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둘임 시인 / 수목장 배롱나무 외 12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20. 08:00
이둘임 시인 / 수목장 배롱나무

이둘임 시인 / 수목장 배롱나무

 

 

산길 걸으면

퍼덕이는

새 한 마리

 

나무들의 호위를 받으며 난다

 

입구의 나무들이 싱싱하게 서 있다

 

어머니 앉힌

배롱나무가

눈앞에서 출렁거린다

 

그 안

깊은 곳

어머니가 계신다

 

가진 것

다 내어주고도

더 내어줄 것 없나 살피던 어머니

 

배롱나무 꽃그늘에 안긴다

 

푸근한

안식의 자리에서

울컥이던

어깨 새 한 마리

 

그리워, 그리워,

 

불새가 되어 난다

 

 


 

 

이둘임 시인 / 괴석도*

 

 

층층이 삐뚤어져 아슬하다

 

책이 책을 이고 그 위에

책을 중첩한 기개는 문인화 닮았다

 

오랜 시간 몸에 박힌

책 속의 뼈처럼

무언의 칼날이 번쩍이듯

가늠할 수 없는 깊은 뜻 감추고

반항이 꿈틀거려도

비바람이 흔들어도 굴하지 않고

 

위태한 바위 곁 지키는

풀꽃과 이끼랑

공생하는 음덕이 듬직하여

삐뚤어진 돌탑 모서리마다 빛을 발한다

 

비록 벼랑의 돌이지만

언젠가

구름 덩어리가 피어오르듯

솟구쳐 산이 되리라

 

수묵에 담은 서사

작은 소우주 천지의 뼈를 담고

고요히 내 안으로 들어온다.

 

*석정 이정직 괴석도8곡병5번

 

 


 

 

이둘임 시인 / 석정에 물들다

 

 

그의 연대기 찾아 아픈 시간과 대면한다

 

안으로는 말세의 풍습이 걷잡을 수 없고

밖으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파도가

조선을 덮치며 서구 열강의 그림자가 옥죄고 있던 암울한 때

 

한없이 무거운 왕명 받든 사행使行길

천길 먼 길 두렵지 않았다

 

낯선 땅 회동관*에서 막막하던 심정

고뇌 끝 연경 서가에서 눈을 뜬

칸트康德와 베이컨培根철학

빛이 되어 캄캄함이 깨어나 밝음이 스며들었을까

 

붓 벼루 꺼내어 천길만길 뜨거운 결의로

며칠 낮과 밤 지새워 묶어 영혼 담은 서책

새 시대로 가는 길라잡이 빛을 발한다

 

격동의 바람을 안고 앞서간 선비

두 눈이 시리도록 일대기를 오가며 석정石亭*에 물들어

감히 바랄 수 없는 바람의 길이지만

나와 부합되는 길을 두드린다.

 

*연경의 조선 외교사절단 숙소

*이정직李定㮨(1841-1910)

 

 


 

 

이둘임 시인 / 마디

 

 

어둠이 내리면 대숲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들의 마디로 들어간다

 

칸과 칸 사이에 자리 잡고

밤새 단절된 감정을 풀고 감던 시간의 태엽

 

사람들은 아침이면 아무 일 없다는 듯

대숲을 떠나 일터로 나갔다가

저녁이면 돌아와

다시 마디가 거친 아파트로 들어간다

 

그림자조차 곧은 대나무는 좁은 공간에 수직으로 갇혀

순식간에 마디를 만들고

새 이파리를 내는 단순한 공식을 가졌다

 

나는 몇 마디를 더 자라야

꼿꼿한 버팀대처럼 견고해질까

 

대숲은 밤마다 마디를 텅텅 비워내고 있다

 

-시집 『우리 손 흔들어 볼까요』에서

 

 


 

 

이둘임 시인 / 꽃이 된 광대

 

 

천천히 바라보려 했던 봄이 보챈다

봄맞이하는 광대나물꽃 속에

하얀 곡예사가 있다

어릴 적 봄날

시끌벅적한 음악 소리에 어깨 들썩이며

달려간 서커스 공연장

흔들리는 외줄기 바람을 넘고

엎어져도 울지 않는 광대가 신기했다

가슴 시린 날도 하얀 분칠하고

쳇바퀴 돌듯 곡예 하며 보낸 시간

모진 추위 날 선 바람에도

위태로운 표정마다 꽃이 피었다

눈물이 뼛속까지 가득 찼는지

낯익은 슬픔이 무덕무덕 피어오른다

꾹꾹 넘기는 침묵마저 붉다

 

 


 

 

이둘임 시인 / 늙은 목어

 

 

 그녀는 가만히 입 벌리고 간간이 숨 내뱉는다 물 없는 곳에서 살기 위해 안간힘 소진했을까 지느러미를 잃은 물고기처럼 휠체어 배경에 방향이 없다 자신의 살과 피 자식에게 다 내어주고 배 속을 깨끗이 비운 목어물고기는 저 놀던 물이 좋았을 텐데 요양원 가두리에 갇혀 있다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손 놓고 어미 곁에 앉았는데 남은 미련으로 죽비를 치는지 먹먹한 가슴에서 그녀가 울린다

 

 


 

 

이둘임 시인 / 창문은 소통할까요

 

 

우리 손 흔들어 볼까요

계절은 초록이고요, 아침은 블라인드예요

 

아파트 건너 빌딩

층층이 커튼이 닫힌 창문은 소통될까요

 

샤를 보들레르*가 열린 창은 닫힌 창보다

많은 것을 보지 못한다 했어요

 

마음의 창을 꼭꼭 잠그고 있던 아들

깊은 우물 속같이 팔수록 더 알 수 없었어요

 

내가 투명해지기로 했어요

벽을 허물고 싶었거든요

 

바람이 창문을 두드릴 때마다

가슴을 졸이던 직장인 엄마의 밤

늘 암실 커튼 속에 숨어 마음은 까맣게 태웠지만

커가며 서서히 소통문이 열렸어요

 

이상하게 나의 시야는 흐릿해져 갔어요

오늘도 애꿎은 안경 렌즈를 닦고 있네요

 

* 프랑스 비평가, 시인

 

 


 

 

이둘임 시인 / 風磬

 

 

 빽빽한 빌딩 위 우뚝한 대형 광고판

 간결한 문장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어떤 날은 새뜻한 문구가 따스한 바람으로 와닿고 오늘은 코가 찡해지더니 찌든 마음을 망치로 펴는 문구다 마음을 잡아주는 글귀 청아한 풍경소리로 귓전을 맴돈다 한 계절이 지나가고 새로운 글 판이 올라온다 리허설 없는 삶을 뒤돌아보라며 계절마다 나를 깨우쳐 준다 영혼을 씻어주는 문장 거리의 풍경風景이 풍경風磬이 되어 나의 일상을 인도하고 있다

 

 


 

 

이둘임 시인 / 우수雨水와 우수憂愁가 우수수

 

 

우수雨水에 비가 내려야

풍년이 든다시며

우수憂愁에 차 있던 아버지

겨울도 아닌 봄도 아닌 모호한 계절의 경계

매화 피어나는 지난밤 시름에 잠겼는지

진눈깨비 뿌리며 우왕좌왕하는 겨울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려도

봄물 든 바람이 구름을 밀어낸다

겨우내 갇혀 있던

푸석한 마음자리 우수憂愁는

우수雨水로 말끔히 씻어 내고

산뜻하게 솟아나는 봄날을 담는다

꿈이 솟아오르는 용수철은 봄

우수와 우수 사이

비는 내리고 아버지 근심은 그치지 않는다

 

 


 

 

이둘임 시인 / 호수, 데칼코마니를 그리다

 

 

한쪽으로만 볼 수 있으나

생각은 폭넓은 화가입니다

 

매일 변화무쌍한 그림에

심연을 알 수 없어 궁금한 전생

 

고흐 고갱 세잔

표현주의를 신봉하여

고흐의 별밤을 그리는 날은

내 안에서 별이 질 때까지 호수가 접힙니다

 

햇살을 촘촘하게 조이듯 그리는 날

온종일 캔버스에 갇혀 있는 나는

호수의 반대편 얼굴입니다

 

정직한 나의 캔버스

찍은 듯한 판화라고 하기도 하지만

 

내게 든 호수는

하늘을 품고 종일토록 자라납니다

 

 


 

 

이둘임 시인 / 나를 깨우는 사과

 

 

 일회성의 둥근 얼굴 빅뱅이 끝난 우주의 색 무수한 행성처럼 달려 있다 에덴동산에는 아직도 선악과가 있을까 뉴턴의 사과는 왜 그 시각 그곳에 떨어졌을까 그 먼 행성이 나무 아래 떨어지면 나의 유레카도 찾아올까 세잔이 보여준 빛과 그림자는 아직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는데 한 입 깨물면 손안에서 세계를 볼 수 있다고 스티브의 네모난 애플을 밤낮으로 음미한다 어머니는 햇볕과 비와 바람이 만든 사과가 최고라 했다 싱싱한 영혼만 둥글어질 수 있다는 속설 벌레 먹은 사과의 영혼은 누구에게 먹혔을까요 허공을 키운 사과 가상 우주에는 언젠가 떨어질 새로운 행성이 열리고 있다

 

-시집 『우리 손 흔들어 볼까요』에서

 

 


 

 

이둘임 시인 / 불새

 

 

추운 겨울밤,

 

다닥다닥 붙은 어린 발들을 따뜻한 깃틸로 덮어주던 새

 

엄마는 새들의 족적을 더듬어 불새를 살려낸다

 

된장찌개가 끓여지고

 

간고등어가 구어지는 불새의 신전

 

날아오르는 불새들로 가마솥에 밥물이 끓어오르고

 

어린 눈은 불새를 바라보며 꿈을 키웠다

 

이글거리는 불새를 보며

 

뜨겁게 날아오르고 싶었던 어린 새는

 

엄마가 앉았던 아궁이에 왔아

 

오래전에 날아간 불새를 눈물의 징표로 불러 모은다

 

아궁이에 사는 죽었다가도 살아나는 새, 고래를 타고 구들장을 달구는 새

 

어린 새의 해마를 건드리는 불새

 

죽어도 죽지 않는

 

아궁이 가슴에서 날마다 살아나는

 

뜨거운 영혼의 불사조

 

 


 

 

이둘임 시인 / 포도 그리고 우정

 

 

달콤한 기억이 다닥다닥 열려 있습니다

포도가 영글어 가던 여름

방학식 날 교복 입은 채 친구랑 달려간 포도밭

포도 잎사귀 그물 아래

싱그러운 웃음이 알알이 터지고

포도밭은 풋풋한 젊음으로 향기로웠습니다

까맣게 물든 입과 혀를 자랑하고

칼깔거리던 진한 기억은 발효되어 나를 휘감는데

당도가 높던 십 대 소녀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포도 알사탕처럼 단단했던 우리

이제 당도는 사라지고 주름은 늘어갑니다

가을을 맞이하는 포도를 바라보고

떠난 친구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탱글탱글하던 청포도 시절이 꿈틀거립니다

줄기를 타고 오르는 기억

새콤달콤한 포도 같아

한알씩 솎아내며 음미해 봅니다

 

 


 

이둘임 시인

경희사이버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22 《시사불교메너리즘》 신춘문예 우수상 당선. 시집 『광화문 아리아』 『우리 손 흔들어 볼까요』 외 동인지 다수 공저 있음. 황토현 시문학상, 신정문학상, 솜다리문학상, 석정이정직문학상 수상. 전 주한미국대사관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