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박동민 시인 / 한 끼의 시 외 4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17. 08:00
박동민 시인 / 한 끼의 시

박동민 시인 / 한 끼의 시

 

 

한 끗이다

살기 위해 곡기를 끊은 어제와

죽으려고 밥술을 뜨는 내일이 마주앉은 식탁

밥상보 속 수저 한 벌이

묘지기처럼 둥근 침묵을 지킨다

어디선가 말울음소리가 들리고

갓 넘긴 자정의 시곗바늘은 알전구 아래 잠든

푸른 생선살을 발라 밥 위에 얹어준다

하루가 끝나기 전에 하루가 시작되었다

미래를 건네주면 마부가 말을 내어줄 거야

역참에서 두 번 갈아타고 내내 밤을 내달리게 될거야

옆을 보지 말고 절대 뒤돌아보지 말고 알았지?

한 끗이다

죽음 힘을 다해 나를 채찍질하는 말과

단단한 말의 등에 올라타 저만치 달아나는 말

발라낸 가시를 모아

소문의 말발굽 소리를 밤하늘에 새겨보려 해

바람과 달빛이 몸을 뒤섞이면 이야기가 탄생하겠지

 

 


 

 

박동민 시인 / 면벽서점

 

 빛의 농담이 넘치는 날에는 산책을 한다 앙다문 철문들, 법원 옆은 검찰청 그 정강이엔 구치소와 보호관찰소가 있다

 

 마약류 투약자 특별자수기간

 자수자 최대한 선처 재활치료 기회 부여

 담벼락에는 은유가 물결치는 현수막과 미아 찾기 현상수배전단이 나란하다 극도의 빛과 어둠이 서로의 눈을 찌른다 이 매끈한 무지의 원인을 알 수 없다 호두알 같은 생각을 주머니에 넣고 걷는다 문지를수록 죄도 조약돌처럼 반반해질까 가로수가 바람의 평균대에서 균형을 잡을 때 버스에서 내린 몇몇이 골목 너머로 흩어진다 미로에서 쫓긴다 내 발자국을 덮으며 내가 나를 뒤쫓는다 멈추라고 거기 서라고 나를 고발한다 안락의자에 앉은 권력자들의 빌딩을 빠져나와 먹자골목을 지나면 마침내 서점, 네모반듯한 창틀을 부수고 휘어지는 봄볕이 하얗게 질린 통유리 문을 두드린다 빛의 살점들이 쏟아진다 주인은 책상에서 백합조개처럼 입을 꽉 다물고 책을 읽고 있다 늘 같은 자세 같은 표정 눈길을 주지 않는다 침묵 또 침묵, 면회소 간유리 사이 간절한 말처럼 내면이 가려운 나와 면벽하는 독방, 서점 앞 횡단보도에서 굉음이 들린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보지만 주인은 별일 아니라는 듯 힐끗 돌아보고는 책 속으로 들어가 문을 잠근다

 

 


 

 

박동민 시인 / 필리버스터

 

지팡이 없이 신호등도 없이 횡단보도 한복판에 선 맹인의 자줏빛 정강이

 

잊어버린 건지 죽겠다는 건지 박태기나무 가지에 동여맨 노끈

 

하늘을 떠받치는 골리앗 크레인이 던져놓은 낚싯바늘, 공회전 중인 자동차에서 쪽잠을 청하는 두더지

 

검은 모래폭풍이 불어오는 사막의 천사, 메뚜기 떼가 지나간 폐허의 아침

 

어둠을 찍어 독을 모으는 전갈, 부끄러운 가시를 겨드랑이 안으로 밀어 넣는 선인장

 

무른 공중을 쑤시고 다니는 까마귀 떼, 손을 흔드는 날라리 허수아비

 

노을을 지휘하는 은퇴한 비둘기, 덧문을 열고 솟구치는 셔틀콕의 붉은 비명

 

증발하는 낙엽을 보기 위해 수백 년을 살아야 하는 보호수 은행나무

고독이 굽이치는 바다의 등선, 수평선 너머 별들의 숲으로 사라지는 목선

 

빌딩의 숲에서 마음을 갈아엎는 한 권의 시집, 옥상에 놓인 신발 한 짝

 

칼바람을 두른 항아리 속의 검푸른 입술, 동공을 숟가락으로 파먹는 팽이의 부러진 발톱

 

죽음을 등지고 과거로 걸어가는 연금술사, 달려오는 황소의 등에 후회의 칼을 꽂는 투우사

 

바닥을 드러낸 저수지에 누워 마른 침을 뱉는 시시포스를 닮은 사나이

 

갈빗대를 움켜쥐고 흔드는 심장

 

병원 침상의 산소 호흡기, 말기 암 환자의 팔등을 문지르는 로봇 팔의 손길

 

삼각형의 꼭짓점에 서서 북극성을 바라보는 눈물 한 방울

 

버려진 무덤가에서 우는 지빠귀, 달려오는 선로에 달려드는 사마귀

 

이층 양옥집의 하얀 대추꽃, 수도꼭지를 핥는 샴고양이

 

어둠을 빛으로 바꾸는, 고개 숙일 줄 모르는 해바라기

 

아무리 맞아도 지칠 줄 모르는 범벅의 샌드백

 

나팔꽃의 리코더 연주에 맞춰 눈을 감고 춤추는 가로등

​​

-시집 『 극지에서 살다 적도에서 만나』

 

 


 

 

박동민 시인 / 수건돌리기

 

 

어제의 바통을 건네 준 그는 영영

가 버린 걸까, 날 버린 걸까

 

등 뒤에는 하얀 손수건이 놓여 있었다

지금쯤 그는 술래의 옷을 벗고 양초처럼

매끈한 맨몸으로 촛농 같은 땀을 흘리고 있겠지

 

태양은 하루에 한 번 생일과 기일을 맞는다

지구는 그 하루들 중 일 년에 한 번은 노을빛 촛불을 밝힌다

 

술래처럼, 손수건을 들고 태양의 둘레를 공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해돋이부터 석양 무렵까지 매일매일

태어나고 죽는 태양의, 생일과 기일을 일일이 챙긴다

 

길어졌다 짧아지는 등 뒤를 돌아보고

둘러앉아, 꼬리에 꼬리를 무는 끝말잇기 하듯

가슴으로 세모 네모 별 동그라미 말풍선을 부는 사람들

 

말풍선은 일 년 치의 숨을 한꺼번에 불어넣어도 터지지 않는

수포처럼 부풀어 오른 거대한 풍선들

 

태양은 대기 밖까지 떠오른 풍선들을 부러진 손톱 끝으로 살짝 누른다

그러면 구름에서 하얀 고름이 촛농처럼 지구로 쏟아져

사람들은 옴짝달싹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는다

 

나는 하얀 손수건을 바통처럼 들고 그들에게 달려가고 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늘어진 혀가,빠진 어금니의 빈자리를 찾아가듯

등 뒤에 하얀 손수건을 하나씩 놓아둘 것이다

 

출렁이는 잔디밭에서 비눗방울처럼 사라진 아이들의

기일을 지나 생일로 가는 길목에서, 하얗게 웃는 그를 만났다

 

유식(侑食)이었다

 

 


 

 

박동민 시인 / 생각하는 가로등

 

 

 도끼가 나무를 생각하는 밤 발톱 빠진 길고양이 담장 위에서 녹슨 바람을 긁어대고 버려진 전봇대를 꼭 껴안은 알뿌리들의 시든 선율 나무가 도끼를 생각하는 밤 칼날 같은 세금 징수원의 눈을 피해 창문은 벽이 되고 그 자리에 내걸린 그림 속 벌목공들 눈 비비며 걸어 나와 도끼 대신 악기를 들고 나무 대신 악보를 켠다 납덩이를 찬 발목들의 힘겨운 비상 털갈이 하는 개들의 가래침 누런 이빨로 웃는 불규칙한 달의 음계여 쏟아지는 톱밥이여 밤의 수문장도 잠드는 시각 톱날 같은 은색 지퍼를 턱밑까지 끌어올리고 줄 끊어진 기타가 썩은 독기를 동쪽으로 끌고 갈 때 가로등은 생각한다 왜 쇠기러기는 무딘 눈꺼풀로 수많은 밤을 찍어대는지 마음의 후렴이 종지부를 찍을 수 없는 날갯짓을 계속하며 보이지 않는 유리창을 두드리는 이유에 대하여

 

 


 

박동민 시인

1981년 부산출생.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과 졸업. 2017년 <시산맥> 등단. 시집 『극지에서 살다 적도에서 만나』. 현재 인천지방법원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