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강재남 시인 / 수선화 칸타타 외 12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21. 08:00
강재남 시인 / 수선화 칸타타

강재남 시인 / 수선화 칸타타

 

 

그러니 사랑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오지 않습니다 창백한 꽃대

흐드러진 호숫가를 기억하는 건

사라진 당신의 최초입니다

 

최초는 당신의 당신이 당신과 공존하는 곳입니다

우울의 시간이 자라는 것은 최초 이전의 일입니다

신화는 일시에 사라지는 환영입니다

 

어린잎이 기지개 켤 때마다

이슬이 신발을 벗는 것도 그와 같은 이치입니다

노란 뜰이 깊은 봄으로 꿈틀거리는 배경이

아무리 간절하여도 그러니 사랑하지 마십시오

 

당신을 기억하는 건 기억을 망각한 당신의

오류입니다 광막한 물속은 즐거운 곳입니까

싱싱한 아침 해가 물음을 던집니다

당신을 들여다보는 당신은 환상입니까 실재입니까

 

신발을 벗은 이슬을 오늘 주검으로 만나고

내일은 오늘의 이슬을 만날것입니다

당신이 물속으로 얼굴을 담급니다

저에게 엎드려 새벽기도를 강요하지 마십시오

 

구름너울이 하늘을 덮습니다  

그러니 사랑하지 마십시오

애당초 물의 요정이었다는 말은 잊은지 오래입니다

날지 못하는 날개를 가졌다는 건 감당 못할 상실입니다

 

축축한 발바닥을 가진 당신은 오래 행복하십시오

당신이 당신을 기억해야 하는일은 어떤 것도

없습니다. 밤이면 잠시 그림자를 벗었다가

아침이면 꺼내어 입는, 그것조차 잊어주십시오

 

깊은 봄 호숫가를 창백하게

물들이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당신을 기다리는 당신은

언제라도 숙연합니다

 


 

강재남 시인 / 문득

 

 

 복숭아를 좋아한 아이는 복숭아 씨앗을 말려 보관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 아이가 이른 새벽 먼 나라로 떠났다. 인사할 시간도 없이 덜컥.

 씨앗 한 알 화분에 심었다. 한 계절 지나 촉을 올리더니

 온전히 키를 키우고 있다. 그리움이 자라듯 무럭무럭

 

 누가 내 이름을 부른다

 어둠이 걷히지 않은 푸른 새벽에

 이슬은 밤새 허공을 닦았을까

 빛나는 허공으로 새가 날아간다

 어리고 가여운 영혼들

 

 나무는 몸이 흠뻑 젖었다 산 이마를 가르고 곧 햇빛이 깨어나겠지 나도 기지개를 켜 볼까 새의 날개에 깃들어 가만가만 숨을 쉬어 볼까

 

 사는 게 버겁고 버티고 버리는 일 같네

 그럴 땐 잊고 잃는 것도 좋은 사는 방법이네

 

 마음이 흘러가는 곳으로 새가 날아간다 잠이 덜 깬 복사나무에 복사꽃이 핀다

 

 누가 내 이름을 부른다 시퍼렇게 살아나는 이리 푸른 새벽에

 소리는 보이지 않고 너는 밝은 쪽으로 걸어간다

 

 복사나무에 복사꽃이 핀다 새벽에 피는 꽃엔 확인되지 않은 시간이 살고 꽃은 꽃의 언어로 맺힌다 아침을 꾹꾹 찍어내면서 꽃은 그리움이 된다 하나의 자세로 여럿이

 

 깍지 끼었던 시간들이 손을 풀고 있다

 

 저쪽에서 걸어오는 너의 세계를 본다 온몸을 한쪽으로 기울여 중력을 떨쳐내면서 복사나무에 복사꽃이 피고 거기 잘 닿으라는 간곡한 당부가 꽃으로 피고

 

-계간 『동리목월』 2023년 가을호 발표

 

 


 

 

강재남 시인 / 다정한 저녁

 

 

 먼저 온 저녁이 창가에 서성인다

 그사이 뒤늦게 도착한 저녁은 검푸른 꽃을 피우고

 

 방안이 한 뼘 짙어진다

 

 창을 연다

 쏟아져 들어오는 적막

 저녁의 일이란 게 느닷없이 내몰린 마음을 다독이는 것 낮의 소리를 엎드려 받아들이는 것 어쩌면 희미해져 가는 너를 읽어내는 것

 

 세상의 창들은 더 어두워지고

 저녁을 여는 속에 아득히 스미는 너의 온기

 

 조금만 덜 환하지

 그리 영롱하게 웃어주지 말지

 

 언젠가 네가 말한 생의 무늬가 꽃다발을 들고 금빛 날개를 달고 산사나무에 매달리는 일일지 모르겠다

 

 저녁은 저녁의 대곡선으로 서사를 만들고

 더는 못 잊을 얼굴이 무해하게 접힌다

 산사나무가 알겠다는 듯 가만히 흔들린다

 

-반년간 『서정과현실』 2023년 하반기호 발표

 

 


 

 

강재남 시인 / 한낮의 소실

 

 

없는 한낮에 앉아 물달개비 꽃잎을 흘려보낸다

 

하늘에 낮게

태양이 걸리는 동안까지

 

없는 한낮은 한낮을 점령하면서

 

오래 쪼그려 앉은 탓에 나는 발끝이 저려오는데

그런 것은 아랑곳없이

 

없는 한낮은 한낮을 데리고 저만치 달아난다

 

나는 어딜 가고 있나

몇 겹의 문장을 거듭 읽고서도 내가 보이지 않는데

아직 도달하지 못한 세계와 이미 도달할 세계가 나란한 곳에서

한낮은 끊임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나는 자꾸 눈이 시려와서 눈을 깜박이다가

 

감았다 떠는 눈앞에 물달개비 꽃잎이 날개처럼 접힌다

 

날개와 날개의 접점에서

나를 꺼낸다

기억에 갇힌 내가 일시에 부서진다

아무래도 나는 너무 오래 나를 파먹고 살았나 보다

내가 쫓으려는 게 나인지 그 어떤 다른 건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없는 한낮이 나일까 그 어떤 누구일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저기가 끝인가 하고 걸어도 끝은 저기가 아니고

그러면 다시 걸어야 한다는 걸 생각하다가

 

없는 한낮에 갇힌 한낮을 나는 영영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다가 나는

없는 나를 찾느라 생을 다 허비하고 말겠다

 

그럼에도 남은 생이 있다면

오래된 무늬처럼

 

없는 한낮에 앉아

 

물달개비 꽃잎을 흘려보내는 내가 있었으면,

 

-계간 『시인들』 2024년 봄호 발표

 

 


 

 

강재남 시인 / 내내 잘 가

 

 

 당신에게 보낸 말이 되돌아오는 저녁 나는 샐비어와 분꽃 사이에서 혼잣말을 굴리다가 부풀리다가 막 피기 시작한 여름꽃 심장을 들여다보고 있었지 담장 한쪽에선 가시 세운 장미가 일가를 이루고 한때 영화로웠을 장미의 날들에 대해 그 갸륵한 운명을 짚어보면서 내내 잘 가란 말 데리고 아름다운 밤으로 가기 위해 검은 수의를 지어 입었지 깨지 않을 으스름을 툭툭 털며 아무렇지 않게 여름꽃은 환하고 맑았지 말의 안쪽엔 어떤 온기가 깃들어 사는지 오래 생각하는 저녁이었지

 

 죽음은 투명하게 손가락 펴면서

 어떻게도 만져지지 않을 통증으로

 

 그렇긴 해도 어둠의 궤적과

 비감한 마음을 나란한 곳에 둘 수 없어서

 

 과일 향 넘쳐나는 곳이 나의 후생이라면 발에 밟히는 게 하필 과일이면 좋겠다 생각했지 감정의 단면을 잘라도 기어코 생겨나는 감정들이 무구하게 흘러 다니고 나는 많은 여름을 스쳐 지날 생을 엿보면서 내내 잘 가, 애틋한 말 데리고 자꾸 당신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지 그렇게 조금씩 발자국이 되다가 완성된 말이 모두 완성된 자리에 가닿지 않는단 걸 알았지 이상한 책을 본 날 꾼 꿈처럼 뭉쳐졌다 흩어지는 물방울처럼 여름은 점점 생략되고 있었지

 

 생각하니 그날 저녁 우리 이별을 하였네

 아주 먼 먼 이별이었네

 

-계간 『시작』 2024년 봄호 발표

 

 


 

 

강재남 시인 / 싱잉볼

 

 

 슬픈 노래는 여기까지 할게요 소리의 결정들은 흩어지기 바쁘고 다음이 없는 만남처럼 우리 는 가뿐해요 작은 바람에도 소리는 파동을 만들죠 어떤 소리는 일생을 걸지 않아도 좋은 게 있어요 그 소리가 더 깊다는 걸 문득 알게 될 때

 밖은 짧게 안은 동그랗게

 스치듯 문지르기로 해요 공명은 힘이 센 모습으로 후렴구를 불러들이죠 가장자리는 지나치 기로 합니다 자라나는 마음을 그대로 두는 게 좋겠군요

 가볍게 간결하게

 숨을 모아요

 유연한 음률로 세상이 저물고 우리는 서로에게 흘러가고 있어요

 우주로 퍼지는 음색이 보이나요 천천히 일렁이는 세상은 소리가 둥글고 납작해요 그러는 동 안 어떤 꽃은 피고 또 질 거예요 희미한 음색처럼 가지를 뻗으며 점점 가지를 뻗으며

 우리는 아름답지 않아서 간곡한 노래가 될 겁니다 그러므로

 뭉클하게 아득하게

 안녕해요

 소리가 형성되는 곳에서 차원은 겹을 벗으며

 다른 차원을 만들어요 이윽고 가 닿을 아름다움이 있는 것처럼 천천히

 

계간 『미네르바』 2023년 가을호 발표

 

 


 

 

강재남 시인 / 이상한 티타임

 

 

 층층 어둠을 쌓으며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창문에 맺히는 작은 기별처럼 그렇게 아득한 질감을 가진 입술이 되고 싶었다 내가 부르는 노래로 은신처를 만들어

 달콤한 밤의 집사가 되고 싶었다

 빵과 크림과 라임 사이에서

 수수께끼 놀이를 하면서

 하지만 나는 미궁 속으로 사라질 일이었던 거다 골목에는 걸어가는 발자국이 있고 돌아보면

 수많은 약속이 있고 끝끝내 절망이 될 내일이 있는 거였는데

 이생을 방랑하는 별은 별자리에 가닿지 못하고

 빵과 크림과 라임 사이에서

 나는 달콤하지 못했지

 골목을 배회하는 걸음들

 더러는 휘어진 채 안쪽으로 몰려가고

 창문은 보이지 않은 노래로 물들고 있었다

 밤이 층층 길어진다는 걸 안심하면서

 나는 한껏 친절해졌지

 빵과 크림과 라임 사이에서 서성이는 마음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어떤 기별은 눈물 가득하게 다른 창문으로 돌아가는 중이었고

 마음이 흘러가는 쪽으로 귀를 열면

 누구에게도 닿지 못할 노래를 나는 부르게 되는 걸까

 노래 뒷면에는 부푼 입술이 옹송그리고

 어디에도 맺히지 못할 기별이 저 혼자 떠다니고 있었다

 

계간 『시산맥』 2024년 봄호 발표

 

 


 

 

강재남 시인 / She

 

 

 몽골에 가보고 싶다 했다 그곳 밤하늘이 얼마나 청록인지 깊어가는 밤의 사람이 되어 은하 건너 남두육성 젊은 별로 뜨겠다 했다 빼곡한 별의 등뼈를 그리며 눈 밝은 유목민이 되겠다 했다 양 떼를 몰고 융기된 지층으로 걸어가다가 고생대 아득함으로부터 더 아득함에 이르기까 지 바다를 걷다가 모래바람 깎이는 어디쯤 가닿을 발자국이 되겠다 했다 하얀 잠 속으로 양 떼가 뛰어들면 우는 양을 잘 달래는 목동이 되겠다 했다 초원을 내달리는 애틋한 물방울이 되어 방금 헤어진 사람처럼 울어보겠다 했다 그러다가 극단적 대륙성 기후에 휩쓸려 몸을 부풀 린 공룡이 되겠다 했다 그렇게 백악기에 살다가 프로토케라톱스 오비랍토르 사이카니아의 선 량한 이웃이 되겠다 했다 보용 소현 상희 이런 이름을 부르며 아름다웠던 기억을 모래언덕에 심겠다 했다 무럭무럭 자라는 이름이 먼 시간을 돌아 가슴에 사무치면 온 마음으로 안아주겠 다 했다 그리움이 깊어 숲을 이루어도 어떤 그리움도 요약하지 않겠다 했다 누구도 아직 죽음 에 다녀온 적 없으니 서둘러 알타이산맥을 넘어가겠다 했다 좌표가 알려주는 방향으로 부지런 히 걸음을 옮기다가 어느 날 나눠 읽었던 여름밤 문장들을 떠올리겠다 했다 고비사막이 물결 무늬로 글썽이면 상처를 어루만지는 사람이 되겠다 했다 한참 순해진 사람이 되어 끝내 쓰고 야 말 지층 속 첩첩 머문 물의 내력을 읽다가 진짜로 살아가는 걸 생각하겠다 했다

 

반년간 『서정과 현실』 2023년 하반기호 발표

 

 


 

 

강재남 시인 / 깊은 침묵

 

 

 장맛비를 털어내지 못한 새벽이 몸을 굽히고 있습니다. 어둠은 창문으로 스며들고 뒤척이는 몸의 뒷면에 안개가 퍼지는군요. 손가락을 내밀어 안개를 꺾어봅니다. 꺾이는 건 안개가 아니 라 손가락이란 걸, 어느 날 온몸으로 젖어 들던 새벽의 통증을 이제 알겠군요. 안개 속에는 전설 속 새의 그림자가 보였지요. 낯선 비명을 가만히 듣다가, 흩어졌다 모이는 안개는 물앵 두를 닮았군, 혼잣말을 했지요. 먹구름을 물앵두라 부르는 나는 먼 곳을 오래 바라본 사람. 나 도 알 수 없는 수많은 내가 창문에 매달립니다. 영원을 꿈꾸면서 기어이 오고야 마는 오늘과 깨뜨리고 싶은 내일. 떠나는 길은 아득했습니다. 불운한 연대와 공전하는 별, 모반을 노래하던 사람은 말문을 닫았고요. 버려둔 말을 창문에 걸면 잘 마른 말들이 반짝일까요. 어떤 말는 이 미 깊숙해져서 비밀이 다 누설된 상태인데요. 안개에 잠겨 안개 나라에 가는 사람이 보이는군 요. 내민 손가락을 길게 겨누며, 예민한 촉수가 침잠에 드는 것은 아직 누설할 비밀이 있다는 거겠죠. 그러면 나는 어항이 되겠어요. 물고기가 되겠어요. 투명하고 맑은 너의 사람이 되겠어 요. 사랑을 이별로 읽는 날, 물의 나라에는 물의 사람끼리 다정하고. 밝아오는 하늘빛이 눅눅 한 기분으로 뒤척입니다. 창문에 매달린 안개가 서서히 손을 풀고 있었죠.

 

계간 『시인시대』 2022년 가을호 발표

 

 


 

 

강재남 시인 / 자각몽

 

 

 찬찬히 내린 비로 세상이 그윽한 날

 나무는 빼곡하게 새롭게 싹이 돋고

 멀리서 가까이서 초록이 일렁였지

 생명을 잉태하는 고요한 걸음들이 어떨 땐 거룩하게 때때로 가혹하게 그렇게 저들끼리 측근이 되어가고 채송화꽃 벙그는 화단 쪽에 모여앉아 지나간 이야기를 우리는 또 풀어내고

 종일토록 가랑비는 가만가만 내렸는데

 젖어가는 세상을 넋 놓고 바라보다 까무룩 꺼져가는 날들을 생각했지 언젠간 사그라질 이런 일이 일상인 듯 어쩌면 꿈이다가 꿈 아닌 듯 나는 깨고 속절없는 시간에서 불가해한 몸의 영역

 이런 게 삶이 아니면 어떤 것이 삶일는지

 

-계간 『가히』 2024년 가을호 발표

 

 


 

 

강재남 시인 / 우리가 이러하여서

 

 

오늘이면 좋겠어

날개가 없는데도

빛나는 안부같이

한껏 몸이 가벼워진 사람이 되는 거야

라고 중얼거리며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먼 곳으로 불빛들이

맞물린 듯 꽁무니를 문 듯

달려가고

우리는 눈을 깜박이며

고요한 바다가 펼쳐지는 걸 생각했다

바다에는 증식하는 물이 살고

이곳을 걸어갈 우리가

한층 더 됨됨이가 명백해지겠구나

물의 일부가 된 우리가

물과 무관한 사람이 되어

알 수 없는 큰 세상을 마주할 게 꿈 같아서

그럴 때마다 유구하게 떠오른 말은

한갓지고 따뜻하고 뜬금없어서

한동안 좋을 바람으로

그저 있기로 했다

생은 허무하고 아름다웠으므로

우리는 여전히

사납지 못한 마음을 먹고

자꾸만 극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투명한 그해 여름 일처럼

좋았던 것만 같은 날들이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무크지 『열린시문학』 (부산시문학 제31호) 2024년 발표

 

 


 

 

강재남 시인 / 작약

 

 

<자기야>로 들었어요 수줍게 몸이 열렸지요

<응> 대답을 하니 초경혈 마냥 비리고 아릿한 웃음이 피더군요

그것은 내 처음과 끝의 은신처 초경혈이 지니는 무심한 비의

 

그러니까 작약, 나의 죽음을 흥미롭게 받아들여도 좋았을 일이다 의식이 몸을 빠져나가는 것은 햇볕 잘 드는 이층에서 굳게 다문 네 꽃잎을 뜯어 먹는 일처럼 서정적이었으므로 그리고 햇볕이 빠르게 지나는 창문 아래로 네 그림자가 기울어지는 광경을 목도한 것처럼 간결하였으므로 그런데도 작약, 내 몸은 여전히 차다 알타이산맥을 가로지르는 야생의 순록처럼 4천 년 전 이유 없이 멸종한 매머드의 화석처럼 웃음기 거둔 낮달은 누구의 얼굴일까 초경혈 번진 달의 표면에 표정을 그리는 건 껍데기를 걸친 나의 다른 모습 네가 필 때 너의 웃음에서 태어난 나는 나의 자기인 것 그러므로 작약, 나는 매번 나로부터 번역되고 나를 거역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졌던 거다 네가 나로 들리는 내 귀는 감각적이고 관능적이어서 반역이다 네 꽃잎을 뜯어 먹은 손가락과 입술과 도발적인 혀를 잘라줘

 

― ≪시산문≫2015년 여름호.

 

 


 

 

강재남 시인 / 아무것도 모르던 그때가 좋았지?​

상한 꽃잎을 장난감 책갈피에 누이고 한쪽으로 몰려가는 구름에게 너도 엄마한테 야단맞았구나 중얼거리고 함부로 부는 바람을 바람이 절룩이네, 말하고

거짓말하면 코가 길어진다는 동화를 진실로 알아듣고 레미안빌라를 데미안빌라로 기출문제집을 가출문제집으로

안개 많음을 안개 맑음이라 읽는다

시청 앞 미끄러운 길을 시끄러운 길이니 조용히 하란다

북적이는 대형마트 건너편, 직원만 서성이는 하이마트에서 아이스크림주세요 동전을 내밀고 이른 아침 영화 보러 가서 끝날 때 다 됐는데 왜 조조가 안나와? 귓속말하던

죽은 벌에게 꽃잎 한 장 덮어주던

볼이 발그레한 콩이라는 별명을 가진 아이가 있었다

-시집 『아무도 모르게 그늘이 자랐다』, 달쏘, 2021년

 

 


 

강재남 시인

경남 통영에서 출생. 2010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이상하고 아름다운』 『아무도 모르게 그늘이 자랐다』. 시에세이집 『당신에게 도착하지 못한 말』. 한국동서문학작품상, 동주문학상, 시산맥시문학상 수상. 한국문화예술유망작가창작지원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