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희 시인 / 병뚜껑의 자세 외 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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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희 시인 / 병뚜껑의 자세
입을 막고 있는 자잘한 침묵들
스물한 개의 톱니는 병뚜껑을 물고 있어요 앙다문 힘을 단숨에 허무는 건 병따개에요 일회용 삶들 출구가 개방되면 쓸모가 없어져요
병따개는 소란을 좋아하고 병뚜껑은 침묵을 좋아하죠
터트리려는 것과 지키려는 것 두 개의 힘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어요
내용물을 지키는 게 병따개의 자세에요
때론 능숙한 숟가락이 침묵을 따면 덧니처럼 튀어나와 틀어지기도 하죠
잔이 기울어지고 말이 흘러내리는 저 사내 얼마나 많은 밤을 길바닥에 쏟았기에 저토록 비틀거리고 있을까요
발음이 새는 밤은 병따개가 수차례 다녀간 흔적이지요
한 몸이었던 것들은 언젠가 분리되지요
마지막 자세는 입을 다무는 거예요
2018 제49회「열린시학」신인작품상 당선작 신재희 시인 / 봄의 혀 얼어붙은 강 입을 봉하지 못한 구멍 사이로 나지막이 들리는 물의 맥박, 구멍 하나만으로 겨울의 심장을 만질 수 있다 새들이 날개를 펼쳐 놓은 듯 살얼음 위로 깃털문양이 느린 속도로 멈추었다 어느 날 불시착한 바람의 날개일까 남쪽을 향해 달아나던 물길이 뒤돌아본 흔적이 있다 바람의 결이 합쳐진 물의 결 마음이 마음을 껴안은 흔적은 쉽게 녹지 않는다 계곡을 지나 강의 끝 지점에 모여드는 순간, 물빛 따라 방향을 바꾸는 허공도 살여울에 부딪힌다 봄의 혀가 닿은 자리 얼음 속에 숨은 긴 혀가 우렛소리를 품고 있다
신재희 시인 / 주저앉은 달
이른 봄 찬바람만 드나드는 들녘, 철수하지 못한 마침표가 있다 기어가던 손과 외줄을 끌고 가던 발을 버렸다 들판을 끌고 가던 무릎들, 무성한 그늘은 시들어 한 아름 보름달은 품에 안겨 사라지고 낙오된 자리에 달은 뜨지 않는다 달의 뒤편처럼 쓸쓸한 표정이 푸른 피를 다 쏟아내고 끝내 들켜버린 패잔병처럼 불안 한 덩이 머춤하다 변기 속에 아기를 넣고 그 위에 쓰러져 죽은 어미의 모성이 불의 혀를 밀어냈듯이 북데기 속 썩은 호박을 들추자 어린순들이 파랗게 돋아있다 어미의 진액을 빨아먹고 몸을 연 움싹 곁눈질하던 헛뿌리들이 두꺼운 신발을 햇살에 벗어버렸다 늙은 호박 허물어진 자리 수십 개의 달이 돋았다
신재희 시인 / 훌라후프 공식
결심이 필요합니다 누군가가 채워주지 않으면 쉽게 지치는 둥근 원 속에 갇혀 사는 자음과 모음 돌아가는 굴렁쇠도 바람을 타는 부메랑도 회전하는 방향에 따라 속도가 바뀝니다 체중계는 하루치의 과장된 말도 받아줍니다 몸의 균형으로 혼자 즐길 수 있는 트레이너가 필요 없는 놀이는 인내를 요구합니다 언젠가 밤하늘에서 마주친 보름달도 허리를 돌려 야위어 가고 달무리 속에서 훌라후프를 돌리다 실패한 당신도 저 원 속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은 머리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간단한 기구들은 몸의 형상을 꿰뚫고 있어 외출을 부추깁니다 삶도 사람도 끈기가 없으면 한쪽으로만 기울어진다는 걸 잘록한 허리가 대신 말해 줍니다 우린 저 공간의 공식을 너무 쉽게 받아들입니다 잠시 방심하는 동안 동그라미가 흘러내립니다
신재희 시인 / 스윙키즈*
버튼을 누르자 CD속에 깃든 새들이 스텝을 밟기 시작했어 스윙스윙 앞치마를 두르고 경쾌한 리듬을 탈수록 개수대에 쌓아놓은 그릇들이 하나 둘 줄어들지
슬픔의 목록은 냉장고에 포스트잇으로 붙여놓고 기분을 체크하는 거야 내 발목에 팔랑이는 시간의 흔적, 짓무른 선율에 맞춰 어제의 일들을 지워내고 있어 스윙스윙
아침보다 먼저 도착한 허기를 밥솥에 앉혀놓고 몸이 움직이는 대로 스윙스윙 리듬을 타면 식탁의 꽃들도 점점 생기가 돌지
매트리스 속에는 당신과 나를 가르던 철조망이 숨어있어 하지만 오늘도 우리를 뛰어 오르게 하지 스윙스윙 들썩거릴 때마다 악몽은 길몽으로 바뀌는 거지 당신과 사랑을 가르던 장르는 오늘만은 크로스오버, 마음껏 흔들어도 이별은 파트너를 바꾸지 않지
지저귀는 새들도 봄이 오도록 춤을 추고 있어 스윙스윙 볕 좋은 앞마당에서 그늘과 함께
*강형철 감독의 영화제목.
신재희 시인 / 물새 발자국
물새의 걸음이 고요하다
모래밭을 거닐던 한줌의 무게가 찍혀 있다
문득, 걸음을 멈춘다 발자국을 벗어놓은 새들은 어디로 날아갔을까
끊어진 길을 향해 새들의 발목을 적시던 파도가 달려든다
발가락에 묻어 사라진 모래알로 모래밭이 조금씩 줄고 있다
수평선 너머 한 무리의 새들이 멀어진다
저 허공에는 소금기 묻은 수많은 발자국이 찍혀 있다
발자국이 끊어진 곳에서 새들은 날개가 듣는다
신재희 시인 / 파문
몽돌해변에 앉아 은빛햇살에 돌을 던진다 청춘의 한때를 빌려와 바다의 중심으로 슬픔을 던진다 지느러미를 품고 사는 기억이 물장구를 치며 튀어 오른다
둥글게 구르는 물방울 그 속에는 겹을 만드는 물의 내장과 기포를 만드는 비밀이 있다
꼬리 질긴 시간에게 주먹만 한 돌을 던진다 짜고 비릿한 살점이 튄다 썩지 않는 상처는 이곳에 묻어야한다
눈보라는 왜 이곳까지 몰아치는가 어느 패망한 파르티잔처럼 신발이 닳도록 걸어왔지만 결국 나를 이기기 위한 싸움이었다
삼키는 속도에 따라 달라지는 물빛으로 깊게 채워진 음색의 조합 저건 고요하게 울리는 경고음이다
내 속도 들여다보지 못한 채 무거운 손으로 만들어낸 꽃의 파동이 잠깐 피었다 진다
돌팔매질을 견디는 웅숭깊은 품 물의 파문을 너울 속 파도는 알고 있다
신재희 시인 / 슬픔을 커트하다
슬픔이 눈을 찌를 때 미용실에 간다 오늘을 싹둑 잘라 어제를 감당하려고
시간이 지날수록 드러나는 까맣고 윤기 나던 저 가닥에는 감출 수 없는 게 있지
한쪽 어깨가 기울어지고 서로 붙들 수 없는 위태로운 순간이 있어 빙빙 도는 사인볼 같이 나 또한 장식이 될 수 없어
거울은 냉정해 무표정 뒤에 숨긴 또 다른 표정을 이내 흉내내지
단정은 결국 흩뜨려온 것들의 기여 때문,
어깨에 둘렀던 가운도 일종의 포장일 뿐 여기서는 솔직을 전문으로 하지
이제 바닥에 떨어진 슬픔을 쓸어모을 시간 더는 잘라낼 말이 없어
거울 앞에서 언제까지 기억을 커트해야 할까
가윗날이 번쩍일 때 내 하나가 죽고 내 하나가 다시 사는 것에 집중하지
이제 나를 알아볼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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