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서린 시인 / 꽃에 대한 예의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19. 08:00
이서린 시인 / 꽃에 대한 예의

이서린 시인 / 꽃에 대한 예의

 

 

저녁 해가 토해 놓은

바다에 핀 저,

출렁이며 흔들리는 붉은 덩이가

선창을 물들이다

닻 내리던 어부의

굽은 등을 물들인다

섬 모퉁이 물결 따라 사라지는 노을 꽃

장엄하게 피고 지는 생에 대한 예의로

부둣가를 서성이던 늙은 개가 조문하는

 

-동인시집 『하로동선』 6집 (2021)에서

 

 


 

 

이서린 시인 / 박수기정

 

 

태양이 낳은 노을을 품던 날이었다

먼 바다를 항해하던 고래가 돌아온 그 밤

달은 아이의 눈망울에 맑은 샘을 들여놓고

소리도 없이 흐르던 물소리와

밤새 나의 머리맡을 두드리던 파도는

절벽의 검은 기슭에서 오래도록 뒤척였으니

 

아직 돌아오지 않은 사람은 전설로만 남았는데

비바람 칠 때 범람하는 물결에 용을 보았다는 것은

간절한 기다림의 다른 말

 

배를 타고 나간 그는 수평선을 넘었을까

물길을 열어 자신의 길을 완성은 하였을까

그 길에 등대는 있었는지

별빛은 어디까지 따라갔는지

 

절벽 끝까지 가 본 아이의 발길

물빛은 하늘을 당겨 경계도 없이

구름도 심어놓고 갈매기도 심어놓아

외롭지는 않았다

 

바다를 열고 해의 정수리가 올라올 때

물속 계단을 내려가 귀를 씻으면

이윽고 깊은 울림으로 먼데서 들려오는

아니, 듣는 이에게만 들리는

오랜 기원의 휘파람

 

웹진 『시인광장』 2023년 5월호 발표

 

 


 

 

이서린 시인 / 북면

 

 

북쪽의 얼굴이란 이름이 마음에 든다 하였다, 그는

북면北面이란 이름은

사방 어디에서도 북면이며

동면도 서면도 남면도 아닌, 북면

이라는 발음이 마음에 든다고도 하였다

복면처럼 들리기도 하여

표정을 알 수 없는 복면을 썼을 것 같은

북쪽의 얼굴

 

싸움에 패배한 상처투성이 고양이의 울음과

오래된 농기구만큼 늙은 몸들이 절룩이며 지나는 들녘

감밭은 종횡무진하는 까치 떼가 마을 사람보다 많은

대문 밖이 저승같이 깜깜한 밤

들에서 일하던 그가 달빛을 긋고

북두칠성을 몸에 새긴 채

그림자를 끌고 돌아오는

먼, 곳

 

어둠에 묻힌 그의 뒷모습과

돌아오는 새들로 무성한 대숲 소리

간혹 우울한 짐승의 울음이 밤하늘에 퍼지는

여기는 아직

북면의 안쪽

 

-시집 『그때 나는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에서

 

 


 

 

이서린 시인 / 붉은 강물이 흘렀다

-삼랑진 검세리 학살지

 

 

1.

그해 칠월의 끝

한낮의 태양은 식어갔고

여름날 저녁의 더운 입김 아래

마을은 한숨과 공포에 젖어 있었다

사방이 어둠에 잠기고 세상이 잠들 무렵

비명을 지르듯 기차는 달렸고

낙동강 검세리 철길 부근은

한 무리의 검은 그림자로 소란하였다

컴컴한 철길 옹벽에 사람들을 세우거나

묶인 채로 세워지는 무리로 운명은 나누어졌다

한밤중을 뒤흔드는 총소리와

처참하게 강물에 던져지는 사람, 사람들

아니라고, 아니라고 몸부림쳐도

산 채로 수장을 당하거나

총에 맞아 떠밀려서 사라져간 사람들

낙동강은 핏물로 번져 흘렀다

 

2.

죄 없이 죽어야만 했던 한 나라의 사람들이

양산의 중리마을 모래톱에 걸렸거나

대한해협을 지나 대마도에서 발견되었다

 

3.

기차는 오늘도 달리고

삼랑진 시루봉 강변 따라 이어지는 철길 아래

나란히 굽어지는 자전거도로

은색 바퀴를 굴리며 몇 대의 자전거가 옹벽 아래를 지난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무성한 풀과 나뭇잎

핏물을 품었던 낙동강이

눈물을 삼키며 흘러, 흘러간다

 

 


 

 

이서린 시인 / 어이없지만

 

 

오래돤 사진속

온 천지 꽃 사태 봄눈처럼 흩날린 날

만지면 번질 것 같은 벚꽃을 배경으로

단발 소녀는 철없이 웃고 있었다

 

와르르 떨어지는 꽃잎인 줄 알았지

하, 그놈의 입술인 줄 미처 몰랐다

 

그 봄, 분홍의 꽃들이 여좌천을 따라 흘러가고

사랑의 언약들도 꽃처럼 피고졌다

 

사진 속 얼굴이야 잊으면 그만인데

꽃 지듯 지난 날 지고나면 그만인데

 

꽃이 지면 어쩌나 애태우던 봄

꽃물 번져 두근거리며 지새웠던 밤

달의 주기도 다 채우지 못해 짧아서 가련한

 

첫사랑이었다

 

 


 

 

이서린 시인 / 저녁의 內部

 

검은 자락 펄럭이며 몰려오는 구름

산이 지워지고 있다

 

죽은 고양이의 말라붙은 털이

풀처럼 돋아난 저녁

길인 듯 아닌 듯 헤드라이트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5번국도 삼거리

나는 아직 이 길이 어디에서 끝나는지 모르는데

겨우 눈 뜬 별을 따라가는 저 까마귀는

알고나 날아가는 것일까

 

누군가는 진통제를 먹고 다시 밥을 짓고

누군가는 弔問하러 집을 나서는 어두운 문밖

셀 수 없이 다녔던 이 길 위에서

바람에 일렁이는 세상을 본다

 

운전석 깊숙이 가라앉는 몸

삼거리 창고 앞을 지나는 개 한 마리

저기, 상향등으로 달려오는 트럭의 경적

 

저녁은 內部로부터 통곡하는 짐승같이

짐승같이

 

 


 

이서린 시인

1961년 경남 마산 출생. 1995년 《경남신문》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  시집  『저녁의 내부』 『그때 나는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2007년 김달진창원문학상 수상. 2021년 형평지역문학상 수상. 경남문인협회 이사, 경남시인협회, 창원문인협회 부회장. 김달진문학관 상주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