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 시인 / 천사가 지나간다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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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 시인 / 천사가 지나간다
-세틴바우어 새의 정원에는 시의 행처럼 숲에서 가져온 물건들이 배열되어 있다-
그의 날개 색은 바꿀 수 없어도 구애를 위한 그 정원의 전시물은 끝없이 바뀐다
저는 블루베리 열매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표백된 조개껍질 딱정벌레의 무지개빛 날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와 결혼해주세요
구애하는 새틴바우어 새처럼 나는 낱말을 배열한다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천사의 날개에서 떨어진 눈(目) 같은 것은 제외하고.
나는 사월이 여신처럼 올라오는 언덕에 서서 지나간 사랑의 마지막 감촉 같은 것을 되새겼다 개울가 버드나무 아래에서의 한낮 입술에 닿는 따뜻한 비, 입속에서 자꾸 맴도는 금빛 단어들
오늘, 내 혀는 투명한 실로 꿰매져 있고 오늘, 내 눈물에선 짠맛이나 오늘, 내가 물푸레나무가 되어 너의 옆에 앉는다면 너는 헤엄치는 새 같아질 거야
입안에 태양을 머금고 그는 세상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끝없는 응시로부터 나오는 영감 같은 것 내가 느낌으로 충만한 하얀 종이와 마주할 때 먼 곳에서 온 낱말들이 나에게 닿을 때
난초 잎이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었을 뿐 그가 오거나 멀어져 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를 이름 없이 알아본다 그는 묵언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그 소리는 흔들리고 머뭇거리는 환영 같아 새들이 휘저어 놓은 공기 속에 빛들이 떠다니는 소리가 들려
모든 색깔의 스펙트럼을 가진 하얀 유령처럼 그는 하늘의 문체를 흉내 내어 꽃들을 만들어내고 사물들의 이름을 바꾼다 누군가 슬쩍 끼어들어 써놓은 문장 같은 것 내가 쓰고자 했으나 쓰지 못했던 문장들
유리창을 스치는 굴뚝새 그림자처럼 말과 침묵 사이, 천사가 지나가는가 내 사랑이 서 있을 법한 자리에 작은 낱말이 하나 서 있다 오랜 망설임 끝에 다시 받아들여지는 연인처럼
김연아 시인 / 몽유병자들
소녀의 머리칼에서 풀리는 리본같이 작고 부드러운 새가 밤의 안쪽으로 날아갔다
나는 하나의 스크린 그것이 어떻게 상영되는지 알지 못한다
나의 시간을 애무하며 내 꿈에서 나를 바라보는 사람 너는 태양을 만들었고 밤을 만들었고 수줍은 자들의 가면이 되었다
목소리 사이를 몸유하며 다른 생명을 갈망하는 잿가루들
온갖 것에 예민한 세포를 지니고 나는 너를 상상하고 감정이입하는 법을 배운다
열 오른 네 이마에 내 손을 얹고 너의 손가락을 이빨로 깨물어보는 것 내가 감각하는 온갖 방식으로 너에게 침투할 수 있을까
나란히 눕혀진 시체들의 맨발이 빛나듯 우리는 서로를 꿈에서만 보았다 가려진 채 빛나는 연기 차갑게 내리는 비
나의 내장을 긴장시키며 창백한 아침이 올 때 너의 텅 빈 시선에 붉은색이 저물었다
너를 말하는데 실패했다 너의 모습을 완전히 지우는 데도 실패했다 멀어지는 것은 내 안에서 먼저 멀어져간다
《모든시》 2019, 여름호
김연아 시인 / 시간의 배후
당신의 눈은 전혀 다른 섬광을 가지고 있어요 어두운 물에서 떠오르는 백련의 검은 눈 별들의 착란 속에서 흔들리는 눈
나는 당신을 나의 이름으로 삼는 자 밤이 낳은 얼룩, 밤의 그림자랍니다 잉크를 빨아들이는 압지처럼 속삭임으로 전해지는 말을 보존하고 있어요
가보지 않은 먼 곳의 소문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 미래의 시인들이 이상한 나라의 문법을 구사하는 동안 나는 '여기'의 한계에서 몽상하는 법을 배우죠
당신은 가장 충만한 말 속에 존재하는 사람 입맞춤만큼이나 가까이 있지만 벙어리가 꾸는 꿈처럼 말로 옮길 수 없습니다 당신은 모든 말의 배후에 있기 때문입니다
처녀의 젖가슴 위로 잠들러 오는 일각수처럼 당신의 아름다움은 사랑으로부터 오고 그 수줍음은 하도 깊어서 찾아내려고 하면 할수록 찾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어둠의 배후에 있는 어둠입니다
고래의 뱃속에 든 요나처럼 한 줄기의 빛도 나에게 닿지 않지만 먼 곳에서 온 말이 내 몸을 뚫고 들어옵니다
나에게 태초란 무엇일까요? 내 몸은 당신의 집, 당신이 들어온 이후로 당신 밖의 것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릅니다 나는 비틀거리는 말(言)들을 끌고 밤의 국경을 넘습니다
내 안에 사물들의 시간이 내려옵니다 사물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기 시작했어요 노래로 서로를 부르는 동물들처럼 어느 날 당신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겠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은 무명의 책 당신의 호흡을 따라 노래하는 책 바람이 범람하고, 제비꽃 눌렸던 자국이 갈피에 남아있습니다
김연아 시인 / 귀머거리의 말들을 위한 시간 2
나는 사람들이 가르쳐준 리듬에 저항하는 새 커다란 나무 이파리 속에서 시들어가기보다 노래 속에 대지를 실어 나르는 종달새이고 싶어요
세상의 노래를 들으며 캄캄한 하늘에 모습을 드러낸 첫별처럼 나는 당신에게 다가가렵니다 당신은 무한히 지속되는 하나의 기본음 사물 속 어디에서나 떨리는 빛의 현입니다
해가 무거워지는 저녁 무렵 파도 밑에 숨겨진 바다를 보았나요? 나는 당신의 수평선 위에 내리는 잠
모든 강물에 대한 바다의 환대처럼 나는 끝과 시작을 동시에 사랑하고 나는 내가 되는 일에 몰두합니다
금의 목소리로 밤을 낮으로 만드는 사람. 당신은 나를 부추겨 세상을 창조하게 하고 지금 여기서 새로운 시간을 시작하게 합니다
그러나, 나는 단번에 말하는 법을 배울 수 없습니다 시간을 가두는 명사는 제 독백만을 계속할 뿐 당신을 배열하기에는 동사가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말을 가지고 당신 너머에 이르는 일을 가능한 것일까요? 나는 말을 열고 닫으며 당신에게 다가갑니다 어떤 닿을 수 없는 신비처럼 끌림을 간격으로 바꾸며 물러서면서 나아가는 길
말의 길 위에서 당신과 나의 만남이 새로운 말을 드러내게 합니다. 둘 사이에 의미가 진동하면서 움직이는 말을
사물들이 말하는 사내는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요?
-월간 『현대시학』 2009년 7월호 발표
김연아 시인 / 텔레, 비전
너는 네모난 거울의 눈을 가졌다 나를 담고 먼 데를 바라보는 고양이 눈처럼 너는 밤이자 그 밤을 낳는 빛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자, 그 시선을 깊숙이 조율한 가면이다
네 얼굴은 찡그릴 줄 모른다 이 얼굴에서 저 얼굴로 오가며 그림자를 불러올 뿐 너는 신의 얼굴을 가리는 식蝕이 아니다
반투명 습자지 아래 미끄러지는 그림처럼 나는 이제 막 거울의 미궁에서 빠져나온 사람
이곳은 날개를 접은 검은 천사의 거실 눈과 귀를 주지만 입맞춤은 주지 못하는 파리텍사스의 핍쇼처럼 네 어둠 속에 내 얼굴이 담겨 있다
설풋 잠든 귀에 대고 밤이 뭐라고 하는가? 네가 감추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이 거실을 다 빨아들이고도 비어있는 눈동자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한 눈동자
거울의 속도로 흘러나오는 이 빛은 무엇인가? 취기어린 태양을 매달고 어느 키 큰 바람이 방황하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시간의 방문을 받는 너의 영혼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면 천지는 이름이 없고 그림자가 네 얼굴에 떨어지는 방식을 바라보며 시간은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비를 뿌리며 분홍잿빛으로 물들어 가는 이 저녁 한 때의 꿈같은 세상 내 안에 비밀이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나의 생은 아직도 깊은 잠 속에 있다
넓고 긴 혀를 구름 위에 걸쳐 놓고 나의 무력한 손으로 쓴 문장 속에서 한 마리 박새가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쓴다
눈을 뜨고 자는 어린아이처럼 너는 수수께끼 그림자를 지니고 산다 가끔 거울 대신 눈이라는 말을 지니면서 그렇게
거울의 내부,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계간 『시산맥』 2012년 봄호 발표
김연아 시인 / 땅거미를 끌고 가는 남자
그의 몸에선 야생살구 냄새가 났다 녹색이 번지는 팔월의 해질녘, 모슬린 붕대처럼 풀어진 신작로를 따라 사내가 달린다, 물에서 나온 알몸으로
골짜기를 덮기 시작한 땅거미를 끌고 벌거벗은 사내가 동네 어귀에 나타나면 사람들은 아이들을 숨겼다 아이들이 물장구치던 내린천의 상류에는
물귀신이 나온다는 용소가 있었지 별에서 별로 건너뛰는 거인처럼 사내는 달렸다,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을 가로질러.별은 그의 발꿈치에서 부서졌다, 사내의 심장은 어스름이 스민 강물 같았다, 그가뜨거운 몸으로 저녁 빛을 감아들일 때, 저녁은 처녀의 검은 눈동자처럼 사내를 감아들였다, 하늘은 비릿한 바람을 풀어놓았다,
그는 지금 석양과 갈까마귀의 시간을 지나간다 한 줄기 환희를 뽑아내기 위해 시간 속에 제 그림자를 밀어 넣는 사내 사지를 뻗으며 미끄러지듯 소리를 지른다
무, 무, 무!
달을 따라 가는 몽유병자처럼 그가 떠도는 곳은 어디인가? 우리는 알지 못했다 사내를 삼킨 것이 밤이었는지, 교교한 달이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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