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박분필 시인 / 오체투지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24. 08:00
박분필 시인 / 오체투지

박분필 시인 / 오체투지

 

 

비온 뒤의 보도블럭

지렁이들이 온 몸을 붓 삼아 수상한 상형문자를 기록한다

쓰다가 발에 깔려 문질러진 놈, 토막토막 여며진 채 기는 놈

흙속을 벗어나면 순식간에 미라가 되고 말 걸

알까 모를까

오로지 죽음을 향해 오체투지하는

저 봄날의 장렬한 육박전 같은 몸부림은

저 봄날의 화려한 사육제 같은 몸부림은

누구더러

누구더러 읽으라는

아득한 메시지일까

 

 


 

 

박분필 시인 / 바람

 

 

당나귀처럼 귀를 세웠습니다

 

섣달그믐 밤늦은 마당이 귀를 기울이고

발자국을 기다렸습니다

저벅저벅

각설이바람이 나뒹구는 마른댓잎으로

마당가득 낙서 휘갈기는 소리가 났습니다

사그락 사그락

스치는 소리 벌떡 방문을 열었습니다

은박지처럼 눈이 마당귀를 덮고 있었습니다

싸리비로 마당을 쓸어 막힌 귀를 뚫었습니다

 

처마에 걸린 등불이

애비 없는 신짝들을 지켜주었습니다

 

터벅터벅

발자국소리가 났습니다

매우 큰 반발작용에 방문을 벌컥 열고

아버지! 라고 불렀습니다

눈 덮인 늙은 감나무 가지에 등불이 스며들어

주홍빛 생기가 집안을 돌기 시작했습니다

 

점괘마다 이승에는 없다고 했던

허제비바람이 삽짝을 밀고 들어왔습니다

무전으로 세상을 떠돌다 온 꺼칠한 바람

 

 


 

 

박분필 시인 / 나의 고도를 찾아서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르고 다시 달이 지고 해가 떠올랐다

 

낭떠러지에 걸린 철길 위로 벽도 창문도 없는 열차를

타고 철컥철컥 협곡을 지나 협곡으로 접어드는 길

접어들수록 세상이 아득하다

 

나의 고도를 찾아서

 

하늘 끝에 닿아있는 아슬아슬한 시월의 산

 

너무 높아서, 번개가 내리칠 때는 머리보다

배꼽을 조심해야 한다는 산이 배꼽을

감았던 구름을 한 겹 한 겹 풀어낸다

 

산꼭대기에 태양이 걸린다, 어제 쏟아진 함박눈이

하얀 외뿔고래처럼 헤엄치고 파랗게 담긴 시간이

넘실대고 단풍은 완벽한 색채의 춤사위다

 

산이 대뜸, 위풍당당한 그림자를 길게 끌며

협곡바닥 푸른 물속에 발을 담근다

 

물에 비친 마음을 들여다본다

 

맑은 물에 마음을 닦는 일과

순수한 저 여유로움이 나의 고도였을까

 

사람이 늙는 일과 단풍으로 물드는 일은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길, 모두 물이었으니까

한 방울의 물로부터 시작되었으니까

 

 


 

 

박분필 시인 / 에덴의 후예들

 

 

가본적은 없지만

에덴동산은 거기 있었다

뱀은 삼삼해서 여자를 속였고

여자는 뱀의 입술에 닿았던 사과를 남자에게 먹였다

 

그래서...

사과는 여자와, 남자와, 뱀을 한꺼번에 먹어버렸다

별빛 찬란하고 연초록 잎사귀 싱그럽고 꽃은 너무 아름답고 먹을 건 넘쳐나서 밤마다 별미로 여자는 사과가 된 남자를 먹었고 남자는 뱀이 된 여자를 먹었다

 

그리고...

여자와 남자는 서로에게 서서히 먹혔고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서서히 소화했다

 

초록빛깔 단감이 붉은 태양을 먹고 붉게 물들어가듯

당신은 나의 색깔로 물들어가고 나는 당신의 색깔로 물들어가고 나에게서 당신이 걸어 나오고 당신에게서 내가 걸어 나오고

 

그리하여...

나는 차츰 남자로 변해버렸고 당신은 차츰 여자로 변해버렸지

그 영원할 것 같았던 푸르른 숲에

난분분 백설이 내려 하얗게 덮어가는 계절

 

남자의 기관에는 퇴화한 여자의 흔적이, 여자의 기관에는 퇴화한 남자의 흔적이 조금씩 남아있다는, 우리는 세상이라는 벽에 그려진 얼룩이다

 

어떤 얼룩은 쉽게 지워지고

어떤 얼룩은 새롭게 그려지기도 하는

 

우리는 에덴동산의 후예

에덴의 후예들

 

 


 

 

박분필 시인 / 술래는 더 이상 찾지 않는다

 

 

뒤란간 굴뚝 곁에 세워진

청솔갑 나뭇단 속에 꼭꼭 숨었지

 

별이 내려와 눈썹 끝에 애기 솔방울처럼

매달리고 암탉이 계란을 품고

내 귓볼 주근깨를 톡톡 쪼을 때까지

 

몰랐어, 꿈의 새장 막 벗어났나 했을 때

더 큰 닭장 속에 갇혀버린, 꼭 한 마리로 남은

작은 새의 마음, "오니오니! 용용 날 찾아라! 용용"

술래를 불렀다 소리는 입속으로 깊이 가라앉았다

 

아무도 없다 다 집으로 돌아가고

청대숲에서 잠이 든 굴뚝새들이 날개를

다시 여미는 소리 그 흰 소리들뿐

 

오늘도 또 난, 닭장 속에 꼭꼭 숨었어

하루의 끝에서 시계의 긴 바늘과 짧은 바늘이

하나 되어깊은 포옹을 할 때까지

술래들은 다, 다 꿈 밖으로 외출중

 

 


 

 

박분필 시인 / 오체투지

 

 

비온 뒤의 보도블럭

지렁이들이 온 몸을 붓 삼아 수상한 상형문자를 기록한다

쓰다가 발에 깔려 문질러진 놈, 토막토막 여며진 채 기는 놈

흙속을 벗어나면 순식간에 미라가 되고 말 걸

알까 모를까

오로지 죽음을 향해 오체투지하는

저 봄날의 장렬한 육박전 같은 몸부림은

저 봄날의 화려한 사육제 같은 몸부림은

누구더러

누구더러 읽으라는

아득한 메시지일까

 

 


 

 

박분필 시인 / 술래는 더 이상 찾지 않는다

 

 

뒤란간 굴뚝 곁에 세워진

청솔갑 나뭇단 속에 꼭꼭 숨었지

 

별이 내려와 눈썹 끝에 애기 솔방울처럼

매달리고 암탉이 계란을 품고

내 귓볼 주근깨를 톡톡 쪼을 때까지

 

몰랐어, 꿈의 새장 막 벗어났나 했을 때

더 큰 닭장 속에 갇혀버린, 꼭 한 마리로 남은

작은 새의 마음, "오니오니! 용용 날 찾아라! 용용"

술래를 불렀다 소리는 입속으로 깊이 가라앉았다

 

아무도 없다 다 집으로 돌아가고

청대숲에서 잠이 든 굴뚝새들이 날개를

다시 여미는 소리 그 흰 소리들뿐

 

오늘도 또 난, 닭장 속에 꼭꼭 숨었어

하루의 끝에서 시계의 긴 바늘과 짧은 바늘이

하나 되어깊은 포옹을 할 때까지

술래들은 다, 다 꿈 밖으로 외출중

 

 


 

박분필 시인

경북 울산 울주군 출생. 성균관 대학교 대학원 유교경전학과 석사과정 수료. 1996년 『시와시학』으로 문단활동을 시작. 시집 『창포잎에 바람이 흔들릴 때』 『산고양이를 보다』 『물수제비』 『바다의 골목』 등. 동화집 『하얀 전설의 날개』 『홍수와 땟쥐』. 제4회 문학청춘작품상 수상. KB창작동화 공모전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