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고경자 시인 / 스페이스 워크 외 4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18. 08:00
고경자 시인 / 스페이스 워크

고경자 시인 / 스페이스 워크

하늘을 걷는 것이 세계를 구하는 방식이라

흔들리는 바람에도 내색하지 않는 행갈이는

내가 갖추어야 할 자세 중 하나다

생존의 높은 공간을 확장하고

절벽은 눈앞의 착각이라 내딛는 첫발로 가늠할 수 있어

계단이라 믿으며 걷는다

향기로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은 한순간뿐

유혹하거나 유혹당하거나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초침의 속도라서

하늘길에는 새장에 갇힌 것들의 깃털들이 쌓이고

블랙박스로도 잡히지 않는 사각 지대에서

식물들의 노래는

햇볕 아래에서 더 잘 들을 수 있어 명랑하다

우리가 정상이라 부르는 구름 속을 통과해

한순간 우주로 팽창하며 날아간다

한 문장이 완성되는 것은

붉은 장미의 꽃잎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다

깨어난 말들은 푸른 날개를 가지고

막다른

한계에서 하늘을 걷는다

세계는 스페이스에 매달여 손을 뻗는다

 

-시집 《날개는 붉은 심장으로 만들어졌다》에서

 

 


 

 

고경자 시인 / holiday

 

 

지루하고도 위험한 하루 끝에는 내일이라는 holiday

장난 같은 어제를 벗어던져도 새로운 오늘은 오지 않고

그저 다른 느낌의 오늘을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대신 짊어지고 가는 것을 용서라고 부르면 달아나는 것이 holiday

부러진 꽃이 얼마나 이기적인 모습으로 발악하는 것을 보여줄게요

1% 차이로 기울어진 선택을 하면 holiday로 가는 티켓을 얻을 수 있어요

티켓에는 이름도 없고 행선지도 없지만 정해진 목표만큼 티켓의 수가 늘어나요

티켓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더 싸지는 것이 holiday만의 법칙

투명한 얼굴을 잘라 어딘가에 붙여놓으면 holiday로 가는 첫 계단이 되는 거야

 

오늘부터 여기서부터 시작된 holiday

조용하고 낯선 방식을 뒤집어도 새로운 방식은 없고

삶이란 번식과 복제의 도넛

뚫린 구멍 사이로 빠져드는 얼굴들과

그 사이에 적혀 있는 이름들은 고전적인 수법으로 묘사되고

시장에 걸린 바나나처럼 살아있는 것과 죽어있는 것에는 차이가 없어

늘 한 발자국씩 앞서가는 그림자들이 몰려들면 떠나는 거야

 

예약자 명단에 오른 당신과 내가 함께 떠나는 holiday

일요일을 제외한 모든 요일에 떠날 수 있어요

어떤 옷을 입어도 화려해지는 마법의 거울을 보면

무표정한 얼굴 대신 눈웃음 짓는 얼굴로 떠날 수 있어요

 

마지막 소원처럼 촛불 하나가 켜지면 축복처럼 떠오르는 holiday

 

 


 

 

고경자 시인 / 사랑의 또 다른 이름

 

 

폭탄을 손에 들고있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타이머는 검게 울어대고

타들어가는 불꽃은 너무 빨개서 눈이 멀 지경입니다

삼킬 수 있는 크기의 폭탄이 째깍거리고

만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너무 행복해 보입니다.

그대도 있군요

 

카페에서 다정한 말씨로 얘기하고 있네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 같은 눈이 심장에게 말을 걸어와요

세상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심장은 어떤 말보다 사과를 좋아하는 편향된 취향을 보이지요

 

그대가 돌아서고 있네요

아니면 내가 그대보다 0.1초 빠르게 폭탄을 던져 버리고 있네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하늘보다 바다가 더 빨리 다가오고

나무에서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우리 집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종소리처럼 들립니다

모든 것들은 어릴 적 종합선물 세트처럼

오래 먹다가 싫증 나면 무관심 속에 버려지는 습성이 있습니다

 

폭탄이 터지지 않는 것은 다행일까요

하지만 심장은 터져서 더 이상 말을 걸어오지 않네요

 

 


 

 

고경자 시인 / 까치가 운다

 

 

오후 세 시

아파트 어디쯤에서 까치가 운다

반가운 소식은

먼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안부를

물어오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아침과 저녁 사이의

시시콜콜한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얘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

가을을 닮은 사람이 부르는 소리처럼

동그랗게 오려 보낸 심장 하나가

울음 하나로 물들어 간다

 

-시집 <사랑의 또다른 이름> 시산맥사, 2020

 

 


 

 

고경자 시인 / 사랑의 또 다른 이름

 

 

폭탄을 손에 들고있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타이머는 검게 울어대고

타들어가는 불꽃은 너무 빨개서 눈이 멀 지경입니다

삼킬 수 있는 크기의 폭탄이 째깍거리고

만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너무 행복해 보입니다

그대도 있군요

 

카페에서 다정한 말씨로 얘기하고 있네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 같은 눈이 심장에게 말을 걸어와요

세상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심장은 어떤 말보다 사과를 좋아하는 편향된 취향을 보이지요

 

그대가 돌아서고 있네요

아니면 내가 그대보다 0.1초 빠르게 폭탄을 던져 버리고 있네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하늘보다 바다가 더 빨리 다가오고

나무에서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우리 집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종소리처럼 들립니다

모든 것들은 어릴 적 종합선물 세트처럼

오래 먹다가 싫증 나면 무관심 속에 버려지는 습성이 있습니다

 

폭탄이 터지지 않는 것은 다행일까요

하지만 심장은 터져서 더 이상 말을 걸어오지 않네요

 

 


 

고경자 시인

전남 광주 출생.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대학원 졸업. 2011년 《시와사람》 겨울호로 등단. 2015년, 2018년, 2020년 광주문화재단 문예창작기금 선정. 시집으로 『하이에나의 식사법』, 『고독한 뒷걸음』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 있음. 소방관으로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