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경 시인 / 회색동화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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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경 시인 / 회색동화
파장의 우시장으로 모여드는 아이들 흘린 동전을 찾으려고 소눈깔을 굴린다 진종일 노름판에서 광땡을 잡느라 눈이 더 뻘건 아비 푸른 멍자국 어미가 쇠똥으로 여기저기 널려있는 시장바닥 짤랑짤랑 소리나는 희망 몇 닢을 줍고 땟국 전 땅거미가 내려앉으면 쇠똥냄새가 아이들과 숨바꼭질한다 어제는 찌그러진 양은 밥상머리에 코를 박고 한 그릇의 가난을 우적우적 씹고 오늘은 박살난 세간들이 널부러진 대문 앞에서 시커먼 손등으로 눈물 훔치며 소눈깔을 꿈벅거린다 저 놈의 웬수는 귀신도 안 물어가냐는 어미의 시퍼런 악다구니로 가슴 속에서 칼을 키우다가 초등학교 졸업장 받기 무섭게 객지의 공장으로 식당으로 미장원으로 흩어져 누더기진 생을 밤새워 꿰매며 소처럼 울었던 아이들 온양 실옥동 옛거리 시멘트 담벽 곳곳에는 아직도 소울음 메아리진 저녁답이 묻어 있다
고미경 시인 / 꽃
입술을 열어 저렇듯 간절한 농아의 한 마디
비밀을 머금은 돌의 고요
심장의 웅얼거림 어렴풋이 두 손으로 받을 수만 있다면
이번생은 무릎 끊겠습니다
고미경 시인 / 밥 먹는 일이 슬픔이 되지 않으려고 흥얼흥얼
괜찮아, 오늘은 괜찮아. 함께 걸어보자. 응달 골목은 아직 추워도 산수유는 몽올몽올 올라오고 사알짝 실눈 뜬 봄까치꽃이 까꿍 얼굴을 내밀잖아. 괜찮아, 오늘은 괜찮아. 따끈한 국물이 좋은 잔치국수 같은 수다를 떨어보자. 빌어먹을은 접어두고 신바람 나는 일이 있는 것처럼 사뿐사뿐 걸어보자. 오늘은 괜찮아. 곰돌이 푸가 곁에 있잖아. 바지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고 시시껄렁 삐딱하게 종일토록 걸어보자. 목로주점을 만나면 마냥 낮술에 달떠서 읏샤읏샤 매머드를 사냥해 보자. 괜찮아, 모든 게 괜찮아. 하루하루 끼니를 찾아 헤매지만 오늘은 괜찮아, 괜찮아, 나의 주먹도끼야!
고미경 시인 / 벌레
나는 뼈가 없는 동물입니다 먼 조상이 뼈와 엿을 바꿔먹었다고도 하고 잘못된 사랑으로 벌을 받아 유전된 것이라고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뼈대 없는 가문에다 역사도 없고 사상도 없다며 나를 천하다고 말합니다 손가락질까지 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뼈가 없으니 생각이 없어 좋을 때도 있습니다 생각이 없으니 번뇌도 없습니다 번뇌가 없으니 싸울 일도 없습니다
뼈는 무기입니다 뼈는 칼날입니다 뼈는 주먹입니다 뼈는 증오입니다 나는 뼈가 없어 비무장지대입니다 아니 꽃잎입니다 입술입니다 젖무덤입니다
온몸으로 기어가는 바닥이 나의 하늘입니다 함부로 침 뱉지 마십시오
-시집 <인질>(문학의 전당)에서
고미경 시인 / 혼자서 허니브레드를 먹고 있을 때
눈발이 시작되었으니 자, 이젠 우리의 이야기를 해 볼까
당신은 표정들이 복잡한 거리에서 되똑하니 서 있고 나는2층 카페에 앉아서 당신을 바라보네 길을 건너려는 것인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인지
어쩌면 당신은 버려진 마네킹인지도, 떠돌이 개인지도 모르네 워리, 워어리, 워~~어리, 나는 입술을 오므리고 아득한 당신을 구음으로 불러보지만
당신은 길의 표정만 가늠하고 있네 아니 허공으로 멀거니 우묵한 눈빛을 던지고 있네
히말라야의 라다크 어느 마을, 우리가 옛적에 떠나온 그 집 벽엔 수호신처럼 푸른양의 머리가 걸려 있었지 지금쯤 고산의 겨울엔 푸른양들이 짝짓기를 하겠지만
우리는 사랑을 잃어버리고 펄럭이는 오방색 타르초에게 속삭였던 밀어들은 눈발이 되어 이 도시까지 찾아왔지만
나는 2층 창가에서 당신은 갈 곳을 잃어버린 거리에서 영혼의 떠돌이가 되었네
눈발이 더 붐비니 자, 이젠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서 잠시 멈추기로 하고
고미경 시인 / 연(戀)
타오르는 마음 뒤편에서
그늘을 짜 왔어요
당신도 다 들여다볼 수 없는
우물 같은 그늘을
오늘, 목백일홍 나무 곁에서 열꽃인 양 피어난
꽃들 바라보다가 눈치채고 말았어요
뒤편에 꼭꼭 숨겨놓은 그늘을
울컥 젖어서 들여다보았어요
제 안이 얼마나 뜨거웠으면
꽃들은 저렇게 온몸으로 그늘을 짰을까요
서늘한 모시올로 짜 올린
우물빛 그늘!
당신 바라보다가
수굿이 펼쳐놓는 그늘 몇 필
고미경 시인 / 밤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겨울비 내린다 가로등 불빛아래는 추운 빗줄기들 라디오 FM 93.1에는 클라라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 빗소리를 낮은 음으로 켜는 첼로
턴테이블의 바늘처럼 나는 밤의 음반에 새겨진 골을훑는다 마음의 앰프에서 증폭하는 빗소리들은 먼 곳에서 와서 다시 먼 곳으로 사라지고
밤의 모퉁이에는 아직도 담배 한개피를 따뜻하게 나눠 피는 연인들이 있고
살아가야 할 멋진 이유는 없지만 핸들을 잡듯 생활을 두 손에 꼬옥 쥔 채 나는 집으로 가고 있다
오렌지 불빛 난로 옆에서 페르난두 페소아가 건네준 '불안의 서'를 펼치면
빗소리 같은 활자들이 불면의 밤 속으로 밤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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