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명순 시인 / 비둘기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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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명순 시인 / 비둘기
모이를 주느라 상자 속에 손을 넣으면 점점 치유되어가는 기운의 부리가 갇힘이 원망스러운 듯 내 손을 쿡쿡 찍는다 다리를 절며 깨금발로 상자 안을 뛰어다니기도 한다 어느새 자란 날갯죽지로 포르르 날아 상자 밖을 벗어나 선반 위에도 앉는다 성깔부리듯 똥을 마구 갈겨버린다 치유의 목적으로 그동안 내가 너무 끼고 살았나? 더 이상 좁은 상자로는 그를 잡아둘 수가 없다 그동안 좁쌀 한 줌, 물 몇 모금으로 나누었던 정한, 식혀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날려보낼 때가 된 것 같다
산 옆 공원으로 가 그를 놓아준다 '제발 다치지 말고 잘 살아라.' 놓자마자 금세 날아서 나뭇가지에 앉는다 저렇게 하늘을 날고 싶었던 것을, 새로 만난 비둘기와도 부리를 맞댄다 저렇게 딴사랑도 만나고 싶었던 것을,
-『월간문학』 2006. 4월호
노명순 시인 / 춤
굼벵이도 춤을 춘다 누군가 무심코 밟아버린 몸뚱이를 겨우 폈다 구부렸다 있는 힘을 다해 춤을 춘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도 얼쑤! 마디마디 움직여 추임새를 넣으며 춤을 춘다 햇살이 비추면 마른 침을 꼴깍 삼키고 잠깐, 멈추었다 춤을 춘다 자진모리 중중모리 살짝 발림을 넣어가며 용을 쓰며 춤을 춘다
머리를 다치지 않았으면 고개 짓이 예쁠 텐데
투명한 날개가 솟아 피가 통할 때까지 말문이 터져 공명기로 울어댈 때까지 초록 잎 우거진 내 집에 당도할 때까지 기어가며 뒤집어지며 춤을 춘다 껍질 벗는 그 순간을 위하여 얼쑤, 얼쑤!
-『현대시』2008-1월호 <신작특집>에서
노명순 시인 / 10%의 사랑
여류시인들이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90% 정도만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다면
모든 경계를 풀고 사랑 한번 해보겠노라고, 배부른 소리인가?
지하 단칸방에 혼자 살고 있는 k시인만이 소주잔을 단번에 훌쩍 들이키며
"나는 10%만 마음에 들어도, 내게 열정적인 사랑만 부어준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겠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얼음낀 벼랑에 겨우 발 한짝 붙이고 서 있는 그녀가 보인다.
모든 걸 잃어 본 사람에게 10%는 아주 큰 것이고 말고
노명순 시인 / 황혼
늦은 저녁 실어증에 걸린 낡은 흙덩어리 하나 동네 놀이터 그네 위에 얹혀져 있다
그를 안고 젖 주던 어머니도 그가 안고 젖 주던 아기도 잃어버린 채 망연자실 동네 놀이터 그네 위에 앉아 있다
간신히 걸친 몸뚱어리가 축축하다
해 진 지 오래 되었나 보다
노명순 시인 / 돌 속에서 열리는 포도
와인 레이블에 왜 돌이 등장했을까 갈라지고 반질반질한 돌의 표면, 돌은 아주 오랜 세월 강물에서 뒹굴었을 것이다 바람에 강물 옆 포도밭으로 차츰 구르고 굴러가 자리 잡았을 것이다 돌은 낮 동안 햇빛을 품었다가 차디찬 밤이면 포도나무의 발밑을 데웠을 것이다 짙푸른 잎과 실팍해진 가지 사이로 사정없이 조여 팽팽했을 검붉은 포도 돌 속에서 열리는 포도의 절정
돌이 그려진 와인 병 속이 더욱 궁금했다 어떤 음악이 연주되고 무슨 춤을 추며 눈짓을 해올지 서둘러 핑카 발피에드라*의 병마개를 따고 투명한 유리잔 속에 그의 흐르는 몸을 풀어보았다 그가 살아왔던 하늘과 바람 포도밭과 강물을 입맞춤하며 잔을 부딪치며 서로 어찌 느끼는지 마음을 마셔보았다 순간, 시고 달던 맛이 혀끝에서 입 안 가득 붉게 번지며 따뜻해지며 서로의 약속의 씨알이 단단해졌다.
* 핑카 발피에드라(와인) : 스페인 리오라 지역의 와인 명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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