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고정국 시인 / 기다림에 대하여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17. 08:00
고정국 시인 / 기다림에 대하여

고정국 시인 / 기다림에 대하여

 

내가 그를 기다렸듯이 그가 나를 기다렸을

이제 육십여 년 그 세월 기다려 준

팔방에 등을 돌린 척 꾹꾹 참고 있었던,

평생에 딱 하나 기다려 목이 훌쩍 길어버린

기린 같은 모가지로, 기린 같은 눈시울로

서툴게 시의 초원을 뚜벅대고 있으니

만나야 할 인연이라면 사막인들 마다하랴

건져야 할 시어라면 지옥불인들 마다하랴

저마다 하나씩 둘씩 이제 얼굴 보느니

꽃을 들고 기다릴까, 눈물 품고 기다릴까

더러는 시로 오고 더러는 눈물로 오는

간절한 눈빛 몸빛이 모두 반쪽이었네

일 년을 기다리면 사랑이 되는 것을

십 년을 기다리면 한이 되고 마는 것을

육십 년 기다린 사연 그게 모두 詩였네

 

 


 

 

고정국 시인 / 그날 꽃님이

 

 

꽃에다 '님'자를 당겨

"꽃님!"하고 부르는 순간

 

와락 가슴에 안겨

"시인 님!"하며 부르는 꽃

 

즉흥시 삼천 송이가

하늘 가득

피었지.

 

- 《정형시학》 2021. 겨울호

 

 


 

 

고정국 시인 / 나뭇잎 두 장 받아들고

 

 

낙엽 두 장 받아들고 책상 앞에 앉은 아침

내 가만 눈을 낮춰, 더 아래로 눈을 낮춰

일정한 눈금을 폈던 실핏줄을 보았네

 

열두 폭 샛강을 거느려 세로줄로 이어놓은

그 등뼈 사이사이 가로줄로 흘러드는

또 하나 백두대간의 갈비뼈를 보았네

 

맨 먼저 피었던 잎이 맨 먼저 떨어지고

두 번째 솟았던 잎이 두 번째로 떨어지는

참 착한 아기손들이 손에 손을 포개며

 

나무는 백 년을 살아도 나뭇잎은 반 년인 것

나무는 일 년 동안 일 년짜리 생이었지만

반 년에 백 년을 말하는 나뭇잎이 저 깊이

 

물끄러미 나를 보는 책상 위 나뭇잎 두 장

나는 다시 몸을 낮춰 그 곁으로 다가가서

하늘이 슬며시 내리신 시 한 접을 받았네

 

 


 

 

고정국 시인 / 그리고 꽃잎이 지면

 

 

늦가을에 눈을 뜨고

한겨울에 몸을 여는

 

고향 동백꽃은

바닷바람을 사랑했지

 

그리고 나도 덩달아

그 바람을 품었지

 

바람이 꽃 속에 들면

이미 바람이 아니었네

 

그곳에 숨을 죽이면

그건 곧 사랑이었네

 

그리고 꽃잎이 지면

다시

바람이었네

 

 


 

 

고정국 시인 / 돌이 사람을 기다리듯

 

 

언제나 돌과 진리는 낮은 곳에 자리했다

맞닿은 인연 앞에 몸과 마음을 고쳐 잡으며

한 덩이 오석烏石을 껴안고 밤새 볼을 비볐지

 

어둠을 겹겹이 모아 한 올 빛을 저장하듯

마모된 조약돌에 심장 하나씩 감춰놓고

사람을 기다린 것이 하늘이고 땅인 걸

 

사랑도 미움도 한恨도 다 삭힌 형상석 하나가

바람서리 불편함으로 정온히 몸을 뉘일 때

창변의 아침 수반에 금발 머리 태양이 뜬다.

 

《시조21》2022. 겨울호

 

 


 

 

고정국 시인 / 진눈깨비

 

1.

파지된 이야기들이

포도 위에 지고 있다.

교차로 신호등 앞을

서성이는 삶 언저리

기성화

낡은 뒤축에

삐걱이는 일상이여.

2.

어느새 희끗 희끗

새치 솟는 머리칼에

눈도 비도 아닌

눈물 점 점 맺힐 무렵

그대 먼

기약의 지평엔

노을강이 흐르네.

3.

절반 쯤 사노라면

사는 것이 죄만 같고

빗금치는 눈비 앞에

우산 들기 송구한 날

마흔 셋

더딘 귀가길

속이 젖는 사람아.

 

 


 

 

고정국 시인 / 그리운 나주 평야

 

 

호남 그쪽에서 이재창 시인을 만나

저물녘 한 잔 술에 붉게 물든 나주평야

시인은 소식이 끊겨도 시는 붉게 남는 걸

벼가 고개 숙일 쯤엔 주인 발소릴 알아듣고

오늘은 어느 구절 시 한 점을 바칠까 하고

골똘히 아주 골똘히 귀를 열고 있을 때

땅에 바짝 귀를 대면 우렁우렁 하늘의 소리

하늘과 땅 사이에 울음 우는 모든 것들

저마다 각을 지우고 만종(晩鐘) 곁에 실리던

추수를 열흘 앞둔... 나주평야 저만 같아라

하늘이 허락하신 그 높이로 키를 낮춘

칠천 만 벼 포기들이 다툼 없이 사는 곳

​​

-시집 [그리운 나주 평야] (2019)

 

 


 

고정국 시인

1947년 제주도 서귀포 출생.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민들례 행복론} 외 6권이 있으며, 산문집 {고개숙인 날들의 기록}과 체험적 창작론인 {助詞에게 길을 묻다} 등이 있다. '중앙시조대상','유심작품상', '이호우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한국동서문학작품상' 등을 수상한 바가 있으며,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 지회장을 거쳐서, 현재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여덟 번째 시집인 {탈옥을 꿈꾸며}. 제18회 이호우 시조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