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권천학 시인 / 사소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 외 4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19. 08:00
권천학 시인 / 사소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

권천학 시인 / 사소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

가령, 손가락으로 개미를 누르는 일은 아주 사소하다

그러나 손가락의 힘에 눌려 죽은 개미에겐 절대로 사소하지 않다

저의가 없는 사소한 행동이 사소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절대로 힘을 생각없이 쓰지 않는 일만큼이나 사소하지 않다

손가락을 가시에 찔리는 일은 사소하다

남의 염통이 곪는 것보다 가시에 찔린 내 손가락은 사소하지 않다

그보다 더 사소하지 않은 것은

가시에서 꽃을 피워낸다는 것을 깨닫는 일

그러나 가시밭길을 살면서

성공의 꽃을 피워내는 일은 더욱 사소하지가 않다

감기에 걸리는 것쯤은 사소하다

감기가 만병의 근원이라는 것까지도 사소할 지경이다

그러나 폐렴으로 목숨을 차압 당하게 될 때

감기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

 

 


 

 

권천학 시인 / 그물

 

 

내 손금이

내 생애 얽는 오랏줄 되어

삼줄 질긴 인연으로

내 발목 묶이고 싶네

 

그대 가슴에 박힌 서러운 가시

내 눈물로 뽑을 수만 있다면

그물 속에서 버둥대는 은빛 물고기 되어

꺼이꺼이 울어 쌓는 강물 되어 흐르겠네

 

잠 못 이뤄 마른 몸뚱이

깊고 긴 꿈에서나마

한 그루 나무로 마주 할 수 있다면

내 생애 한 귀퉁이를 잘라내어도 좋겠네

 

그대 터진 상처에

내 살점을 보탤 수만 있다면

어디 한두 군데 흔적이 아니고

온통 한 덩어리의 아픔이고 싶네

 

 


 

 

권천학 시인 / 슬픔 한 올

-초록비타민의 서로움 혹은 34

 

 

누구의 가슴에나 떠도는

그런 바다 말고

누구네 집에나 있는 그런 가재도구 말고

누구에게나 찾아와

몸살 앓게 하는 그런 계절도 말고

누구나 품어 안을 수 있는

그런 여자 말고

빛나고 싶어 출렁이는 물결이 아닌

날카롭고 싶어 스스로 베이는 칼이 아닌

권위롭고 싶어 굳어버린 낱말이 아닌

 

보석 같은 꽃잎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뿌리의 슬픔 한 올

 

 


 

 

권천학 시인 / 살앓이

-위선

 

 

입덧하는 여자처럼

속이 메슥거린다

 

남몰래 자라는

간통의 씨앗

자꾸만 작아지는 옷매무새를

끌어당겨

가장 부끄러운 그곳을

가리고 싶었다

 

 


 

 

권천학 시인 / 제재소 옆을 지나며

 

 

속살의 아픔 한 가운데를 지나가는

톱날 소리를 들으며

한 생애를 뭉턱뭉턱 잘라먹는

톱날 소리를 들으며

나이테 속으로 얇게 얇게 저미는

톱날 소리를 들으며

무너진 몸뚱이의 옹이를 파내는

톱날 소리를 들으며

죽지 못한 가지들을 쳐내는

톱날 소리를 들으며

 

바로 서게 하는 기둥으로

바로 눕게 하는 널빤지로

 

톱날에도 잘리지 않는

속살이 되어

톱날에도 잘리지 않는

생애가 되어

톱날에도 잘리지 않는

분노가 되어

톱날에도 잘리지 않는

옹이가 되어

톱날에도 잘리지 않는

산보다 높은 희망이 되어

 

한 그루 소나무로

한 자루 톱날로

 

 


 

권천학 시인

1946년생.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현대문학에 시 '지게' '지게꾼의 노을'로 데뷔.  서울신문, 관악 문화 신문 등 컬럼니스트 역임. 2010년 경희해외동포문학상 대상 수상. 시집 <그물에 갇힌 은빛 물고기> <청동거울 속의 하늘> <나는 아직 사과씨 속에 있다> <가이아부인은 와병중> <고독 바이러스>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등. 계간문예 '다층' 편집동인. 한국전자문학도서관 웹진 '블루노트'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