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림 시인 / 루시Lucy의 진화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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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림 시인 / 루시Lucy의 진화
350만 년 전에 살았던 인류의 어머니, 루시의 인체뼈 모형 옆에 나란히 서 보았더니 루시의 키는 내 허리춤에서 조금 올라온다
루시의 가슴은 얼기설기 엮어진 새장을 닮았고 자궁은 활짝 펼쳐진 나비 날개 같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나무타기 하느라 빗장뼈가 약간 솟아올랐다
실은, 풍만한 젖가슴과 커다란 엉덩이를 가진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상상했었는데 고작110cm의 키에 몸무게29kg, 나비 날개 자궁에서 인류가 쏟아져 나왔다니,
에티오피아 하다르 사막에 살았던 루시는 나무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두 발로 걷기 시작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직립보행의 힘으로 오늘날까지 잘 살아남았다
이제, 가상인간 ‘루시’로 모델도 되고 홈쇼핑 쇼호스트로 얼굴을 내밀며 몸값을 높이는 중.
주경림 시인 / 독해법讀海法
파도가 철썩철썩 낱장을 넘겨 주어
바다책 한 권을 다 읽었는데
밤새 물병자리에서 물이 솓아져
아침바다는 붉은 급빛 양장본 새책
주경림 시인 / 그 날, 그 시간, 그 어둠
해가 저문다 주위에 빛나던 것들 서서히 빛을 추슬러도 모든 사물들 제자리에 그대로 있다
적막이 길게 가로지르고 새들도 둥지를 찾아 떠났다 어둠이 내리나 둘레의 꽃들은 향기를 잃지 않고 있다 바람은 대낮보다 더 싱그럽고 풀 향기는 새벽처럼 짙게 속삭인다
차라리 흐르는 눈물방을 그 투명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 한 마리 반딧불이가 되고 싶다
주경림 시인 / 돌확만화경
빗물이 고인 돌확에 하늘 한 자락이 놀러왔다 새털구름도 날아내렸다
조그만 하늘호수에 가뭇가뭇 새털구름은 사라지고 잎 떨어진 나뭇가지들이 얼기설기 비쳤다
지나가던 가을바람이 하늘호수, 빈 나뭇가지 위에 노랗고 빨간, 누렇고 갈색인 이파리들을 한 움큼 떨구었다
돌확, 하늘호수는 은행나무, 단풍나무, 느티나무들로 울울하다 나무들은 햇살 비추는 대로 아른아른, 바람결 따라 흔들흔들
나뭇가지에 매달렸던 이파리들은 물고기로 깨어나 돌확 안을 빙빙 헤엄치기도 한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하늘호수 풍경은 천변만화千變萬化한다
누군가 돌확에 던져 넣은 동전 세 닢, 동전에 실린 마음이 무거워 놀러 온 하늘 한 자락도 다시 뜨지 못하고 그만 가라앉는다.
『문학과창작』 2023-봄(177)호
주경림 시인 / 환지본처(還至本處)
남대산 산기슭, 작은 바위에 반가사유상이 새겨졌다기에 거칠거칠한 돌의 결을 짚어 가 보았다 보관에서 턱을 괸 팔과 반가좌한 자세까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선이 보일 듯 말 듯 반가사유상이 생각 속에 잠긴 동안 비바람과 눈보라의 세월이 바위 위로 흘러가 다시 바위의 자리로 돌아가는 길목,
긴 꿈이었나! 스러지는 반가사유상을 가을햇살이 배웅하고 있다
주경림 시인 / 풀꽃 우주
버드쟁이나물, 타래난, 산박하, 부채꽃, 층꽃나물… 하늘의 본성은 그런 모습일 게다 메마른 땅에 겨우 뿌리를 붙이고 발뒤꿈치 조심스럽게 들며 다복하게 일어나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목숨을 이어 그 아픈 끝에 겨우 풀꽃 한 송이 다는,
바람이라도 불면 꽃잎은 흩어져버리고 말 걸 난을 칠 때는 세 번 꺾임을 주어야 한다는 ‘삼전의 묘법’은 아랑곳없이 그저, 힘닿는 대로 쭉 뽑아낸 풀꽃 목숨
산국, 구절초, 쑥부쟁이, 참취, 고들빼기… 고개를 숙일 듯 말 듯하며 풀꽃들은 자기 목숨만큼의 우주를 열고 있다 더러는 바위 밑에 숨어서 혹은 개울가에 발목을 잘팍하게 담그고 그 또한 바로 내 모습이니,
추사 김정희의 '불이선란도'를 그렇게 자꾸 바라보았다 마음이 잎사귀처럼 기울어 첫 서리가 내리면 시들어 버릴 풀꽃 우주에 허리 굽혀 입맞춤한다.
주경림 시인 / 비비추의 사랑편지
천둥번개 치던 밤을 보내고야 새침데기 비비추가 꽃봉오리를 살짝 연다
낚싯바늘 같은 암술에 걸려 날개를 접은 꽃등에 도톰한 몸으로 가녀린 꽃 속을 어찌 들어갈까
비비추가 꽃주름을 폈다 오므렸다 하며 응원할 때 꽃등에가 팔락팔락 보라치마 속을 들고 나다가 가장 깊숙한 샘에 이른다
꿀 한 모금 목을 축이는 사이, 비비추는 꽃등에의 다리며 날개에 꽃가루를 잔뜩 묻혀준다
“자, 이제 내 사랑 전해 줘요.” 꽃등에가 훌쩍 날아가자 보라치마가 핑그르르 접히며 오므라진다
비비추 옆에서 나도 허공에 사랑편지를 쓴다
-시집 『비비추의 사랑편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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