 무성생식하는 세포들 같다, 그치? 저길 좀 봐. 저쪽에서 누군가 걸어오고있어. 온몸이 가시에 찔린 채 피를 철철 흘리며, 그는 무어라고 말하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참, 가시가 많은 섬이죠. 그가 쥐어짜듯 말했다. 네, 참 가시가 많네요. 우리가 동시에 대답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가시뿐이다. 미지근한 땀이 팔을 타고 흘러내려 손바닥에 고인다. 만약 우리가 새라면 날아갈 텐데. 상공에서 내려다본 섬은 작은 밤송이 같을까?

 

화빈. 그건 빛나는 재앙이라는 뜻이고 그건 경고.

 

나는 화빈, 하고 입속으로 발음해본다. 이상한 말이다. 가시가 많은 섬. 가시가 많은 섬. 가시를 위해 바다 아래서 솟은 땅 같은 섬.

 

-시집 <도움받는 기분>에서

 

 


 

백은선 시인

1987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2012년 《문학과 사회》를 통해 등단. 김준성 문학상. 시집 <가능세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들로 만들어진 필름> <도움받는 기분>. 2021. 제11회 문지문학상 시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