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건호 시인 / 우리는 섬 외 6편
|
박건호 시인 / 우리는 섬
한 친구가 떠나도 빈 자리는 없다 또 한 친구가 떠나도 빈 자리는 없다
진실이 맥주잔 밑으로 가라앉고 웃음이 거품처럼 부푸는데 나는 오늘도 취하지 못한 채 그들의 대화에서 그들의 고독을 건져낸다.
내가 너를 알려고 했던 것은 얼마나 무모한 일이던가 너는 만날 때마다 늘 다른 얼굴로 다가 오고 우리는 저마다 하나의 섬 빌딩 한복판을 걷다가도 파도 소리를 듣는다 바위에 부딪치는 물결의 울부짖음을 듣는다 떠나갈 사람의 떠남과 떠나갈 사람의 망설임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 저마다 가슴에는 타인이 와서 머물 자리가 없다.
박건호 시인 / 빗소리
빗소리를 듣는다 밤중에 깨어나 빗소리를 들으면 환히 열리는 문이 있다
산만하게 살아온 내 인생을 가지런히 빗어주는 빗소리
현실의 꿈도 아닌 진공상태가 되어 빗소리를 듣는다 빗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얼마나 반가운 일이냐
눈을 감으면 넓어지는 세계의 끝을 내가 간다 귓 속에서 노래가 되기도 하는 빗소리 이 순간의 느낌을 뭐라고 표현할까
빗소리를 듣는다 빗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얼마나 반가운 일이냐
박건호 시인 / 쥐똥나무꽃을 보면서
쥐똥이 꽃의 이름을 달자 이렇게 화사한 줄 처음 알았습니다 숨어서 피어난 꽃잎 사이로 세상은 신비롭기만 하네요 이제 나도 숨쉬는 카메라 렌즈가 되어 외딴 담장 어느 후미진 곳에 있더라도 아름답기만 하다면 그것을 마음 속에 차곡차곡 담아두기로 했습니다 쥐똥만도 못하면서 교만할 수밖에 없는 인간 무엇이 잘났기에 이 세상을 비웃기만 합니까 한송이 쥐똥나무 꽃이라도 될 수 있다면 인생은 향기로울 것입니다
박건호 시인 / 왈
나는 유행가 가사를 썼다 돈이 될 것 같아서 첫사랑의 여자를 어디론가 보내버리고 쓰러지기 직전까지 골을 혹사했다 그 사이 여러 명의 신인가수가 탄생했다가 은퇴를 했고 먹고 사는 데야 지장은 없지만 그렇다고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다 가사를 써 준 사람들 앞에서 침을 겔겔겔 흘리다 보면 무엇인가 자꾸 더러웠다 더러워서 더럽지 않은 곳을 찾다가 그만 똥을 밟았다 그때 어떤 시인이 왈 내가 쓴 시는 요즘 쓰는 다른 시의 경향과 다르고 시대적 감각이 뒤진다고 말했다 나는 독창적인 방법으로 다시 유행가 가사를 썼다 작곡가들이 너무 시적이라고 한다 다시 시를 썼다 시인들이 너무 유행가 가사적이라고 한다 젠장 짖어라 왈
박건호 시인 / 게의 속살을 파먹으며
게의 속살을 파먹어 본 사람은 안다 단단한 것일 수록 쉽게 허물어진다는 것을 속살을 보호하기 위한 껍질은 무엇인가에 부딪치면 균열이 생겼다 균열의 틈 사이로 들어와 누군가 나를 파먹는다 단단한 껍질을 믿었으나 단단한 껍질은 믿을 것이 아니었다 부딪치고 깨어지는 연습도 없이 나는 허물어졌다 허물어지고 허물어졌다 게의 속살을 파먹어 본 사람은 안다 단단한 것일 수록 쉽게 허물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사랑이 아닌 어떤 제국의 힘으로도 우리의 속살은 보호할 수 없음을
박건호 시인 / 이런 쌍년
신쥬쿠 가부끼쪼는 도쿄에서 유명한 환락가 극장 술집 빠찡꼬 가게들이 저마다 휘황한 불빛들을 앞장세워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날 내가 권 선생을 따라 한국 클럽으로 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절반은 쪽발이가 다 돼 버린 어느 동포 아가씨가 다 마시지도 않은 잔에 자꾸 술을 따른다. "아가씨, 우리 나라 풍습에는 제사 지낼 때나 첨잔을 하는데?" "여기는 일본이에요.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잖아요?" "아니, 그 말을 꼭 이런 데 적용해야 하는 거요?" (아가씨는 그 말에는 대답도 않고 담배를 한 개피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나는 멋쩍어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가씨, 서울에 사는 외국인들이 우리 한국의 방식대로 살지 않는데 그건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 사람들이 뭐가 답답해서 그까짓 한국의 방식을 따르겠어요? 촌스러운 한국의 방식을……." 아아, 나는 거침없이 튀어나오는 그녀의 말을 듣자 “이런 쌍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가슴은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그냥 참아야 했다. 어쨌든 그녀는 조국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못 가르친 조국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박건호 시인 / 또 하나의 전쟁터
우리는 전쟁을 몰라요 그것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 이땅에 상처가 아물어 갈 때 우리가 태어났으니까요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알고 있어요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침략은 계속되고 있어요
저 넓은 바다 저 높은 하늘 그곳은 또 하나의 전쟁터
끝없는 평화 얻을 때 까지 우리는 싸워야 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