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배정원 시인 / 거대한 뿌리 외 4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13. 13:34
배정원 시인 / 거대한 뿌리

배정원 시인 / 거대한 뿌리

 

 

폐허의 달빛 속에서

수천 개의 팔이 솟구친다

잠든 유적을 헤집고 뻗어간다

사암이 쪼개지고

천년 사원이 무너진다

뿌리가 너를 삼켰다, 앙코르와트

죽은 자들의 사원에서

달빛의 힘으로 꿈틀거리는

거대한 뿌리

달을 품은 화석이 되었다

무상(無常)의 먼지 꽃을 피웠다

 

-2009년 가을호 차령문학

 

 


 

 

배정원 시인 / 검둥개

 

 

 검둥개, 붉은 눈의 검둥개에게 쫓기다 깬

 한밤중이다 눈이 내린다

 발이 없던 질주와 소리 없던 절규가

 먼지 낀 창문 위로 떠오른다

 저 창밖에는 수천 수만의 눈송이들이

 아우성 속에 갇혀 있다

 

 잠시 나는 악몽의 바깥으로 나와

 눈감고 환상의 눈보라를 맞는다

 불안한 잠이 또 몰려온다 비쩍 마른 검둥개가

 다가온다 이번엔 짖지도 않는다 붉은 눈이 켜진다

 혼란스러운 밤이다 눈 내리는 심해 속이다

 이렇게 도둑눈이 내리면 이명이 울린다, 경보처럼

 내 귓속에 몰려든 눈발들은 웅웅거리며

 죽은 눈사람들의 유언을 전해준다

 

 통역될 수 없는 나라의 말들이 날아다닌다

 늙은 전갈이 모래 위를 기어가는 소리

 타란툴라가 깊은 잠의 뇌수腦髓를 갉아먹는 소리

 소용돌이치는 온갖 소음들 속에서

 검둥개는 있다, 없다 없다, 있다 한다, 커서처럼

 눈보라 속에서 홀로 검은 점으로 깜박인다

 

 


 

 

배정원 시인 / 비극을 이루기 위해

 

 

내 마음은 모두 방전해버린 건전지

아니, 그 이전에 못쓰게 된 비에 젖은 건전지

이 길은 어디에서부터 휘어져 목을 감아오는가

날개를 잊은 까마귀떼들 거리를 활보하는 밤

마음은 다시 길을 떠나는구나

자신이 쓴 비극 속에서

검은 잉크를 풀어 머리를 감는 늙은 광대여

침잠하라, 낮은 포복으로, 찢긴 날개로 비상하라!

오래 전에 말라버린 혀를 씹으며

그대는 심연의 우물 속을 들여다 보았는가

바람만이 목을 적셔줄 때

다리가 잘린 붉은 전갈처럼 나는

달구어진 모래 위를 기어 별빛에 오르고자

하였다 뒤집혀진 운명은

지금 어느 길모퉁이를 서성이는가

다시 충전될 수 없는

잘못 쓰여진 각본대로 저질러진 날들이여

나는 대사를 잊은 배우처럼 서 있다

주제를 저버린 말들은 창자 속에서 부패되고

전사들은 술병 속으로 기어드는 장막극

아무도 심연의 우물물을 마시지 못할 것이다

한 편의 비극을 이루기 위해

그대는 뛰어들어 솟구칠 것인가, 주저앉을 것인가

 

-시집 <지루한 유언>에서

 

 


 

 

배정원 시인 / 불멸

 

 

그 시장에 가면 언제나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남근을 팔고 있었다

근엄한 사제처럼 희죽거리는

검은 얼굴엔 흰 이빨이 번쩍였다

죽은 나무로 깎아낸 구릿빛 남근들

플라스틱 간이테이블 위에 누워

지나가는 행인을 겨누고 있었다

굵은 힘줄을 꿈틀거리며 불가마 속으로

귀두를 들이밀고 있었다

두개골을 살균하는 햇살 쏟아지는

일요일 오후

딸랏 짜뚜짝,

발기한 채로 쓰러진 것들이

영원히 그렇게 있을 것들이

정지된 시간 속에

일렬횡대로 늘어서 있었다

땡볕의 애무를 즐기고 있었다

달구어져도 아무도

다시 태양을 겨누지 않았다

 

 


 

 

배정원 시인 / 마음은 언제나 오늘인 거야

 

 

북회귀선에서 편지가 왔다

결빙된 빙하가 문장에 쌓여 있었고

느낌표마다 눈이 내렸다

 

해가 지기 시작한 곳에서는 마침표가 뒹글고

 

마침표를 둥글게 모아 답신으로 보내야겠다

북극곰에게 반짝이는 날들을 보내야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답신으로 보낸 봉투를 북극곰은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일까

글썽이는 손으로 꾹꾹 눌러쓴 글자를

잘 알아보겠지

 

북회귀선을 돌아 돌아서

마침표는 어느 시대 화석으로 남겠지

내 마음도 어느 반짝이는 날을 담아

북극곰과 함께 화석으로 남으려나

 

이런 생각으로 편지 봉투에 풀을 붙이는데

 

우편번호도 모르겠고

주소도 모르겠는데

북극곰에게 이 편지가 도착할까

이런 고민에 빠지는데

 

마음과 마음이 모아지면 보지 않아도 보이지 않을까

아끼는 마음이면 닿지 않아도 닿아 있을 거라

그렇게 여기면서

나는 북극곰에게 답신을 하는 것이다

 

- 계간 《시마(詩)≫ 제12호(2022.06)에서

 

 


 

배정원 시인

1966년 서울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 <그리운 약국>이 당선. 시집 <지루한 유언>. 1998년 동시, 동요교육서 <나의 첫 동시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