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임영조 시인 / 木瓜나무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15. 08:00
임영조 시인 / 木瓜나무

임영조 시인 / 木瓜나무

 

 

모과나무 곁에 서면

나 정말 환장하겠네.

지난 봄 햇빛 풀려 좋은 날

감나무 밤나무 사과나무 배나무

쥐똥나무 개똥나무 오리나무랑

너나없이 잠을 털며 분주하던 날

파륵파릇 다가와 말문을 트더니

어느새 담홍빛 함성으로 일어나

게으른 나의 죄를 성토하더니

그 무덥고 긴 여름날엔 또

내 꿈의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제법 근사한 이야기만 채우는가 싶더니

그리하여 높고 푸른 하늘 밑

우리가 함께 사는 순리를

새삼 깨닫고, 진실로 기뻐했더니

모두들 가꾼 대로 거두는 이 가을에

남세스런 몰골로 내게 오다니

나 정말 환장하겠네.

그래도 다시 모과나무 곁에 서면

세상사는 법 새로 하나 배우네.

 

-시집 <바람이 남긴 은어>에서 1985년

 

 


 

 

임영조 시인 / 밀물

 

 

텅 빈 갯벌에 물 들어온다

낮은 포복으로 낮은 포복으로

불시에 전진하는 점령군들이

햇빛가루 반짝이는 물장판깐다

 

다 깔고 나면 누가 올는지

서해 갯벌에 와서 한나절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는다

다만, 흰 갈매기 한 마리

물수제비 뜨듯 듬성듬성

발자국을 찍고 낙조를 모종한다

 

아무 부끄럼 없이 물 벗고 누워

땡볕에 샅을 말린 갯벌은 왜

저물어야 벗은 옷을 다시 입는가

폐경기 여자처럼 혼자서는 우울해

바위섬 끌어안고 밤새워 춤을?

 

한 배로 몰래 받아 키운 자식들

꽃게 방게 바지락 모시조개며

숭어 농어 도다리 조기 새끼들

차마 들키기 무엇한 남루 때문에

갯벌은 또 먼 바다를 끌어덮는 것이리

 

노을빛 주름주름 밀물져오는

저 거대한 주름치마 한 자락

슬그머니 들춰보면, 아뿔싸!

성추문처럼 쓰라린 아픈 이야기

끝내 숨기고 싶은 세월 있으니.

 

 


 

 

임영조 시인 / 갈대는 배후가 없다

 

 

청량한 가을볕에

피를 말린다

소슬한 바람으로

살을 말린다

비천한 습지에 뿌리를 박고

푸른 날을 세우고 가슴 설레던

고뇌와 욕정과 분노에 떨던

젊은 날의 속된 꿈을 말린다

비로소 철이 들어 선문(禪門)에 들듯

젖은 몸을 말리고 속을 비운다.

말리면 말린 만큼 편하고

비우면 비운 만큼 선명해지는

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

성성한 백발이 더욱 빛나는

저 꼿꼿한 노후(老後)여!

갈대는 갈대가 배경일 뿐

배후가 없다, 다만

끼리끼리 시린 몸을 기댄 채

집단으로 항거하다 따로따로 흩어질

반골(反骨)의 동지(同志)가 있을 뿐

갈대는 갈 데도 없다

그리하여 이 가을

볕으로 바람으로

피를 말린다.

몸을 말린다.

홀가분한 존재의 탈속을 위해

 

 


 

 

임영조 시인 / 성냥

 

 

아무도 모른다

그들이 출옥하면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다

 

오랜 연금으로

흰 뼈만 앙상한 체구에

표정까지 굳어버린 돌대가리들

언제나 남의 손끝에 잡혀

머리부터 돌진하는 하수인(下手人)이다

 

어둠 속에 갇히면

누구나 오히려 대범해지듯

저마다 뜨거운 적의(敵意)를 품고 있어

언제든 부딪치면 당장

분신(焚身)을 각오한 요시찰 인물들

 

(주목받고 싶은 자(者)의

가장 절실한 믿음은

최후의 만용일까?

의외의 죽음일까?)

 

그들은 지금 숨을 죽인 채

어두운 관(棺)속에 누워 있지만

한순간 화려하게 데뷔할

절호의 찬스를 노리고 있다

빛나는 출세(出世)를 꿈꾸고 있다

 

 


 

 

임영조 시인 / 염소를 찾아서 1

 

 

사시장철 검은 망토

하관은 빨아 박복한 턱에

재래식 수염 기르고, 종종

풍월을 읊는 소문난 음치

그 한심한 건달을 아시는지요

남이야 바쁘든 말든

자고 새면 들녘이나 냇가로 나가

유유자적 하루 해를 축내는 行者

해지면 제 그림자 밟고 돌아와

절망절망 고독을 씹는

그 하릴없는 축생을 아시는지요

참으로 딱한 한량이, 실은

먼 옛날 大國에서 흘러 들어온

글줄이나 했다는 귀족의 후예

여말에 남포현 외딴 섬

竹島로 귀양갔다 풀려나, 그 길로

羊角山 기슭 박토에 말뚝 박고

대대로 농사짓고 달빛 받아 글 읽던

청빈한 백면서생의 후예

그를 아시는지요

뿔은 세우되 冠으로 쓸 뿐

수염은 기르되 뽐내지 않고

식사 때는 으레 어깨부터 낮추는

누추한 처소도 탓하지 않는 샌님

억지로 목줄을 당기면

오히려 완강히 저항하는 외고집

개같이 아부할 줄 모르고

돼지같이 과욕 할 줄 모르고

고양이같이 교활할 줄 모르는

그래서 늘 외롭고 검소한 축생

그를 이젠 아셨는지요?

 

 


 

 

임영조 시인 / 염소를 찾아서 3

 

 

고2 때 기말시험 보던 날

납부금 안 냈다고 쫓겨난 나는

고향집에 내려가 식구들 몰래

새끼 밴 염소를 내다 팔았다

 

간재재 넘어 삼십여 리 길

팔려가는 낌새를 알아차린 듯

거품 물고 버티며 울부짖던 염소를

판교장에 끌고 가 헐값에 팔았다

 

삼십 년 지난 오늘

이제야 비로소 깨닫느니

내가 염소를 내다 판 게 아니라

염소가 나를

대처에 판 걸 알았다

 

이 고달픈 生을

어디에 안녕히 뿌려놓지 못하고

세월의 볼모처럼 덜미잡힌 채

날마다 헐레벌떡 끌려온 내가

굴레 쓴 염소임을 알았다

 

 


 

 

임영조 시인 / 억새꽃

 

 

가을바람 소슬한 날

산언덕에 오르니 문득

하얀 웃음소리 들렸다

 

어느듯 한청춘 가고

이제는 하릴없어 심심한 노인들이

야위고 시린 등을 서로 기댄 채

저마다 서걱서걱 살아온 생애

색 바랜 來歷을 자술하고 있었다.

 

_자식도 품안에 자식이지

_늙마에 남는건 빈손뿐이야

_末年이 깨끗하려면

두 손 훌훌 털고 가벼워야 돼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순은빛 백발만 머리에 이고

그래도 마음만은 홀가분한지

하하하하하하...

온몸으로 하얗게 웃고 있었다

 

 


 

 

임영조 시인 / 권태를 위하여

 

 

살다 보면 문득

나를 잊고 싶을 때가 있다

급행열차 선반에 얹어놓고

꾸벅꾸벅 졸며 가다가

그만 깜박 잊고 내리듯

나를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어떤 날은 또

나를 살살 유인해

어느 으슥한 술집으로 끌고가

진탕 술이나 먹이면서

주정하듯 함부로 지끌이는 불평과

입 밖에 낸 적 없던 저주까지도

곰곰 새겨듣고 싶을 때가 있다

 

말이 말을 구속 하거나

재털이 같은 세상에

꽃씨 부리듯 시를 쓰고 있음을

자각할 때는.

 

 


 

임영조(任永祚) 시인 (1943년~2003년)

1943년 충남 보령 출생. 중학교 시절 지리교사로 부임한 신동엽 시인을 만나 문학공부를 시작해 서라벌예대(현 중앙대 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70년 「월간 문학」 신인상과 197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잇따라 당선되며 등단. 시집 [바람이 남긴 은어] [그림자를 지우며] [갈대는 배후가 없다] 등. 시선집 [흔들리는 보리밭] 1989 제23회 잡지언론상 수상. 1991 제1회 서라벌문학상 수상. 제38회 현대문학상 수상. 1995년도 제9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2003년 5얼 28일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