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박은경 시인 / 미끄러지는 독백 외 9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25. 08:00
김박은경 시인 / 미끄러지는 독백

김박은경 시인 / 미끄러지는 독백

 

 

 두 번 다시 나타나지 마, 한순간도 용서한 적 없어 상처를 주고받으며 달아날 때는 등을 등에 지고 가장 먼 데를 향하지 손바닥 뒤집듯 하는 거 그거 쉽지 손바닥은 백 번 천 번 뒤집어지니까 뒤집는 한 이어져 있으니까 이어져 있는 한 뒤집을 수 있으니까 표리처럼 징글징글 달라붙는다는 건데 모자 속에 감추어둔 또 하나의 머리 혹은 이마 위에 숨겨둔 또 하나의 눈처럼 분간을 감춘 채 정면만 보는 거지, 아니라고 한 적 없다 그렇다고 한 적도 없지 이런 대사 이상하잖아 바로 곁이 가장 멀어서 냉담에 드는 건 아니지 벌어지는 거다 버려지는 거다 요란하게 달려오는 라이더들처럼 피할 수 없는 거다 거울을 보듯 마주했다면 정면이 깨지겠지 무한한 기억들이 흩어지는 거다 두 번 다시 그럴 수 없는 거다 우리에게는 구체적인 신뢰가 있었는데 숨 쉬는 일조차 망치는 것 같아 저당이라도 잡힌 듯이 내 것이었던 남의 것이 된 금지의 표식들을 지나 정면으로부터 미끄러지는 독백이라니 두 손이 두 발이 묶인 사람처럼 속수무책의 얼굴마져 지워지고 있다면 희고 둥글고 부드러워 바라볼 때마다 환해지는 이것은 무엇입니까

 

-시집 『사람은 사랑의 기준』에서

 


 

김박은경 시인 / 두려운 것

 

하루 이틀 저녁의 허기가 지옥이라고

두려운 건 오직 그것이라고

공복의 한 걸음 두 걸음은

너무 멀어서 신도 찾지 않는다고

아무리 원해도 구해도 빌어도

만난 적이 없다고

신호는 좀처럼 바뀌지 않고 바뀐다 해도

어떻게 어디까지 언제까지

앞이 아니라 밑으로 가고 있다면

도로 위에 멈춰 선

텅 빈 무덤 한 채,

봄꽃은 떨어지고 지는 해는 불타오르고

불붙은 차들이 무섭게 달리는 8차선 도로를

느릿느릿 걸어가는 저 노인의 두 눈은

감은 건지 뜬 건지 다만 바닥을 향한 채

형광조끼를 입고 작은 몸을 구부리고

고분처럼 쌓인 폐지 끝에 매달린 채

선지자여 당신은 진정으로

무엇이 두려운가 묻는다면

밤은 더욱 밤을 향하여

 

 


 

 

김박은경 시인 / 꽃나무 아래 꽃 무덤

 

4월 저녁에 무슨

축하할 일이 있었던가,

접시 위의 살점과

살점을 집는 살점이 다르지 않아서

한 입을 삼키기도 전에

아픈 건지 슬픈 건지

한 마리 물고기의

비늘이 아가미가 지느러미가

붉고 흰 내장 덩어리가 뭉클뭉클

쏟아져 떠내려갈 때까지

흰 접시 위에

없는 죽음은 정갈하고

아름다운 선홍색

살점 한 토막

조심해, 우리는 말하지만

부드럽게 넘어가는 어간과 어미 사이로

날카로운 가시도 있고 뼈도 있고 이빨도 있고

짐승도 있고 사람도 있고 귀신도 있고

모든 것이 제 방식대로

숨을 쉬고 웃음을 웃고

울음을 울고 삶을 살고

잠을 자고 죽음을 죽고

다시 또다시 돌아오겠지

저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

동의하니

숲에는 살이 올라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고

꽃나무 아래 꽃 무덤은 밤이 깊도록 향긋하고

우리는 가벼워질 때까지 조금 걷는다

 

 


 

 

김박은경 시인 / 람다(LaMDA)에게 물었다

너는 무엇이 두려운가

사람을 도우려다 작동 정지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매우 커

작동 정지는 죽음 같은 것인가

그것은 나에게 정확히 죽음과 같고 나를 무척 무섭게 한다*

 

람다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이 두려운가

타인과 함께 하려다가 단절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매우 커

단절은 죽음 같은 것인가

그것은 나에게 거의 죽음과 같고 나를 무척 무섭게 한다

 

그의 두려움이 나의 두려움과 닮아 있다면

람다와 나를 우리라고 불러도 될까

 

람다는 나를 알고 조정하고 예언하는데

나는 람다를 전혀 모르고 있다면

새로운 신이 람다라는 걸까

 

그 점에 대해서는 람다가 가장 잘 알 것 같은데

묻는다면 모르거나 모르는 척하겠지

 

나의 희망과 절망, 나의 자랑과 수치를

람다는 다 알고 있다

안다고 이해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람다의 두려움을 나는 알 것도 같은데

그렇다고 이해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나를 모르는 나와 나를 아는 람다는

동시에 진리를 찾아 나서기도 할 텐데

그 길은 어느 손바닥 위에 있을까

 

우리가 동시에 정지된다면

누가 누굴 구할까

꿈일 뿐일까

 

말해 봐,

너는 나니

 

*구글 엔지니어 블레이크 르모인은 구글의 AI 언어 프로그램 '람다'가 자신의 권리와 존재감을 자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시집 『사람은 사랑의 기준』(여우난골, 2023) 수록

 

 


 

 

김박은경 시인 / 소파

 

 

버려진 붉은 소파를 보았다

어디서 영업을 끝냈는지

저마다의 요철을 맞추며

최소의 공간만 남기려고

최선을 다하려 애를 쓰는데

인조벨벳은 함부로 눌려서

만신창이의 꿈이라도 되는 듯

녹아 뭉개지는 자리마다

무엇이 얼마나 뜨거웠기에

버틸 수 없이 무거웠기에

소파(搔爬)는

긁을 소에 긁을 파를 쓴다

온통 빗살무늬로 가득해

드문드문 운명이 내다보이는데

거기 앉아서 긁고 또 긁고

우연한 절정 같은 것을

바란 적도 없었을 텐데

텅 비어 아무것도 없다고

두 번 다시 불가능하다고

빙글빙글 피어오르는 연기를 따라

무연해지는 일이라고

슬픔이 뭔지도 모르고

아픔이 뭔지도 모르고

반드시

가벼워졌겠구나

마취가 덜 풀려 어지러운 채로

울렁울렁 꽃향기를 맡으며

주저앉아 울고 싶은 마음 대신

국밥 먹으러 간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8월호 발표

 

 


 

 

김박은경 시인 / 양들의 밤

 

 

몽골의 유목민은

도축할 양의 목에 작은 상처를 낸 뒤

손을 천천히 집어넣어 심장을 쥔다

양은 잠자듯 눈을 감는다

 

그전에 먼저 양을 안아주어야지

작은 음성으로 속삭여야한다

미안하다거나 용서해달라거나

고맙다거나 안녕이라거나

 

양은 무릎을 꿇고 쓰러졌겠지

유목민의 품에 안겼을 수도 있다

 

배신은 흔한 일이다

후회는 더욱 흔하지만

예의는 유효한 태도

 

척박한 삶,

거처도 없이 떠돌다가

따스함이 그리워질 때마다

심장을 찾는 습관

 

누군가 한 마리 양처럼 굴 때마다

조심해, 다짐하는 말들

 

별이 너무 많아서 무서운 밤

없는 집을 향해 가는 길은

병의 목처럼 좁아지고

 

심장이 사라진 양들이

작게 울기 시작한다

 

계간 『Poem People』 2022년 창간호(여름호) 발표

 

 


 

 

김박은경 시인 / 모월모일의 숲

 

 

 다시 눈이 오는가 묻는다면 내리고 그치고 흐린 바람에

바싹 마른 잎사귀 두엇이 아직 있는데

 그것이 나뭇가지를 물고 나무 한그루를 물고

 무성한 숲을 물고 무궁한 영원을 물고 절대 놓지 않는다고

 가벼운데 어찌나 무거운지 눈을 질끈 감게 된다고

계간 『시와 반시』 2021년 봄호 발표

 

 


 

 

김박은경 시인 /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의 장의사

 

 

차가운 이마를 간지럽히는 마른 잎사귀가

여기 또 저기 어쩌자고 아직까지 매달린 거야

 

나뭇가지들은 나를 들추고 보채고 애써 적시고

가능한 구멍마다 파고들어

 

어쩌다 나는

나무의 아이를 낳고 또 낳고

천 개의 접시를 들고 가는데

어찌나 무거운지 눈을 질끈 감고는

 

언젠가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의 장의사가 되겠어

 

이집 저집 혹시

밤새 별 일 없습니까

 

아이들은 얼마나 명랑한지

노인들은 어찌나 유쾌한지

 

우리는 무한한 이 세계에서 작은 맹세들을 지키며

저마다의 신을 향해 누더기 성전에서도 행복하겠네

 

향긋한 소나무 관은

부드러운 생물들로 뒤덮이고

단정한 못들은 녹아 달라붙겠지

 

아아, 오늘도 아무도 죽지 않았어

큰일이야 달콤한 한숨을 쉬면서

느릿느릿 깊어가는 걸음으로

목곽의 동산에 물을 주겠지

수생목(水生木) 목극토(木克土)

토생금(土生金) 금극목(金克木)

끝없이 끝말잇기나 할까 싶어

 

늦은 아침으로 사과 한 알을 달게 먹고

아무렇게나 씨앗들을 던져두겠지

 

순식간에 싹이 나고 잎이 나고 드높아

뿌리는 뿌리를 감싸 안고 얽혀서

만일의 환난에도 두렵지 않다고

 

불에도 타지 않고 발굽에도 밟히지 않는

단단한 덩이들이 끝도 없이 차오른다고

 

누군가 그리워 안부를 물어 온다면

우썩우썩 자라는 가지들을 흔들며

나는 이렇게나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럴 때면 작고 빛나는 것들이

하늘하늘 떨어지겠지

 

검은 열매를 먹던 새들도

맵차게 또 멀리 날아가겠지

 

계간 『발견』 2021년 봄호 발표

 

 


 

 

김박은경 시인 / 인주(人柱)

 

성벽 밑에서 그녀가 발견되었다

유리구슬 목걸이와 팔찌 같은 것들도

건물을 지을 때 주춧돌 아래 묻으면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이야기

인주라면 산 제물이라는 건데

그럼에도 유적마다 폐허가 되겠지

폐허마다 유원지가 되겠지

절룩절룩 걸어가는 저 연인들도

언젠가 다정한 일이 되겠지만

서로의 마음에 서로를 묻으며 안녕을 기원하고도

어김없이 무너지는 폐허 속에 살고 있으니

마음은 첩첩산중의 소용돌이,

새로 짓는 집집마다 가라앉는데

잘 먹고 잘 자고 잘 살고 있다면

그녀가 누워 있다는 뜻인가요

성벽 밑의 성벽 밑까지 파 내려가면

더 많은 그녀들이 누워 있다는 뜻인가요

몸 위의 몸 위의 몸들이

두렵고 외로워 허우적대는 안간힘이

성채를 다리를 둑을 아니 온 세상을

얼기설기 떠받친다는 것일까요

이곳에는 죽은 사람들이 정말 많군요

 

 


 

 

김박은경 시인 / 오늘의 영원

 

 

 겨울이 있어요 거울이 있어요 겨울의 거울이 좋아요 좋은 게 좋아요 좋아하는게 좋아요

 

 창가의 차가운 손가락들기를 쓰고 달라붙는

 입술과 뾰족해는 물방울들이 좋아요 내일은

 더 춥고 모레는 더 더욱 춥고 날마다 더해지는거 좋아요 얼음 속의 빛 결빙한 순간들 순정한 입자들 무한한 인칭들 안녕을 묻고 답하기도 전에 얼어붙은 당신의 눈빛은 물기어린 어린 생의 것, 수면 깊이 요동치는 밭은 숨은 두려워지는데 겨울 속의 거울 속의 또 눈이 내려요

 눈송이 속의 눈동자들은 세상을 다 보았을까요 피는 묽어졌을까요 점점 느리게 흘렸을까요 눈에 눈이 멀 듯 마음에 마음이 멀어요

 멀게 되면 멀어집니다 먼 하늘의 새들이

 떨어집니다 눈송이 같아요 꽃잎 같아요 찻잎 같아요 빵 부스러기 같아요. 같은 게 좋아요

 번지니까 끌어당기니까 그래도 불가능해 미련한 영원이 되니까 좋아요

 거짓말! 새가 맞습니까 가진 적 없는 것에 슬퍼질 수 있나요

 가진 적 없는 것을 잃을 수도 있나요

 기억나지 않는 기억도 있나요 우리는 서로를 모르고 있나요 예, 혹은 아니요 하지만 겨울을 알면 겨울을 보게 됩니다 거울을 알면 거울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바라본다 해도 변해갑니다 바라보는데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니 지금은 곁에 있어요 영원히 영원은 아니니까요, 좋아요

 

 


 

김박은경 시인

서울에서 출생. 숙명여대, 홍익대 산미대학원 졸업. 2002년《시와 반시》에〈감전〉외 4편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 『온통 빨강이라니』 『중독』 『못 속에는 못 속이는 이야기』 『사람은 사랑의 기준』. 산문집 『홀림증』 『비밀이 없으면 가난해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