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옥 시인 / 밤夜의 만다라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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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옥 시인 / 밤夜의 만다라
사과를 돌려 깎는 소리가 들립니다 죽은 듯이 누워 있어도 사과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습니다 말하는 그가 손을 내밉니다 돌 하나 쥐고 있습니다 정수리 속의 질문입니다
눈을 뜨지 말아요 아침은 가방에 넣어 드릴게요
사과는 빵과 달걀과 구름과 어우러집니다 비가 옵니다
생각나지 않는 무언가의 테두리를 온전히 만질 수 있다면, 태어나는 것보다 두려운 건 밤이 주는 선물입니다 고독입니다
지갑을 놓고 내린 손님을 찾아 내달리는 택시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잠시 미루어졌던 기사의 마음이 불안과 안도 사이를 가로질러 날아갑니다
원하는 건 소등되지 않는 이상理想입니다
사과 껍질을 당기는 당신은 밤을 몇 번이나 벗겨냈습니까
멈춘 빗소리는 손바닥을 지울 줄 모릅니다 내가 너무 무거워지기 전에 내가 너무 가벼워지기 전에 껍질 속 육신을 등분합니다 아픕니까?
덜 익은 사과를 찾기 위해 한 걸음 정도만 당신 세계로 들어갑니다
백골처럼 하얀 돌에 귀를 가까이 들이대면 다시 우산 펼쳐지는 소리 들립니다 팽팽합니다
김순옥 시인 / 절정
미안해요, 여기가 아닌 것 같아요 환승역을 돌아온 트럭이 증발해 버렸어요 옆집 할머니는 백 년을 살았어도 몰랐을 거예요 당신의 광기였던 메아리가 돌이 될 때까지 꽃밭을 오리고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노래하는 극락조화 염소는 매애 매애 버스 손잡이들은 엉킨 주먹을 몇 번이나 집어 삼켜야 풀려날까요 타닥타닥, 먹다 남은 치킨 조각 전자레인지 안에서 3분 악마가 이기는 순간에 꽃은 피지 딱, 3분간 체온이 올라가요, 아직 덜 죽었나 봐요 꽃들은 코 위에 안경을 고쳐 얹고 종이를 씹던 염소 똥구녕에 눈동자 푸르게 자라고 있어요
김순옥 시인 / 그 숲, 마흔아홉 번째 나무를 지나
종이를 나무처럼 오려 둥근 창문 앞에 심어 놓고 자라길 기다린다 나무 위 달은 둘로 보였고 가지마다 지퍼가 활짝 열린 가방들이 보인다 가방 안은 이끼로 가득 차, 가지 몇몇 축 처져 있다 이끼는 촘촘한 위안 같아서 조문의 말로 담으면 간간이 들려오는 어둠을 밀어낸다 어떤 나뭇가지 끝에는 창이 달리고 창틀에 올려진 물컵 떨어진다, 가지와 바닥 사이 물은 선을 지우고 면을 지우고, 물렁한 섬들이 떠다닌다 죽어 가는 일은 가끔은 화려해져서 귀먹은 귓속으로 빛 조각이 들어와 쌓인다 덜 무서운 곳에서부터 더 무서운 곳으로 바람이 불고 섬이 기운다 흔들리는 창, 달빛이 섬에 떨어진다 섬의 정수리에 하나둘 하나둘셋 하나 달빛 방향으로만 자라는 그늘의 바깥, 나비였던가 창문을 열면 닫힌 창문들이 무수히 나타나고 섬이 벌어진다 당신 등이 벌어진다, 조금씩 조금씩 끝내 환해진다
김순옥 시인 / 호우주의보
이대로 폭설이면 좋겠습니다 매일매일 눈사람이길 바랍니다 나뭇가지를 덮고, 길을 덮고 어느 순간 마을을 덮고 모호해지기 위해서는 고양이 발자국을 따라 내리는 눈이 딱입니다 당신은 하나인데 여럿인 나는 나를 눈 속에 단단히 묻습니다 당신의 절반만 떼어 내 옆에 묻습니다 당신 귀가 접히고 있습니다 귀 뒤쪽에 고양이 타투를 한 여자가 지나갑니다 우연을 가장한 길목에서 고양이가 당신을 보고 있습니다 바닥을 쓸어 봅니다 한 무더기 바닥이 쓸려 갑니다 앞에도 뒤에도 겨울만 흘러내립니다 햇빛에 부딪쳐 깨져 버린 높이에서 당신은 눈 속에 맨발을 담급니다
김순옥 시인 / 길은 어디로도 가고 아무 데도 못 간다
죽은 나와 살아 있는 당신 이어질까 봐 우린 멀다 어제의 유물이 박물관에 전시되듯 소음과 먼지는 동음이의어, 유사어로 전개된다 아이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더듬으며 걷는다 손때 묻은 곳은 다 내 땅이야, 자라는 동안 늙어 간다는 것을 모르는 채 햇빛에 타 버린 눈동자, 늙음은 허락하지 않는다 시장 모퉁이 나물 대야를 쥐고 잠든 노파가 방어적으로 구부정하듯이 은행잎 몇 장 달랑거리는 나무 아랫도리를 저녁이 애써 감싼다 수묵화 속을 걷는 듯 꽃 같은 생이란 없다 손끝으로 살고 멈춘 파도를 넘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건너뛰는 따위도 없다 날마다 진달래가 필 거잖아 움켜쥐고 걷던 말, 손바닥을 파고들어 손바닥이 되어 버린 돌멩이 그때 먹던 음식 맛이 도저히 기억 안 나, 난 말이야 너를 난생 처음 봤어 물컵에 꽃힌 고구마, 두 귀로 훔쳐보고 있다 눈이 될 때까지 2022년 상반기 아르코 창작기금 발표지원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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