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태 시인 / 남은 햇살을 쥐고 외 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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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태 시인 / 남은 햇살을 쥐고
죽은 자의 결계를 뚫어야만 보이는 당신 중환자실 병상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발 햇살의 세계로 어떻게 돌려놓을 것인가
만나면 무릎이 자주 꺾이고 헛발질을 해서 강 건너 숲을 지나는 솔바람 소리 따라 어차피 가야하는 곳 먼저 가는 거라 했는데
서로 뭔가 들킨 듯하여*눈을 맞췄는데 그때 당신을 모른 척 지났어야 했어!그냥 매일 스치기는 하지만 마음이 남지 않게
잊지 못하는 것은 오래 앓아 온 햇살 같고 가야 할 길은 절반이나 남았는데 스러진 바람 저쪽에서 건너와 당신 바닥까지 내려가는테
*드라마<미스터 션샤인>의 대사 중에서
—시집 『고독한 자의 공동체』, 걷는사람, 2023.
한승태 시인 / 나의 안쪽
남은 화장품 샘플을 차 안에 쏟아놓고 학습백과와 에어컨 팔다 들어온 사무실 정작 영업 나가고 빈 사무실은 염천이었네 뿌연 김 서림을 벗는 판매 실적 ‘잎의 안쪽은 분홍색이나 보라색을 띠고 땀을 분비하네 순진한 파리, 호기심 많은 딱정벌레, 정처 없는 개구리가 땀의 안쪽으로 뛰어드는 순간 두 잎은 손뼉을 쳐! 소화액을 분비해서 분해하고 흡수하지’* 바깥은 염천이라 차 안이 시원해 보였겠지! 이름 없는 파리도 어쩌다 할부 인생과 동행했는지 시동 꺼지면 이 안은 지옥으로 변할 거야 환하게 터진 다섯 개의 꽃잎은 파리지옥 지옥과 천국은 꽃잎 한 장 차이라는 학습백과 파리와 딱정벌레와 개구리의 꿈은 하얀 땀으로 터지고 *디니얼 샤모비츠의 「식물의 감각법」에서 촉각을 이용한다는 파리지옥을 변용함. ㅡ웹진 『공정한시인의사회』(2022, 8월호)
한승태 시인 / 그 죽을 놈의 사랑
나 죽도록 그대를 사랑하였다고 말하지 못 하겠네어느 시인의 시처럼 죽지도 아니하였거니와치열하게 그대에게 나를 불사르지 않았네그건 그대와 나를 바보로 만드는 거 같았네그렇게 나는 사랑 앞에서도 바보가 되지 않았네
맘대로 왔다 맘대로 사라지는 그 놈비바람과 천둥이 몰아쳐 나무를 뿌리째 뽑고흙탕물이 시냇가 무수한 바위를 들썩이게 했다 해도뻔한 비유처럼그대와 나의 사랑을 왜 정의하려 하는지
무슨 질문이 필요하고 알리바이가 필요하단 말인가나 그대를 위해 설거지를 하고 밥을 하고그대가 만든 반찬을 혀끝으로 서로의 목구멍에 밀어 넣듯이나 그대에게 매일매일 들어가고 있지만무엇을 더 증명해야 그대의 사랑은 완성되겠는가
이십년이 지나도 화를 내도그대 아직도 활활 타는 단풍이라 말하지
한승태 시인 / 내린천에서 내린 사내가 칼을 꺼냈으니
술을 마셔도 오로지 쓰디쓴 소주만 마시는 사내. 이십 년쯤 전에 유문호 형을 통해 그를 처음 만났다. 유문호 형이 말하길 나와 같은 해에 등단했고, 좋은 시 쓰는 후배라고 했다. 그는 말없이 하얀 이를 드러낸 채 웃을 뿐이었다. 세월이 흘러 내가 다섯 번째 시집 <그런 저녁>을 냈던 그해, 그가 등단 25년 만에 첫 시집을 냈다며 <바람분교>를 건넸다. 그날 둘이서 소주를 몇 병을 비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다만 그의 첫 시집을 읽고 끄적거렸던 문장은 기억한다. <이번 역은 내린천, 내린천역입니다>라는 문장과 <이번 역은 텅 빈 바람, 텅 빈 바람역입니다>라는 문장 사이에서 풍찬노숙하며 수십 년 때를 기다렸으니, 선무당과 야바위와 사이비와 선전과 선동이 자본의 속성임을 일찍이 깨친 그가 비로소 벼리고 벼린 칼을 꺼냈으니, 울울鬱鬱 탕탕蕩蕩 제대로 칼춤을 출 모양이니, 빌어먹을 세상의 누가, 무엇이, 추풍낙엽으로 떨어지게 될까. 그는 지금 우리 안의 괴물들과 싸우는 중이다.
한승태 시인 / 방백
맨숭맨숭허니 바람이 분다 낮술에 취한 듯 나비는 이리 기웃 저리 기웃대는데 비탈 갈던 황소도 괜히 먼 산에 울음을 놓고 왜 아니겠는가 봄이다 그냥 봄인 것이다 뭔 놈의 일은 끝도 없고 하루해는 이다지도 길더단 말인가 다 때려치우면 그뿐인데 어디 여자가 쪼매만 너뿐이던가 맨날 속 모를 소리만 하고 참새들은 삼삼오오 지들끼리 신나는데 저놈의 인정머리 없는 장인님은 눈만 부라리고 난 모르겠다 알다가도 모르겠다 너란 여자는 언제 키가 큰다는 건지 키가 커야 마음을 안다는 건지 어제는 코맹맹이 바람을 놓고선 오늘은 허리 꺾인 장다리마냥 풀이 죽어서 골짜기마다 찔레향이 내려오고 밭머리 돌무덤엔 조팝꽃도 하얗게 일어서는데 모르겠다 왜 봄인지 왜 너인지 장인에게 얻어터진 대가리는 하나도 아프지 않다 그런데 자꾸만 눈물이 나는 건 무슨 조환지 맨숭맨숭허니 바람이 분다 낮술에 취한 듯 이리 기웃 저리 기웃대는데 먼 산에 울음이나 놓는 나의 배역은 오늘 좀 고되다 왜 아니겠는가 봄인데
-시집 <바람분교>에서
한승태 시인 / 무당개구리
우물이 하늘을 엿본다 골짜기 하나가 산새와 너구리 오소리 다람쥐 누렁소나 고라니 휑한 눈속
다섯 호 화전마을 속내를 일일이 간섭하던 그 무당 첫새벽 그 많던 소원은 다 그녀의 소관
온밤 내 컬컬한 별빛의 성화로 맵게 반짝이다가
순이가 던진 바가지로 돌이끼에 튀어 오르는 햇살 낮잠을 자다가도 시시콜콜 잔소리를 퍼 담기도 하고
떠도는 안부를 묻기도 하는 집집마다 조왕신까지 돌보는 그 무당 하늘을 엿본 죄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것이다
-시집 <바람분교>에서
한승태 시인 / 운명이다
애막골 근처 오월의 논길을 걸으면 온통 개구리 울음이다 울음뿐인 골짜기를 지나면 은하수 가득 벼들의 눈물도 흐르고 눈물에 젖고 나면 별들은 일시에 무너져 내려 몸을 헤집고 살 부비는 종소리 깊게 퍼져나가고
누가 당신에게 울음을 옮겨놓았나 손바닥으로 별을 쓸어보는 밤이다 은하수엔 숭어 떼 뛰고 함부로 던진 훌치기바늘은 등허리를 헤집고 질끈 눈 감은 울음은 논바닥에 나뒹구는 밤이고 어차피 혼자인 밤이고 소쩍새 나는 밤인데
한승태 시인 / 최선을 다해 실패할 것이다
화이트보드로 삼 년 동안 사무실 창문을 가렸다 숨은 햇살 한 줄기가 아쉬워 판을 치웠더니 방충망에 밀잠자리 한 마리 날개 펴고 하늘 보는 자세로 적멸에 드셨다 그는 죽어서도 하늘을 잃지 않았다
썩지 않는다는 건 또 얼마나 시퍼런 짓인가 흰 밤을 넘어 안개의 새벽이 늘어난 오십, 나를 가린 투명 창 앞에서 눈 뜨고도 밖이 보이지 않기는 매한가진데 뜨거운 일과와 부릅뜬 내 여름은 얼마나 캄캄했던가!
-시집 <고독한 자의 공동체>(걷는사람,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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