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최서림 시인 / 세상의 안이면서 밖인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24. 08:00
최서림 시인 / 세상의 안이면서 밖인

최서림 시인 / 세상의 안이면서 밖인

 

 

나의 고향집, 엄마의 몸은

이 세상 안이면서 밖이다.

세상 밖에서 세상 안으로 나오는

태아는 산모만큼 목숨을 건다.

 

세상 안에서 쌓이고 쌓인 아픔이

자궁을 빠져나올 때만큼 커질 적이면,

엄마의 무릎 사이 머리를 파묻고

첫울음 같은 울음을 울고 싶다.

그 울음을 통해 세상 바깥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 울음이 세상보다 더 큰 당신 안에서

동그랗게 웅크리고 들어앉으리라.

 

내 살과 피가 마지막 눈물로 삭아내려

무덤 속을 적실 때까지,

이 세상의 안과 바깥에서

나의 눈물을 다 받아주는 당신,

아무리 다가가도 고독해지지 않는 당신.

 

 


 

 

최서림 시인 / 가시나무

 

 

사랑이란 말이 외계어처럼 들리던 때였다

시뻘건 적개심이 우울증을 몰아내주기도 하던 때였다

들을 귀가 없어 공허하게 혼자 떠들기만 하던

내 안에 빽빽이 도사린 가시는 보지 못하던 때였다

내 가시에 내가 찔리는 줄도 모르던 때였다

 

잿빛 꿈이라도 꾸어야 시인이지만

모든 이데올로기는 비극적이란 말도 있다

손님으로 들어가 쉴 만한 방들이 없다

 

말에 허기진 나더러 아내는

씨 뿌리는 사람의 심정으로 시를 써보라 한다

정신없이 말ㄹ을 뱉어내기 바쁜 시인보다

마음속에다 빈 주머니를 주렁주렁 달고

느릿느릿 받아먹어주는 사람이 고마운 때라 한다

잘라도 잘라도 솟아오르는 말의 가시를

뭉그러뜨릴 수 있는 것도 역시 말뿐이라 한다

 

 


 

 

최서림 시인 / 감자 먹는 사람들

 

 

왜정 때 배삼식 씨는 봉화에서 목도질로 먹고살았다

하루종인 어깨, 허리 무너져라 황장목을 나르고

물감자 한바께스 받아들고 후들거리며 돌아왔다

끼니라는 게 야차보다 무서웠다.

 

봄베이에 가면 왼종일 옷을 수천 번 빠는

인간 세탁기 불가촉천민이 있다.

꿀꿀이죽 같은 카레를 허겁지겁 퍼 먹을 때도

허리가 펴지지 않는 청년 핫산이 있다

 

야생 히아신스를 닮은 채털레이 부인이 사는

영국 중부에 지옥 같은 탄광촌 테버셜이 있다.

날카롭고 사악한 전깃불 밑에서 말을 잃어버린 광부들이

껍질도 안깐 돼지감자로 허기를 때운다

 

누에넹 들판의 시든 야생화 같은

먼지 자욱한 집속을 고흐가 들여다보고 있다.

두엄 빛깔 옷차림의 농부들이 갈고리 같은 손으로

설익은 감자를 먹고 있다.

서먹서먹한 내면을 희미하게 가려주는 램프,

지친 얼굴들은 서로 쳐다보지도 않는다.

 

한겨울에도 난방을 못하는

질퍽거리는 우리 안 돼지보다 못한 노인

라면 하나로 하루를 때운다.

노인의 흐릿한 초점 너머로 바퀴벌레들이

말라버린 라면 찌꺼기를 뜯어먹고

 

 


 

 

최서림 시인 / 나이

 

 

백합은 젊어야 백합이지만

호박은 늙어서도 호박이다.

 

속이 꽉 찬 애호박보다

속이 텅 빈 늙은 호박이 더 달콤하다.

 

늙은 호박 안에는 달맞이 꽃만이 아니라

방울새도 버들치도 살고 있다.

 

늙은 호박을 싣고 온 저 노인의 쭈글쭈글한 몸속에

고향의 산과 강이 따라와 슬며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아직 늙어보지 못한 서울의 아이들이

늙은호박과 노인을 고대 유물인 양 보고 지나간다.

 

 


 

 

최서림 시인 / 봄날 2

 

 

대낮에 켜진 가로등처럼

벚꽃이 너무 눈부셔 쓸쓸한 봄날,

모래먼지 풀풀 날리는 그녀의 봄날이

삽날에 잘린 지렁이처럼 그렇게

말라비틀어지며 기어서 간다

길이 보이지 않는 가슴속에서

이리 비뚤, 저리 비뚤, 서둘러서 지나간다

천지사방을 할퀴며 간다

그녀의 봄은 칼날을 품고 있다 때론

아플 정도로 황량해서 아름다운 生도 있다

 

 


 

 

최서림 시인 / 노시인

 

 

입속으로 가만히 궁글려 보는

노시인이라는 말, 함박꽃 냄새가 난다.

 

나이가 쌓여 연륜이 아니라 탐욕이 되는 시대

 

잘 익은 말이 시간에 녹슬지 않듯이

잘 영근 생은 때가 타지 않는다.

 

'노인'에게서는 고여있는 물냄새가 나도

'노시인'에게서는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계곡물소리가 난다.

 

양지쪽 햇볕처럼 따사로운

노시인이란 말

빳빳한 내 머리가 수그러진다.

 

 


 

 

최서림 시인 / 눈물은 둥글다

 

웃음은 구겨질 수 있어도

눈물은 언제나 둥글다.

 

하늘로 올라간 웃음은

땅에 떨어져 썩을 수 있어도,

땅에 떨어진 눈물은

향기 나는 기도처럼 하늘로 올라간다.

 

눈물은 한 생애를

둥글게 하는 힘이 있다.

 

 


 

 

최서림 시인 / 기차는 8시에 떠나네

 

드디어 귀향 한다고

해방된 듯이 그대는 수다스럽고,

나는 부러워하면서도 왠지

쓸쓸하게 손을 흔들어 떠나보내네.

 

빈손으로 귀촌 한다고

쫓기듯 서울에서 빠져나간다고

낮달같이 희미하게 웃는 그대를 보내고

낙엽 진 거리의 플라타너스처럼 우두커니 서있네.

 

어딜 가나 인간 세상 안쪽인데,

무한경쟁의 갈퀴가

뚫고 들어갈 수 없는 틈으로 숨어들기를!

 

낙엽처럼 떨어진 희망 쪼가리를 밟으며

나는 사람들 속으로 돌아가리.

이곳에 있어도 영원히 이곳에 속하지 않는 망명자,

자본의 심장부에다 '말'폭탄을 던지는 시인은

이 시대 마지막 레지스탕스라네.

 

이 밤 돌아오지 못할 카테리니로 떠나는 것은

그대가 아니라 나일세.

내 심장이 버티는 한

내 유일한 무기 볼펜과 노트를 가지고서

희망 없는 이 땅에 살아남아 있으리.

절망 한가운데로 실뿌리를 뻗어 보리.

 

 


 

최서림 시인

1956년 경북 청도 출생. 서울대 국문과 및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1993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이서국으로 들어가다』 『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 『세상의 가시를 더듬다』 『구멍』 『물금』 『버들치』 등. 시론집 『말의 혀』. 현재 서울과기대 문창과 교수. 클릭학술문화상, 애지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