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주성 시인 / 막북(漠北)에 가서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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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주성 시인 / 막북(漠北)에 가서
민들레도, 쉬어갈 나무 그늘, 이정표 삼을 바위 하나 허락되지 않은 가도가도 눈보라 치는 겨울들판 밖에 없는 고비를 지나며 우리는 하루 온 종일 살아있는 것이라곤 길 잃은 어린 양 한 마리를 보았을 뿐이었는데 어린 양은 휘날리는 눈 속에 우두커니 서서 발뒤꿈치로 얼어가는 제 추억을 밟고 서서 홀로 된 제 앞날에 열중해 있었지만 막다른 곳이란, 사방팔방이 트인 채 아무것도 없는 곳 양을 스치고 지나가는 차창으로 우리는 내년 봄이 오면 싸늘히 주검으로 그 자리에 얼어 있을 양의 미래를 보면서 희한하게도 우리 자신을 떠올렸던 것이다. 들쥐놈들이 독수리로부터 제 몸 숨길 주먹만 한 돌덩이 하나 없어 슬픈 지평선 말고는 아무것도 가로막는 것이 없어 슬픈 들판 아무데로나 걸어가면 길이지만 길은 언제나 발끝에서 그 어린 양처럼 멈춰 서 있었고 대지는 너무나 넓어서 닿을 곳이 없었던 것인데 그래서 양이 잃어버린 것은 길이 아니라 동행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우리는 사이가 너무 멀어서 슬픈 것들을 떠올렸고 몇몇은 술을 찾았던 것이다. 차 뒤의 뿌연 흙먼지 너머로 어린 양은 점점 작아지면서 제 운명속으로 사라지고 우리는 작년에 잃어버린 그리움이라도 찾아야 겠다는 듯 맘 구석을 들쑤셔 낭자한 漠北의 황혼을 내달렸던 것인데 밤늦게 도착한 숙소 밤하늘에 무수히 빛나는 눈동자 어느새 어린 양은 우리보다 먼저 숙소에 돌아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첫몽골여행에서..어린양을 만난 겨울 초입-
송주성 시인 / 묵호
해 넘어간 묵호함 뜨거운 곰치국을 먹는다
안녕, 잘 있어라 이 말을 해두고 싶어서 그립다. 이 말을 미리 해두고 싶어서 이 한 그릇 뜨겁게 문드러지는 것을 삼키려고
나 혼자 이 먼길을 왔다
송주성 시인 / 인생은 아름다워
지구에서 제일 먼저 증발되는 물은 사막 낙타의 눈물
맑은 날, 오늘도 인생은 아름다워서 사막 위에 세운 도시의 거주자들은 소풍 도시락과 망원경을 들고 에어쇼 구경 나온 사람들처럼 언덕 위 관람석에 모여 오순도순 가족들끼리 점심 식사를 하면서 폭격기를 기다린다 폭격기가 굉음을 내며 나타나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면서 망원경을 꺼내 멀리 팔레스타인 쪽의 검은 연기와 불기둥을 로마 황제처럼 내려다본다 한 아이의 어머니이자 한 남편의 아내인 여인 검은색 옷 안에 폭탄 띠를 두른 여인 한 아이의 어머니였던 여인이자 한 남편의 아내였던 여인 검은색 옷과 함께 공중에 흩날린 여인에게 죽음의 고통을 가르쳐주기 위해
지구에서 별빛 가장 아름다운 곳은 사막
-시집 <나의 하염없는 바깥>에서
송주성 시인 / 상가喪家
이 세상 사는 동안 한번은 우리 단 한 사람을 위해 설겆이 하다 말고 퇴근하다 말고 잠자다 말고 모여서 눈물도 흘려주고 기꺼이 단 한 사람을 위해 그리워해주고 마음을 주고
이 세상 사는 동안 적어도 단 한번은 우리 그들 모두로부터 아 그리운 그대들 모두의 그토록 더운 속 심지 하나를 눈물이 날 정도로 황송하게 받을 수 있다 적어도 삶이 끝나는 마지막에는
송주성 시인 / 지하철 2호선 당산역과 합정역 사이
지하철 2호선 당산역과 합정역 사이에 가고 싶었다. 거기 영원이 흐르는가? 기차는 당산역까지 갔다가 건너편 합정역으로 가려면 왔던 길로 돌아가야 한다. 가다가 내려 승강장 나무의자에 앉아 쉰다. 나무의자의 등받이는 벽에 붙박여 있다. 벽에 묶여 꼼짝도 못함으로써 사람들의 등을 받쳐주고 기대어 있게 해주는 나무의자의 고요한 영혼
어딘가에 사로잡혀 있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받쳐줄 그 무엇이 될 수 없다는 듯이
나는 내가 사로잡혔던 사람들을, 세월을 생각한다. 또 누군가에게 벽이 되어 사랑과 눈물과 목숨을 달라고 내미는 어두운 손으로 벽, 아직도 내 가슴을 껴안고 있는 벽. 강가를 온종일 맴도는 지하철 2호선. 당산역까지 갔다가 건너편 합정역으로 가려면 왔던 길로 돌아가야 한다. 사람들을 제 무릎에 앉혀놓고 무언가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 역마다 벽에 붙들린 의자들
왔던 곳은 가야 할 곳이기도 하는 것 그리운 저쪽은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왔던 길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당산역과 합정역 사이가 봐란듯이 비어 있다.
송주성 시인 / 시
내가 시랍시고 쓰는 것들은 시가 아니라 실은 케케묵은 버릇들이 아닐까 돌려 말하고 빗대어 말하는 것 흐릿할수록 넉넉해 보이던 서글픔의 추억이 아닐까 당신의 얼굴을 향해 조금씩 말하는 것 눈물 앞에서 꼼짝 못했던 팔 저린 기억이 아닐까 말을 끊고 넘기고 잇고 또 말을 남기는 것 누구를 생각하며 아픔을 먼저 연습해두던 혼자 오르던 오후의 다락방 같은 것 내 오래고 텁텁한 위안의 기술이 아닐까 모음에 맞추고 자음에 흘리고 박자를 치며 바람 몹시 부는 날 부는 바람 속으로 못다 부른 노래 들려주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시랍시고 쓰는 것 밤하늘도 별도 바람도 어머니도 누나도 형도 아버지도 당신도 그들도 모두 우리면 좋겠어서 완성되지도 못할 편지를 쓰다 말다 하던 고백하지도 않을 말을 뒤척이며 연습하던 외진 날들의 버릇이 아닐까
송주성 시인 / 코펜하겐 동물원을 위한 이중주
4월 16일, 아침 어제까지, 모든 이론은 시들을 이겼고 오늘, 세상은 모든 이론을 이겼다
일요일 오전, 코펜하겐 동물원은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관람객들 앞에서 기린 마리우스를 전기충격기로 쏴 죽였다 미국은 망해가는 은행들에게 6천억 달러를 풀었고 마리우스의 살과 뼈는 사자 일가족에게 던져졌다 동물원은 그 사자들도 죽였어도 미국 국민들은 도덕적 해이를 규탄하며 월스트리트에 돌을 던졌고 수많은 시민들은 도살자들에게 당장 문을 닫으라고 부르짖었지만 동물원은 당당히 말했다. -기린 마리우스는 너무 흔한 종자여서 죽었고 사자 가족은 공간이 부족해 죽었다
너무 흔해빠진 자본주의에 맞서 현대의 시인들은 흔해빠지지 않은 시를 쓰고자 필사적이었지만 자본주의를 살리기 위해, 라는 대의와 슬픔이 변경된 적은 없다
4월 16일, 밤 세상보다 슬픈 시는 아직 쓰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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