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장용철 시인 / 어느 날 문득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15. 08:00
장용철 시인 / 어느 날 문득

장용철 시인 / 어느 날 문득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잘 한다고 하는데

그는 내가 잘 못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나는 겸손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나를 교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나는 그를 믿고 있는데

그는 자기가 의심받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나는 사랑하고 있는데

그는 나의 사랑을 까마득히

모를 수도 있겠구나

 

나는 떠나기 위해

일을 마무리하고 있는데

그는 더 머물기 위해

애쓴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나는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데

그는 벌써 잊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나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저것이 옳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내 이름과 그의 이름이 다르듯

내 하루와 그의 하루가 다르듯

서로의 생각이

다를 수도 있겠구나

 

 


 

 

장용철 시인 / 기도의 참뜻

 

 

수행중인 제자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부처님, 바라문들은 하늘을 섬깁니다.

그들은 사람이 목숨을 마치면 하늘에 태어나게도 하고, 지옥에 태어나게도 한답니다.

그들은 또, 악행을 해도 바라문 신에게 기도하면 하늘에 태어나고

선행을 해도 바라문 신에게 기도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말합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정말로 그와 같이 됩니까?”

 

제자의 질문에 부처님이 대답하였습니다.

“제자여! 여기 깊은 연못에 돌을 던져놓고

물가에 서서 ‘돌아, 떠올라라. 돌아, 떠올라라’하고 열심히 기도한다면 이 돌이 떠오르겠느냐?“

 

”아닙니다. 그럴 리 없습니다.”

 

 “그렇다. 물에 빠진 돌은 무릎을 걷어 올리고 들어가서 건져내는 것이 옳은 방법이며,

그 돌을 아예 물에 집어넣지 않는 것이 더욱 현명한 일인 것이다.”

 

모든 행위에는 결과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무슨 종교를 신봉하고, 무슨 설명으로 위안을 받기보다

그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 현명한 것입니다.

병에 대한 처방을 기대하기 보다는 병에 걸리지 않도록 예방을 하는 것이 올바른 기도의 정신입니다.

 

 


 

 

장용철 시인 / 만 번을 되풀이 하면 진언(眞言)

 

 

무슨 소리든

만 번을 반복하면

그것이 진언眞言이 되어

그렇게 된다고 합니다.

 

당신은 지금

무슨 말을 반복하고 계십니까?

 

“미치겠어.”

“미워 죽겠어.”

“지긋지긋해.”

 

아무 생각 없이

반복하는 그 소리들이

당신의 인생을

정말

그렇게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맑고 향기로운 언어를

반복합시다.

 

그것이 곧 주문이 되어

당신의 인생을

그렇게 만들어 갈 것입니다.

 

 


 

 

장용철 시인 / 물과 보약

 

 

지금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는 당신 앞에

물과 보약이 있다면 당신은 무엇을 마시겠습니까?

물론 사람들은 보약이 몸에 좋다고 말합니다.

 

당신도 보약이 몸에 좋은 줄은 알지만 갈증을 느끼는

당신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오직 물입니다.

흔들리는 삶의 길에서 자기의 의지대로 행하기보다 주변의

조건 때문에 원하지 않는 길을 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어 자기 의지대로 행하지 못한다면

좀처럼 삶의 갈증은 해소될 수 없습니다.

 

 


 

 

장용철 시인 / 처음그것

 

 

옛날 어느 나라에서는 혼기를 앞둔 딸을 교육할때

바구니를 들려 옥수수 밭으로 들여 보낸다고 합니다.

‘가장 마음에 드는 옥수수를 따오면,

아주 마음에 드는 훌룡한 신랑감을 골라 줄 것’이라고

약속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딸들은 대개 빈 바구니를 들고 밭을 걸어 나온다고 합니다.

처음에 마음에 드는 것을 골랐으나

‘조금 더 가면 더 좋은 것이 있겠지’ 하고

자꾸 앞으로만 나가다가 결국은 밭이랑이 끝나

빈 손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멀고 긴 인생의 행로에서 내가 선택한 것이 많으나

참으로 내 것인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처음 내 것이라고 생각한 그것이 소중한 것입니다.

 

 


 

 

장용철 시인 / 아리조나로 부치는 노래

-찰스 리에게

 

 

 총독부 시절에도 꽃가지 족보를 지켰던 조선 선비의 맏 자식인 그대가 찰스 리라는 이름으로 創氏改名을 했을 때, 그때는 정말 정신이 없었지, 바다 건너로 한 움큼의 동전이라도 더 송금하기 위해. 밥풀 같은 센트 하나라도 통장에 더 주워담기 위해, 빛 바랜 엽전 타래 얼러메고 동 부로 서부로 東西宿아메리카 들소 가죽처럼 질 긴 뱃가죽, 오늘은 홀연히 네바다를 건너 아리조나로 들 어가는 일군의 들소 떼를 본다.

 그래 그쪽은 대머리독수리의 날개짓이 잠잠하던가. 노 갈레스, 자꾸 황사 바람에 눈 비벼보는 노갈레스. 이상하 게 노가리라는 조선의 물고기가 발음되는 거기는 그래 고기 썩는 비린내가 진동하지 않던가. 그을린 등줄기에 모래알 비늘을 뒤집어쓴 모래무지, 사막을 헤엄치는 기형 물고기.

 무사히 선인장 가지 위에 둥지를 틀었다는 제 일신을 받고 나서 나도 비로소 새로 태어난 내 딸에게 엔젤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우리가 함께 둥지를 틀었던 천사의 도시, 여남은 고향 까마귀들 까악까악 목쉰 합창의 축가 를 들으며, 한가할 때면 새끼들 손잡고 국경까지 넘어갔 다 온다는 제 이신을 받고 나서 나는 조심스레 조선의 마 지막 수절 과부인 내 어머님께 초청장을 보냈다.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 손녀가 당신을 한번 보고 싶어한다고.

 

-시집 『늙은 山中에서,』 실천문학, 1996년

 

 


 

 

장용철 시인 / 해바라기 꽃이 피었습니다

 

 

 우리집 애완용 쥐, 햄스터는 죽어서 해바라기 꽃으로 피었습 나다. 꼬리를 잘라내어 비로서 인간과 공생할 수 있었던 햄스터 는 꼬리를 인간에게 바친 대신 한평생 사람이 갖다 바치는 먹이 를 먹으며 살았습니다. 오물오물 해바라기 씨앗을 까먹으며 가 끔 입맛 따라 붉은 당근까지 챙겨먹던 햄스터가 불의의 설사로 죽었을 때, 조금은 허전한 마음으로 그가 먹다 남긴 해바라기 씨앗, 혹시나 해서 뜰 앞에 심었습니다. 땅 속에는 그가 뚫어 놓은 동굴 아직 메꿔지지 않고 있었는지... 어느새 검푸른 대 궁들 불끈 솟아 제 키를 재고 있습니다.

죽어서도 그냥 죽지 않고 꽃으로 남아 영혼을 불태우는 작은 짐승의 꼬리가 보일 듯 보일 듯 보이지 않게 허공 속에 물결칩 니다.

 아침을 안 먹는 식구들이 늘어가는 요즘....

 나도 내가 먹다 남긴 밥그릇 털어 뜰 앞에 심으면 한떨기 꽃 으로 필 수 있을지... 슬그머니 들었다 놓는 숟가락, 밥그릇에 구덩이를 파다가 맙니다.

 

 


 

 

장용철 시인 / 지렁이는 땅 속이 갑갑하지 않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자기중심의 잣대로 판단하므로 생기는 것입니다.

 

개구리는 연못이 운동장이고,

올빼미는 밤이 낮이고,

지렁이는 땅 속이 갑갑하지 않습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헤아릴 때

닫혔던 문도 열리고, 함께 사는 길도 열립니다.

 

 


 

장용철 시인

1958년 강원 춘천시 출생. 동국대학교 대학원 북한학 박사 졸업. 198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등단. 2011.~ 안양대학교 경영행정대학원 교수. 윤이상평화재단상임이사. 시집 <서울 지옥> <늙은 산> <강화 아리랑>. 명상에세이 <작대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