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찬 시인 / 태양의 기억 외 1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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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찬 시인 / 태양의 기억
어머니가 보내주신 묵은지에 라면을 끓여놓고 창밖을 내다본다
강한가운데 낚시꾼 한 사람 점점 눈사람이 되어가고 국물 가득 피어나는 남해의 미역 줄기
해가 뜨지 않은 지 벌써 열흘 보드카로도 달랠 수 없는 이 긴 겨울을 어떻게 날 것인가
추운 날에는 새가 날지 않는다 혹한에도 검은 망토를 걸친 수사는 성호를 그리며 맨발로 성당을 돌고 있겠지
고구마 한 알을 꺼내놓고 멀리서 돌아온 탕아의 발을 씻겨주듯 흙을 벗겨 접시물에 담가둔다
창밖은 영하 28도 누구에게나 유형의 시베리아 길 같은 씻지 못할 죄는 있을 것이다
구름이 낮게 깔리는 저기압 지대 고구마 몸통에서 돋아날 새순을 떠올리며 촛불 하나를 밝혀둔다
송종찬 시인 / 겨울나무
벌목 당한 나무들이 암각화처럼 드러난 겨울산에 들러 소나무의 나이테를 들여다보면 나이는 위로 먹는 게 아니다 옆으로 먹는다
먼저 길 떠난 것들은 껍질이 되어 기꺼이 눈보라를 맞고 안으로 안으로 어린 생명을 키운다
수직의 관념들이 베어진 자리 저 평화의 얼굴
송종찬 시인 / 오지 않는 자를 위하여
산을 사랑하는 사람은 산으로 가서 높이를 만들고
물을 사랑하는 사람은 물에 들어가 깊이를 만들고
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들로 떠나 너비를 이룬다
내가 가닿을 수 없는 높이와 깊이와 너비만큼
떠나간 것들이 눈발이 되어 창가에 내려앉는 저물녘
송종찬 시인 / 눈의 묵시록
갈 데까지 간 사랑은 아름답다 잔해가 없다 그곳이 하늘 끝이라도 사막의 한가운데라도 끝끝내 돌아와 가장 낮은 곳에서 점자처럼 빛난다 눈이 따스한 것은 모든 것을 다 태웠기 때문 눈이 빛나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기 때문 촛불을 켜고 눈의 점자를 읽는 밤 눈이 내리는 날에는 연애도 전쟁도 멈춰야 한다 상점도 공장도 문을 닫고 신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한다 성체를 받듯 두 눈을 감고 혀를 내밀어보면 뼛속까지 드러나는 과거 갈 데까지 간 사랑은 흔적이 없다
송종찬 시인 / 돌아오지 않는 봄
전쟁과 혁명을 모두 겪은 할머니가 지하철역 앞에서 들꽃으로 엮은 제비꽃 다발을 팔고 있었지요
교수였던 남편은 혁명의 깃발 속으로 사라져갔다 밤 기차로 전선에 끌려간 아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마른 빵을 사려고 줄을 선 적이 없는 철없는 소냐를 위해 오십 루블에 꽃다발을 사서 기다리고 있었지요
똑똑한 남자는 혁명 때 용감한 남자는 이차대전 때 다 죽고 이념과 폭격 속에서 끝끝내 피어난 할머니와 들꽃과 소녀와
송종찬 시인 / 시베리아의 들꽃
누가 내게 사랑을 물어 온다면 시베리아로 달려가 반란처럼 피어난 보랏빛 엉겅퀴 한 송이 보여주리 벌판에 십 개월 동안 눈이 쌓이고 자작나무 숲에 안개가 덮여도 원색의 야생화는 피어난다 유형의 길 떠나던 임을 따르다 눈밭에 나뒹굴던 여인처럼 길가에 맨발로 피어난 양귀비 여름은 짧고 길은 어두워도 그대에게 가야 만 하는 먼 길 사랑은 들꽃처럼 붉어지고 누가 내게 사랑을 물어온다면 그냥 시베리아로 달려가 엉겅퀴 한 송이 가슴에 물들여주리
송종찬 시인 / 국도1호선
목포에서 신의주 939킬로미터 차로는 너덧 비행기로 한 시간 남짓 갈 수 없는 국경이 거기까지라는데 압록강이 내다보이는 집안시 묘향각에서 스쳐 지나쳤던 그대 그날이 오면 여기로 오시라 목포시 유달동 국도 1호선 원표 아래로 볕 고운 자리에 돗자리 깔고 모두부 썰어 넣은 김치찌개 앞에 두고서 하염없이 그대 바라보리니 발 아래 파도치는 유달산에서 개마고원의 눈 덮인 겨울 숲까지 이름만 들어도 살내음 고운 그대 그날이 오면 한달음에 오시라 국도 1호선 화강암 아래로 신의주발 목포행 막차에 만주 연해주를 떠돌던 사연들도 북방의 눈발에 실려 오리니 갯내음 속 기별처럼 동백꽃 피어나고 목포에서 판문점 499킬로미터 갈 수 있는 길이 거기까지라는데
송종찬 시인 / 첫눈은 혁명처럼
사상을 팔던 혁명가가 있었지 협동농장에서 노동을 팔던 소련도 저물고 몸을 파는 자본의 시대가 왔지 한 끼의 마른 흑빵을 사기 위해 영혼마저 팔고 돌아서던 길 발 아래 밟히던 첫눈은 어떠했을까 낙엽의 거리에 눈이 내리면 발자국 무성했던 대지도 시리지 않겠다 간밤 당신이 그리 오시려고 자다 깨다 반복했었는지 창밖 내미는 손길 위에 첫눈
송종찬 시인 / 버그헌터
장엄한 찬송가 극락왕생을 비는 목탁소리가 지하실에 울려 퍼지자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며 하늘로 날아가던 작은 영혼들이 낮게 걸린 구름 속으로 날아가지 못하고 삼성의료원 영안실 밖에 걸린 버그헌터 발광하는 불빛 속으로 날아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버그헌터 파란 불빛 아래 쌓여 있던 영혼의 시신들 상주의 무릎에는 피멍이 들었지만 내실에서는 현금을 계산하는 엑셀파일이 돌아가고 있었고 망자 앞에서 개미떼처럼 음식물을 취한 조문객들은 위장을 출렁거리며 계단을 올라와 담배를 입에 물고 밤하늘로 날아가는 불꽃의 화음을 감상하고 있었습니다
송종찬 시인 / 폭설의 노래
눈 오는 동지 무렵이었을까 폭설을 헤치며 동물원길을 걸어가 차이코프스키홀의 어둠 속에서
피아노는 폭설의 길을 내고 첼로는 얼음장 밑 물길을 트고 실핏줄에 흐르던 오보에 음
벚꽃 흩날리는 날 밤하늘에 음표처럼 점점이 박혔있던 눈의 화음이 그립다
봉쇄된 도시의 끝자락 창문 틈으로 흘러나오던 노래소리 그대 무사하신가
사모예드가 끄는 눈썰매를 타고 이밤 달려가고 싶다 갈 수 없는 국경의 숲을 넘어
송종찬 시인 / 손끝으로 달을 만지다
아내의 둥근 가슴을 만지다 보면 낮은 천장에도 어둠을 밝히는 달이 떠올랐다 초승달 보름달 사이로 자전을 하고 파도가 밀물져 들 때 작은 돛을 띄워 달에게로 건너가곤 하였다
구름에 가려져 있다가 밤이면 파란 실핏줄을 드러내는 달 그 달에서 지구라는 별을 바라보면 버찌가 익어가는 엄마 품을 빠져나온 불빛들이 강을 따라 소곤소곤 흘러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내의 젖가슴 사이로 마그마 소리 들리기도 하였다 그런 밤에는 우거진 삼나무 숲에 피어 있을 붉은 열매들이 생각났고 짐승의 피처럼 뜨거워져 짙은 안개 속을 헤집고 다녔다
아내의 둥근 가슴을 만지다 보면 손가락도 어느새 둥그러졌다 창문에 얼비치는 쪽달의 야윈 볼을 어루만지고 바닷가 할머니의 거친 무덤을 쓰다듬고 파도 끝에서는 월식이 시작되었다
-시집 『손끝으로 달을 만지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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