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명 시인 / 맹목적 열두 살 외 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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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명 시인 / 맹목적 열두 살
밤이 나비주름 커튼을 들어 외면한 감정을 하나씩 펼친다
말하지 않는 여행자 같은 말하며 흥분하는 제작자 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붉나무 한 그루 자라겠지
처음 내가 아는 공기는 푸른 단어 몇 개와 분홍 심장이 집 안을 장악했지 가끔 소나기용 말이 쏟아졌지만 흐르는 사랑으로 나무는 높이를 자랑했지
함께 걷다가 나의 왼쪽과 오른쪽을 바꾸어 걷다가 나와 동떨어져 오른쪽과 왼쪽을 걷고 있는 엄마 아빠 그런 날은 마른 폭우를 맞는 기분이었지 나는 자줏빛 입술로 거실을 떠다니는 말을 주웠지 내 자양분이 되는 시고 짠맛의 그 말들을
도시 별밭을 지나고 나면 도시 사막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알아듣기 어려운
마음의 등고선에 이상 기온이 뿌리를 내렸다 나쁜 말을 내뱉는 엄마와 나쁜 말을 받아먹는 아빠는 서로 다른 종족의 말 같았다 한파와 열파의 층위가 다른 예측 불허의 기압골 때문 우리는 식탁 위 습 먹은 김처럼 쭈글쭈글 고요했다
불을 품은 얼음이 되길 얼음을 녹이는 불이 되길
나는 어린 신의 역할을 자처했다 시키지 않는 청소를 하고 시키지 않는 동생을 잘 보살피며 시키지 않는 성적을 잘 받아오고
싫지만 내 감정의 솜털들만 만지작대던 그날들, 가을 타는 붉나무 아래 묵고 있었다
김지명 시인 / 모과 생각
힘들어 말을 들으면 멍하니 앉아 뭔가 뒤적거리다 사라지는 네가 보인다 폐를 채운 연기로 행색을 가리려 했을지 모른다 너는 뜬금없이 찾아와 초인종을 누른다 빼앗긴 이름과 놓쳐 버린 이름을 외우며 나쁘지 않아 체념이 두엄에 앉으면 고백이 시작될 거야 상한 기억을 흔들어 관능에 녹이면 봄이 온다는 생각 강에서 고래를 만나는 방식이지 호기심은 분기공 같아 빨리 웃고 빨리 울다 노래진 얼굴 파란 만남과 퍼런 만남이 익어 만들어지는 맛은 어떨까 미는 힘과 밀리는 힘의 내부에서 얼마나 암투가 쟁쟁할까 익은 과일을 보며 첫 키스가 숨어 있는 사람을 상상한다 뜨거운 한마디를 번역하면 싫은 색이 없고 부족할 향기가 없어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범람원 더 많이 모호하지 않을 때까지 더 많이 평평하지 않을 때까지 움직이는 믿음이 달처럼 떠오른다 수천 번의 변명처럼 자꾸 태어나는 모난 표정들 세상 깊숙한 쪽을 노랗게 구멍 내는 밤이 위탁한 집사
-시집 <다들 컹컹 웃음을 짖었다> 파란, 2021.
김지명 시인 / 천사를 위한 위스키
할머니의 전 재산이 사라졌다 제단에 바치듯 장롱 위에 놓은 뭉치가 사라졌다 형제 몇은 장롱 위 뭉치를 알았고 몇은 몰랐다
포태한 의심이 아침 달을 밀고 들어와 체면을 내치고 바닥의 말을 길어 올렸다
술도가의 술통에서 한 주전자씩 중발해도 되듯이 오크 통의 술이 숙성으로 2%씩 중발해도 되듯이
술도가 할머니는 가만한 표정으로 천사가 가져갔구나 하늘에 쓰일 몫이구나
당혹한 형제들의 시선에는 누군가를 지목했다
너희들 이름을 천상에 올렸으니 지불해야지
머리로 인정하고 마음으로 부정하는
분에하는 얼굴들은 천사를 찾아 나설 태세였다
그 많은 포도밭은 오크 통에 있는데 그 많은 논밭은 술통에 있는데
보이지도 있지도 않은 천사는 찾지 말자
천사는 주머니가 없단다
말을 입에 물고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고 악마의 기도서를 뒤적거릴 형제들
*영화 제목.
-시집 『다들 컹컹 웃음을 짖었다』에서
김지명 시인 / 소나무
천년의 청송(淸松) 황금빛 송화가루 삶의 여유 자랑하고
태고의 세월에도 언제나 변함없는 자태를 자아내고
마디마다 고통의 세월 청록 잎의 솔향기 바람 따라 흩어지네
나이테 늘려갈 때 마른하늘에 이슬 먹고 불사조같이 살아가는 소나무
김지명 시인 / 웃음 받아쓰기
계속 받아쓰고 있었다 밤손님으로 손에 손잡고 뛰어내린 도둑눈처럼 생각이 많은 몸을
덩치 큰 이름을 덩치 큰 이름을 꾹꾹 눌렀다 온 세계가 쪼그라들 것을 강요해 소년는 어디서나 어깨는 안쪽으로 굽고 자라목이며 고개는 대역죄인이었다
좋은 냄새 나네? 훅 찌르고 버린 말 속에서 웃는다 비만을 연기하는 비만인으로 구름사이로 내건 햇빛 창살로 웃는다
선입견은 아무도 소년을 구하지 않아 구원없는 숫눈길을 소년은 걸었다
어떻하지? 남아도는 나이를 불안이 매번 나를 선택해 베개로 삼지만 내 배꼽에 웃음이 살아
애들보다 더 크게 소년은 소년을 비웃었다 다들 좋아라 컹컹 웃음을 짖었다 비웃음 소리로 유지되는 연대감
처음에는 지나가는 소낙눈 웃음이라 여겼다 그런데 애들을 전천후 360도의 함박눈 웃음으로 소년을 에웠다
눈이 그쳐 부서져오는 햇빛 권속을 보건실도 따라와 같이 가? 실실거리던 위선을 원고지는 계속 쓰고 있었다
소년을 산책하는 많은 악령들이 칸칸이 하얘질 때까지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0년. 2월호
김지명 시인 / 천사는 후회를 모른다 -간벌
나무가 나무 밖으로 몰두한다 아이가 아이 밖으로 몰두한다
나무가 아이를 넘보다 나무를 놓치고 만다 아이가 나무를 만지작거리다 얼굴을 놓치고 만다
너무 종알대는 아이와는 반대편이라 좋은 나무 활개 치는 큰 나무와는 반대편이라 좋은 아이
서로 호의는 눈을 짚어 맴도는데 말도하기도 전에 두 손이 먼저 착해지는데
남의 생각을 내 생각처럼 지우고 마는 기울어진 지구에서는
쉽게 세상에 편입되지 못해 맑은 날에도 흐린 날에도 못 자라 해를 놓치고 달을 놓치고 풀꽃과 가시덩굴과 친해 못 자란 나무, 아이
초록을 먹어치운 그늘이 엄마를 먹어치운 그늘이 악의 없이도 덜 자란 사연을 골라내고 있다
외로움을 돌보지 못한 반대편에서 눈을 반짝이는 어린것들을 보세요 천진하다는 것은 저리 쉬운 일
바람에 걸어두어야 할 약속도 모르는 켜켜 쌓아두어야 할 후회도 모르는 잘 개어진 오후 2시 속으로
벌채 차량이 겨울을 퍼놓고 지나간다 엄마를 솎아낸 겨울이 천진불을 끌고 앞서 간다
김지명 시인 / 천사의 몫
목련이 신부를 입고 입장하면 나무가 주춤거리는 장기들을 밖으로 꺼냈다 두 손 모아 당신의 밀도에 응답하는 촛불은 나란히 하루를 데치고 볶고 끓였던 하얀 포스트잇 인연들이 언제나 아이처럼 웃어라, 울어라 이파리 하나 없는 무대에 이파리들이 팔랑거리고 먼 데 있는 추운 생각들이 달려와 조용조용 입장을 세웠다 순간이 탕진에 가까울까 봐 눈이 내린다 손님처럼 입장해 예장을 갖춘 촛불 켠 신부에게 촛농처럼 떨어진다 신부의 순수한 눈빛이 과오가 된 듯이 눈이 내린다 멈추지 않을 것 같은 산책을 외면하는 기상쯤으로 읽을까 천사에게 선악의 분별 보다 귀한 게 겨드랑이에 쓰인 흰 글씨 사랑노동자로 살래요 환호와 뒷짐 속으로 퇴장하는 천사의 흥얼흥얼 엔딩크레딧
김지명 시인 / 얼어 있는 말들을 위한 시간
모자랄 게 없어 눈 밖을 몰랐다
초원은 어디든 빈집이었지만 눈에 불을 켰다 끄고 마는 풋풋한 마을이었다
푸르름으로 인심을 얻고 잃었지만 서두르지 않는 보행법은 쓸쓸함이 놀다 갈 등걸을 마련하는 것 빈 옆구리로 쏟아져 내릴 추억을 앓고 있는 것
익숙한 밤낮이 잘 숙성되었지만 먹지 않을 풀은 건드리지 않는 약시의 코뿔소
아무도 이상 기온을 말해 주지 않았지만 초원에 이만 년 만에 폭설이 내렸다 한다
폭설은 처음 보는 먼지라서 괘념치 않았지만 차가움의 촉감이 풀 가시처럼 박혔다 한다
몸에 살지 않는 차가움으로 미쳐 날뛰었지만 이웃들 점호하듯 폭설이 짓밟고 갔다 한다
웅크린 이웃이 짧은 다리로 헤쳐 나가려 했지만 야크처럼 털이 없어 추위를 내치지 못했다 한다
추위는 정지된 세상으로 초원을 정복하려 했지만 사방 비명의 나팔 소리로 눈발은 머뭇거렸다 한다
비명은 몸에서 분리된 뿔로 천명을 다하려 했지만 진군하는 폭설에 백기를 들었다 한다
백기 든 태양도 초원도 지평선도 얼음이 되어 코뿔소는 미라가 되었다 한다
도망자로 살아 봤다면 먼 근친들이 훗날을 걷고 있음을 알았다면 경계에 사는 자만이 새로운 땅을 갖는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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