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자 시인 / 어리연꽃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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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자 시인 / 어리연꽃
빗방울들 들이친다 무성한 잎사귀들 사이로 여린 꽃송이 내밀었다 진흙탕 딛고 올라선 저 내밀한 힘이 화관을 밀어올린 것이다
자그마한 할머니 화관 바구니 들고서 전철 안에 피었다 한 푼 두 푼 빗방울들 떨어지듯 순간순간 찰랑대는 소리 잠시 잠시 환해지는 물결들 잔잔히 조금씩 퍼져나가면서 승객들, 선선한 얼굴들 모두가 다 잎사귀로 떠 흔들린다 물 위에 서로 내놓은 얼굴들, 서로 다른, 연의 잎사귀들 하지만 물 아래서는 서로 엉기듯이 의지하여 살아가니까 여리디여린 꽃잎 내민 작은 할머니의 화관 바구니는 결코 외롭지도 않아, 어두운 물밑을 지팡이 한 자루로 더듬어가며 지탱하는 힘, 질퍽한 이 세상에 여름 비 시원하게 맞으면서 고운 꽃부리 한 다발을 활짝 피워 올려놓으신 것이다
도드라진 힘줄 선 팔, 가녀린 목 꼿꼿이 세우시고서 긴 우기를 고집스러이 견뎌나가시는, 연약하게도 단단한 저 어리연꽃 한 송이,
천천히 천천히 물길을 헤쳐 나가고 계신 것이다
권순자 시인 / 겹벚꽃 시절
한 시절 보려고 갔더니 언덕에는 흰 벚꽃 간데없고 뜰에는 가지마다 겹벚꽃 총총했네
네 환한 시절이 봄꽃보다 밝아져서 꽃 아래 분홍빛 볼우물 웃음 피고 있었네
때를 못 맞추는 건 꽃만은 아니라네
너무 이른 따뜻한 날씨 너무 이른 꽃들의 도착
너무 빨리 와버린 시간 나는 여전히 봄으로 달려가고 있는데 아직도 추운 기억이 피부를 더듬고.
계간 『시인정신』 2023 여름호 발표
권순자 시인 / 검은 고양이와 달
검은 고양이 검은 얼룩처럼 골목을 빠져나가는 저녁 바다는 더 검은 물결을 출렁거린다
어둠이 성장하여 사방을 가릴 때 물을 가르며 천천히 영일만 물결 위로 보름달이 빠져나와
우뢰 같은 빛을 서러운 빛을 토하기 시작한다
무수한 슬픔의 알갱이들 절망의 심장을 헤치고 부드럽고도 조용한 눈 어둠의 침묵을 깨치며 노란 긴장과 파문이 허공을 번져 구름이 모여든다
구름과 달의 숨막히는 숨바꼭질 달빛과 달 그림자의 흔들림
보름달 아래 검은 고양이보다 빠른 검은 바람이 골목을 흐르는 동안 타오르는 고통이 타오르는 검은 밤하늘의 달처럼 달아오를 때
층층이 구름을 하나씩 벗기고 불안 같은 어둠이 고양이 울음을 싣고 멀어져간다
더욱 더 밝아져 사무치는 보름밤 사랑을 지키는 목동처럼 혼탁한 시절을 헤쳐가는 거대한 꿈
어두울수록 빛나는 암흑을 분별하는 바다의 달
계간 『시선 2022년 겨울호 발표
권순자 시인 / 돌
태풍에 건물 기둥이 쓰러지고 바닥이 뒤집어졌다, 기둥뿌리와 함께 밖으로 튀어나온 돌덩어리, 이젠 빛이 보고 싶어, 큰바람을 불러 솟구쳐 바깥으로 터져 나와버린 것이다
늘 흙 속에 갇혀 꿈꾸었던, 밤마다 어둠 속에서 이슬에 젖기도 했었던 돌
한땐 강바닥을 견디며 물의 주름을 접기도 하고, 물의 문신을 새겨보기도 했었던, 물살에 긁힌 자국마다 이끼들이 상처를 보듬어주기도 했었던, 열정에 들뜨기도 했었던 젊은 날들이 어느 날 문득 단단하게도 지하에 박혀
지하에 박혀, 함묵으로 지나간 역사의 주춧돌이 되어주었던 돌
모두가 겉으로 드러나고만 싶어하는, 세상世上에서 역사의 집을 든든히 견디게 한 것은, 잘 안 보이는 곳들만을 파묻히듯 지키고 앉아서 천 년을 묵상해준 저 돌과, 분신들이었다. 이제는 지나간 역사 속에 묻혀 있었던 것들이 세월 속에 제 몫을 다 해내었다는 듯, 안 보이는 역사 속에서도 주춧돌로써 살아온, 무덤처럼 말이 없었던 그의 일생이 큰바람을 불러 마침내 자신을 완전하게 드러내버린, 이 캄캄하고도 캄캄한, 환한 반란이!
권순자 시인 / 은빛 햇살 쏟아지다
시장 어귀,환하다 과일에서 햇살이 삐져나와 모퉁이 검정고무 무릎에 둘러댄 사내 어깨 위에 머문다 솔바람처럼 흘러내리는 노래 가슴을 굽이 돌아 저 혼자 골목을 떠돈다 바구니에 쏟아지는 은빛 햇살들, 부산한 발자국이 모였다 흩어지던 장사꾼들의 목소리 드높아졌다 사그라지던 골목이 환해진다
우주 어디선가 낯선 곳에서 날아든 햇살 동전 햇살이 부시게 내리쬐는 오후 시장을 사내는 천천히 몸 움직여 걷어간다 더 깊은 어둠속을 비추러 주리고 차가운 혹성의 한 귀퉁이 데우러
햇살품은 사내 저 홀로 햇덩이 되어 어기적 간다
-시집 『우목횟집』에서
권순자 시인 / 열여덟의 웃음
낮이 가방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바다는 네 방에 가득 몰려와 밤마다 파도친다 바다의 목소리들
내일을 미리 열고 들어간 너의 밤이 물결에 철썩인다 네 부푼 꿈이 오므라지고 늘어놓은 책들이 스르르 일어서서 네 방문을 연다 비상구가 떠올라 허공으로 올라간다
기웃거리는 밤, 깜박이며 바다를 뒤척이는 밤
어제의 노을이 돌돌 말려서 가슴속으로 밀려온다 파도처럼 모래는 바람에 실려 창자속으로 뒤틀리며 몰려온다 길 잃어버린 바람이 문 앞에서 울음처럼 펄럭거린다
분해된 꿈들이 조개들 따라 입을 다물었다 물살을 헤치고 이름들이 솟구친다 슬픔이 너무 오래 말라갔어 몸을 짜내는 기다림이 너무 길어졌어 널뛰는 그리움이 해일처럼 밀려왔어
아름다운 목덜미에 열여덟의 시간이 새겨지고 얼음처럼 차가운 실망 끙끙 앓는 혀
어미의 수심은 빈방에서 철썩거렸다 비가 오면 귀가 열린다 너를 듣는 밤이 길다 밤이 젖어 뱀처럼 느리게 기어간다 너는 움켜진 소리로 소리를 들으며 고동으로 나팔을 불고 영월을 호출하며 세상 밖으로 가는 길로 헤엄을 치고 갔다
달이 뜨고 삶을 습격한 폭력과 혼돈의 문턱을 넘어 갔다 벚꽃망울 터뜨리던 열여덟의 웃음이 그립다
권순자 시인 / 모란시장 칼국숫집에서
칼국수 냄새가 진동하는 시장 어귀 어머니가 걸어 나와 칼국수를 내민다 하도 투명하고 맑아서 어머니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꿈속에서 머물던 어머니 너그럽고 상냥한 어머니의 목소리
국물 한 숟갈 뜨는 순간 어머니의 멸치 우린 맛이 혀끝에 감돈다 완벽한 맛이 떨린다
칼칼하게 목을 훑고 넘어가는 국수 가락에 목이 메다가 칼처럼 어머니의 시간을 베어가던 가난을 추억하다가
가슴을 출렁거리게 하는 국물에 매워서인지 뜨거워서인지 그리워서인지 눈물이 조금 났다
어머니의 목소리인지 내 목소리인지 모를 소리가 나를 물고 사락사락 끌고 간다 모락모락 칼국숫집 뜨거운 열기에 풀리는 살갗이 붉게 번진다
-시집 『소년과 뱀과 소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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