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홍관 시인 / 사랑의 풀씨가 되어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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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홍관 시인 / 사랑의 풀씨가 되어
떠나야지 우리 사랑의 풀씨가 되어 흩어져야지 우리 이땅의 어디로엔지
안개처럼 피어나는 묻어둔 이야기며 구름처럼 많기도 했던 못다한 일들이며 묵묵히 남겨둔 채로 빈가슴 부벼댈 언덕을 찾아
떠나야지 우리 사랑의 풀씨가 되어 흩어져야지 기다림의 땅 한반도에
황량한 벌판에 흙먼지 날리어도 대지의 속살깊이 뿌리 내리고 찬연한 풀꽃 한송이 찬연한 꽃 한송이 피워내야지
떠나야지 우리 사랑의 풀씨가 되어 흩어져야지 기다림의 땅 한반도에
서홍관 시인 / 등화관제
모른다고 하라. 네가 눈뜨고 본 일을 끝내 모른다고 하라. 등화관제의 어둠속이어서 한 길 앞도 분간 못한 채 먼지만 꿈속같이 일어 불 끄라는 고함소리에 이불 속에 엎드려 고개만 처박다가 입과 코가 막히고 눈과 귀가 가리워져서 누이가 도적에게 끌려간 것도 모르고 애비가 매맞고 피흘리는 것도 모르고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신음소리 비명소리와 멀리서 다그치는 붉은 빛 구조신호를 어둠을 찢는 듯한 호루라기 소리에 기가 질려 아마 우리는 끝내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하라.
-시집 『어여쁜 꽃씨 하나』 中에서
서홍관 시인 / 랑탕 계곡에서 생긴 일
히말라야의 아침을 맞아 동네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데 돌로 담을 쌓던 아주머니가 나를 부른다
어디서 왔소? 한국이오 아, 그렇다면 우리 아들이 한국에서 돈 벌고 있는데 갸가 보낸 돈으로 집을 이렇게 짓고 있다고 사진을 보여줄 수 있겠소? 아 그러다마다요
집을 짓는 여인네와 집터를 잘 찍고 아예 가족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더니 여동생은 물까지 묻혀서 머리를 다시 빗었다
인천공항에 내리자마자 제일 먼저 라줄 라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이 전화번호는 결번이오니 다시 확인하고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서홍관 시인 / 비단 주머니 -아버님이 들려주신 이야기
어느 날 저에게 목소리를 낮추어 말씀하셨지요.
“대원군이 임오군란 직후에 청나라에 끌려갔을 때 목이 말라서 죽겄더란다. 그래서 가지고 간 비단 주머니를 펴보니 석자 앞을 파보시오 쓰여있더란다. 파보니 샘이 콸콸 넘치더란다. 그래서 갈증을 넘겼디야...”
아버지, 우리가 펴봐야 할 비단 주머니는 어디에 있지요?
서홍관 시인 / 민들레와 개나리
어떤 엄마가 영재 교육 그림책을 펴놓고 아이를 가르치고 있다. "이건 민들레!" "이건 개나리!"
의자 바로 밑에는 민들레가 피어 있는데, 저기 담장 옆에는 개나리가 피어 있는데.
아카시아 향기를 맡으며 아카시아 껌 냄새가 난다고하는 이야기가 이렇게 시작되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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