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진영대 시인 / 여수에서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15. 08:00
진영대 시인 / 여수에서

진영대 시인 / 여수에서

-김성오 시인에게

 

 

바다로 갔다

집을 떠날 때의 가벼움이

소금물에 절어 무거워질 때

하얀 소금꽃 필 때

바다까지 한 배낭 짊어지고

여수 밤바다에 도착하였다

파도칠 때마다

배낭 가득 짊어진 바다가 출렁거렸다

 

짐을 풀어놓고 창문을 열면

세상 다 파도인데,

열세 살에 가출해서

배낭 속에 늘

바다를 짊어지고 살던 너에게

파도 아닌 곳 있었을까

 

집을 떠날 때의 가벼움도

울컥, 파도 한번이면

온몸 소금꽃이 피는데

소금물에 절어 목선처럼 무거운데

늘 파도인 너는 어느덧

소금덩어리가 되지 않았을까

한 삼 년 소낙비면

고 소금덩어리 다 흘러내릴까

 

여수역 근처

여인숙같은 집으로

언제

돌아올 수 있을까

 

 


 

 

진영대 시인 / 모래 무덤

 

 

막냇동생은 열 살에 죽었다

아버지가 업고 가서 강기슭에 묻어 놓고

고운 모래를

무덤 위에 골고루 얹어 주었다

 

민물조개들이

제 몸을 끌고 지나온 자국

강물 속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모래를 한 삽 떠서

시퍼런 강물에 흘려보내면

죽은 조개 껍질이 빈 배처럼 떠내려갔다

 

아버지와 함께

삽을 들고 집으로 가는 길

도마뱀이 꼬리를 끌고 다닌

흔적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진영대 시인 / 알

 

 

포도 한 상자 드렸더니 달걀 한 판 담아오셨다 서울 사는 아들이 추석에 사 온 먹다 남은 달걀 판에다

 

토종닭 알을 빈자리마다 채워 오셨다 알 자리 다 채우려고 송암 할머니, 얼마나 오랫동안 품고 계셨던지 작고 못 생긴 알, 똥 묻은 알

 

따듯했다

 

 


 

 

진영대 시인 / 풍장(風葬)

 

 

빨랫줄에 걸어놓은 무청 시래기

얼었다 녹기를 거듭했다

우수 경칩 지나도

걷어가는 사람 아무도 없었다

 

할머니는 요양원으로 죽으러 갔다 까무러칠 때마다

한걸음에 달려왔던 자식들,. 할머니가 눈을 뜨자

다시 돌아가고

 

이젠 까무러칠 힘도 남지 않았다

 

줄기만 남은 무청 시래기,

 

웬만한 추위에는 얼지않았다.

얼어붙을 물기도 남지 않았다

이슬이 사라지기 전에

추슬러 끈으로 묶어두지 않으면

바스락, 부스러질 것이다

 

바람도 걷어가지 않는,

 

 


 

 

진영대 시인 / 수구초심首丘初心

 

 

배추밭 고장에 무덤이 하나 생겼다

 

총을 맞은 고라니 그 경황에도 죽기 살기로 배추밭으로 와서 죽었다

흐르는 핏물은 멈추지 않고 배추밭까지 핏자국을 찍어 놓았다

밤새 눈이 내렸다

 

고라니가 걸어온 길, 핏자국은 지워졌지만

봉분을 올리고 뗏장 한 장 열어놓은 듯

고라니의 눈꺼풀은 덮어주지 못했다

 

배추밭고랑에서 죽은 고라니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진영대 시인 / 물푸레나무 코뚜레

 

 

 기둥에 걸어놓은 코뚜레

 붉은 얼룩이 묻어 있다

 

 어미는 남겨 줄 것이 제 힘줄보다 질긴 물푸레나무

 코뚜레 그것뿐이어서 어린 것 코에 가시랭이가 박히지 말라고 콧등을 날마다 문질러대었을 것이다

 

 밤새 흘린 핏물이 물푸레나무 속심까지 속속들이 스며들고, 어미는 잠든 송아지를 핥아주며 핏물도 함께 삼켰을 것이다

 

 외양간 기둥에 걸린 코뚜레

 둥글게 휘어져 펴지지 않았다

 

 


 

 

진영대 시인 / 철거민

 

 

삽질 소리

계속 들린다

 

돌을 찍고 부러진 삽날

어딘가에 박힌다

 

나무 밑에 숨어 살던 먹구렁이

삽날에 찍혀

모가지, 내 모가지!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제 몸뚱어리를

제 꼬리로 칭칭 감는다.

 

 


 

 

진영대 시인 / 당신을 열어 보았다

 

 

특별히 추릴만한 뼛조각 하나 남은 게 없었다 고이 누웠던 자리,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뼛조각 몇 개 주섬주섬 짝을 맞춰 뒷간이라도 다니러 가신 듯, 신발 끄는 소리가 금방 들릴 것 같았다

 

거뭇거뭇한 흙을 정성껏 긁어모아 문종이를 펴고 한 줌씩 올려놓았다 생전의 모습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르게 펼쳐 놓고 봐도 어머니를 닮지 않았다

 

어딘가 마실이라도 가셨다가 황급히 돌아와 다시, 고이 누우실 것 같았다

 

 


 

진영대 시인

충남 세종시 출생. 한밭대학교 전기학과를 졸업, 1997년 시집 '술병처럼 서 있다'로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 시집 <술병처럼 서 있다> <길고양이도 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