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림 시인 / 환몽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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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림 시인 / 환몽
하얀 종이봉투를 뜯자, 잘 여문 알약들이 우화처럼 깨어난다. 들쑤시는 두통과 편도를 문지르며, 식도 지나, 이윽고 구렁이 같은 불길이 무덤 속으로 길을 연다.
고래 깊은 하품 속, 녹슨 강물이 길게 멎어 있다. 숨죽이며 다다른 긴 사각의 석곽묘 속, 어린 나를 안고 순장된 전생의 아버지, 물결 같은 음성이 나를 적신다. 낯익은 해골을 베고 눕는다. 차가운 어둠이 음습하지 못하게 아버지가 언 강물에 오줌사태를 두른다.
뜨뜻한 김이 솟구치는 강줄기에 올라앉아, 흩어진 시간의 모래알로, 깨꽃 흐드러진 두꺼비집을 짓는다 . 아버지, 은어회가 먹고 싶어요, 굽은 낚싯대 끝에서 수박 향내가 나요, 불켜진 내 안의 정원 쓰러지지 않게, 아버지의 등뼈로 기둥을 세운다. 팽창하는 내 심장의 불을 이고, 아버지의 메마른 잠이 내 키보다 높게 쌓일 때까지, 나는 목이 말라 강물을 연거푸 들이킨다. 천 개의 달, 국자 같은 블랙홀을 마시고, 몸 속 가득 찬, 부레가, 무덤 밖으로, 나를 밀어올린다
차가운 머리맡, 혼,절,한, 무,덤,이, 뜯어진 봉투처럼, 누워 있다.
파릇파릇 누이가
차창 밖 허둥대는 빗방울들, 축축한 발을 가진 저 씨앗들이 뿌리 내릴 곳 어디인가, 손바닥 펼쳐 받아보지만 찢어진 손금 너무 얕아 심어지지 않는다 미끄러져 내리는 비의 씨앗 속에서 누이가 욱신거린다 움트지 못한 누이, 내 옆구리 속 밀봉된 어둠 헐고 누이를 심는다 어둠은 모든 길의 자궁이다 비의 씨눈 속에 누이의 언청이 별, 잃어버린 우산이 화살처럼 박혀 있다 바람이 엑스레이터를 밟을수록 길은 오히려 언청이가 되어 더듬거린다 비의 숲이 범람한다
술픔의 윤기 번지르한 우물을 덮고 씨앗이 깊은 잠에 빠져든다
비 그친 관 속, 날개 단 누이,
누,이,야,누,이,야,
-웹진 <에스프리> 겨울호
임경림 시인 / 거울
가릴수록 가릴 것이 더 많아지는
가릴수록 가릴 수 없는 것이 더 많아지는
이 허전하고 불편한 여자를
빨리 끝내고만 싶어질 때
천리 밖 떠돌던 마음 다시 주저앉는 곳이
고작 거울, 이 거울 앞일 때
여자는 어디서 여자를 찾아야 하나
임경림 시인 / 제일을 알지 못하는
길쭉한 막대기로 처마 밑 벌집을 뜯어낸다
침이 생겨나기 전에 없애야 해, 벌써 날개를 달았는지도 몰라,
가볍게 떨어지는 벌집 속에 빼곡히 들어찬 방들, 저리 미어터지는 속들이 이토록 고요할 수가!
서둘러 불을 지핀다
콩나물시루 속 콩들이 하얀 발 내밀 듯 고물고물 깨어나는 애벌레들
굶주린 불꽃의 혀가 타는 줄도 모르는 오! 오! 오! 눈부신 기지개
꽃 피지 못한 하늘은 텅 비어 있고
임경림 시인 / 눈길
내가 볼 때마다 꽃은 내내 어두웠어요 그 곁에 머물고 싶었으나 나는 꽃을 여는 법을 알지 못했어요 서툰 젓가락질마냥 허둥거렸지만 모르는 것들이 때론 나를 견디게 했지요 그는 나를 떠난 적 없었지만 그가 떠나는 꿈을 자주 꾸었어요너무 깊이 감췄다가 잊어버린 반지처럼 아무도 깨워줄 수 없는 잠 속에 오 래 붙들려 있었어요 아니, 아니 어쩌면 그 허전함 속에서 차라리 영영 빠져나오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몰라요
임경림 시인 / 멀찌감치 둘러가는 동안
긴 막대기마냥 뻣뻣이 엉덩이를 서로 맞댄 유기견 두 마리 헐떡거림도 거친 숨소리도 없이 싱겁고 밋밋한 관계가 진행 중이다
못 볼 것을 본 것도 아닌데 무슨 잘못이라도 들킨 것처럼 왠지 발걸음이 초조해진다
사방에서 비춰오는 소음에도 아랑곳없이 윤기 반들거리는 눈망울로 오히려 내 속을 빤히 들여다보는 것만 같다
부서질 것 같지 않은 저 몰입이 혹여 부서지기라도 할까 봐, 더딘 발걸음 힐끔거리며 멀찌감치 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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