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진명 시인 / 냄새가 오는 길목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25. 08:00
이진명 시인 / 냄새가 오는 길목

이진명 시인 / 냄새가 오는 길목

 

 

무엇이든 냄새 맡기 좋았던 길목

다 왔으나 다 오진 않았던

 

길목에 들어설 때마다

그랬다. 언제고 한 집에서는

길과 맞닿은 부엌 창문으로

된장찌개 끓이는 냄새를

한 접시 가득 생선 굽는 냄새를

 

그랬다. 이 나라의 냄새가 아니게

뜨거운 열사(熱砂)의 냄새 퍼뜨려주었다

퇴근길 혼자 가는

자취 생활자의 광막한 공복을 후비곤 했다

(…) 늦여름, 풀이 마른다

이 나라의 냄새가 아니게 풀이 마른다

열사의 타는 물의 향이 넘어온다

쓰라린 가을 길목

 

-『조선일보/최영미의 어떤 시』 2023.09.04.

 


 

이진명 시인 / 너무 수북한

 

 

너무 수북한 떨어진 잎 너무 수북한 떨어진 산새들

위와 흙길과 침엽을 지나 골짜기

너무 수북한 손뼉들 키스들

밟으면 푹푹 쏟아지는 수북한 무덤들 젖은 나팔들

나팔들 울음에 묻혀 돌아가는 산허리 빈 손뼉소리

너무 수북한 떨어진 입 너무 수북한 떨어진 구름

바위와 흙길과 침엽을 지나 또 골짜기

너무 수북한 빨간 물 물들었던 가을 가을 일기장들

 

 


 

 

이진명 시인 / 젠장, 이런 식으로 꽃을 사나

 

 

우이동 삼각산 도선사 입구 귀퉁이

뻘건 플라스틱 동이에 몇 다발 꽃을 놓고 파는 데가 있다

산 오르려고 배낭에 도시락까지 싸 오긴 했지만

오늘은 산도 싫다

예닐곱 시간씩 잘도 걷는 나지만

종점에서 예까지 삼십분은 걸어왔으니

오늘 운동은 됐다 그만두자

산이라고 언제나 산인 것도 아니지

젠장 오늘은 산도 싫구나

산이 날 좋아한 것도 아니니

도선사나 한바퀴 돌고 그냥 내려가자

그런 심보로 도선사 한 바퀴 돌고 내려왔는데

꽃 파는 데를 막 지나쳤는데

바닥에 지질러앉아 있던 꽃 파는 아줌마는 어디 갔는데

꽃, 꽃이, 꽃이로구나

꽃이란 이름은 얼마나 꽃에 맞는 이름인가

꽃이란 이름 아니면 어떻게 꽃을 꽃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별안간 꽃이 사고 싶다

꽃을 안 사면 무엇을 산단 말인가

별안간 꽃이 사고 싶은 것, 그것이 꽃 아니겠는가

몸 돌려 꽃 파는 데로 다시 가

아줌마 아줌마 하며 꽃을 불렀다

흰 소국 노란 소국 자주 소국

흰 소국을 샀다

별 뜻은 없다

흰 소국이 지저분히 널린 집 안을 당겨줄 것 같았달까

집 안은 무슨, 지저분히 널린

엉터리 자기자신이나 좀 당기고 싶었겠지

당기긴 무슨, 맘이 맘이 아닌

이즈음의 자신이나 좀 위로코 싶었겠지, 자가 위로

잘났네, 자가 위로, 개살구에 뼉다귀

그리고 위로란 남이 해주는 게 아니냐, 어쨌든

흰색은 모든 색을 살려주는 색이라니까 살아보자고

색을 산 거 아니니까 색 갖고 힘쓰진 말자

그런데, 이 꽃 파는 데는 절 들어갈 때 사 갖고 들어가

부처님 앞에 올리라고 꽃 팔고 있는 데 아닌가

부처님 앞엔 얼씬도 안 하고 내려와서

맘 같지도 않은 맘에게 안기려고 꽃을 산다고라

웃을 일, 하긴 부처님은 항상 빙그레 웃고 계시더라

부처님, 다 보이시죠, 꽃 사는 이 미물의 속

그렇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꽃이잖아요

부처님도 예뻐서 늘 무릎 아래 놓고 계시는 그 꽃이요

헤헤, 오늘은 나한테 그 꽃을 내주었다 생각하세요

맘이 맘이 아닌 중생을 한번 쓰다듬어주었다 생각하세요

부처님, 나 주신 꽃 들고 내려갑니다.

젠장, 이런 식으로 꽃을 사다니, 덜 떨어진 꼭지여

비리구나 측은쿠나 비리구나 멀구나

 

-시집 「세워진 사람」(창비) 중에서

 

 


 

 

이진명 시인 / 복자수도원

 

 

내 산책의 끝에는 복자수도원이 있다

복자수도원은 길에서 조금 비켜 서 있다

붉은 벽돌집이다

그 벽돌빛이 바랬고

창문들의 창살에 칠한 흰빛도 여위었다

한낮에도 그 창문 열리지 않고

그이들 중 한 사람도 마당에 나와 서성인 것 본 적 없다

둥그스름하게 올린 지붕 위에는 드문드문 잡풀이 자라 흔들렸고

지붕 밑으로 비둘기집이 기울었다

잠깐이라도 열린 것 본 적 없는 높다란 대문 돌기둥에는

순교복자수도회수도원(殉敎福者修道會修道院)이라 새겨진 글씨 흐릿했다

그이들은 그이들끼리 모여 산다 한다

저녁 어스름 때면 모두

성의(聖衣) 자락을 끌며 긴 복도를 나란히 지나간다고 한다

비스듬히 올라간 담 끄트머리에는 녹슨 외짝문이 있는데

삐긋이 열려 있기도 했다

숨죽여 들여다보면

크낙한 목련나무가 복자수도원, 그 온몸을 다 가렸다

내 산책의 끝에는 언제나 없는 복자수도원이 있다

 

 


 

 

이진명 시인 / 강변에 이르렀을 때

 

 

걷고 걸어와

강변에 이르렀을 때

모래들판은 흐지부지

강물에 잠겨 들어가고

무언가 좀더 확실한 것

그럴듯한 구조물 하나 서 있지 않고

흐지부지 모랫벌처럼 없어지는 것

그 보잘것없음만이

방금 물위를 쪼던 새처럼

분명하게 떠 있다

 

이 마을에서 오래 살았는지

수초 사이 애들이 버렸을 상자곽을 떠내며

편안한 모습의 한 어른이 와서

흐지부지 물속으로 들어가 버린 모래들판의 길을

삐걱이며 나무배에 싣고 간다

 

 


 

 

이진명 시인 / 우체통

 

 

나는 정류소 팻말 아래 진종일 서 있거나

잎새 떨어진 플라타너스 아래 계절이 다 가도록 서 있곤 했다

가끔 네거리 지하도 입구에 벌거벗은 채 있기도 했고

공중전화 유리상자 곁에 멀뚱히 붙어 있기도 했다

나는 사람들의 앉은키만큼밖에 크지 못했으며

검붉은 살색을 가지고 있었다

짧은 다리로 온몸을 받쳐대고는 있었지만

몸통 속에는 사실 빈 어둠일 때가 많았다

그 어둠을 한번 휘이 저어보라

견딜 수 없는 공포가 손을 해면처럼 잡아들일 것이다

캄캄한 채 나는 늘 열려 있었다

지하도 계단에 이마를 박고 온통 구부린 사내의 치켜든 새까만 두 손바닥처럼

또 건너편 지하도 계단에서

갓난 것을 끌어안고 누더기 수건을 뒤집어쓴 여자의 무릎 앞 플라스틱 동전바구니처럼

넣어다오, 살짝이 가볍게

넣어다오, 깊고 은밀하게 그러나 거침없이

내 어둠의 바닥에 떨어쳐 닿은 너희들의 탄식소리

나는 새까만 두 손바닥을 펼쳐올리거나

동전바구니를 거느리지는 않았지만

안에서는 열릴 수 없는 외짝 입을 달고

거리거리마다 붙박혀 있곤 했다

적어 보내줘 적어 보내줘

본지역 기타지역 그 어디일지라도

때묻은 종이 꽃잎 위 너희 아까운 인장 찍으며, 그럼

死海에서 푸른 잎줄기를 물고 날아오르는 흰 비둘기

그러나 나는 몸통 속 빈 어둠을 물리치려고

거지가 되기도 하고 외설이 되기도 했다

 

-시집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민음사, 1992

 

 


 

 

이진명 시인 / 그녀의 거리

 

 

그녀는 부서져 나간 보도블럭을 세면서 걷는다

우산을 끌면서 관목처럼 나지막이 이야기한다

가로수를 허름한 이층 건물을 하루를

전신주 위를 올려다볼 때는 이미 어두워오는 하늘을 이야기하는 걸까

무엇이 들었는지 모를 제 큰 가방 속에다 이야기를 도로 집어넣는 걸까

하루 낮 동안의 비는 그쳤지만

부서져 나간 보도블록의 물 고인 데에는 저녁 불빛이 스민다

그녀는 여전히 부서져 나간 보도블럭을 세면서 걷는다

그녀의 그림자는 차도에 눕고

쓰러진 입간판 앞에 멈춰 선 그녀는 무엇을 이야기하다 마는가

불빛을 단 차창도 같이 멈춘다

그녀는 남은 보도블록을 다 세지 못한다

더 이상 우산을 끌지 못하고 기우뚱일 때

오래전부터 그녀의 느린 발소리를 들어왔던 거리

그녀의 거리는 일어선다

저물 무렵이면 변함없는 그녀의 발소리를 기다리기도 했던 거리

어스름 속에서 일어나 그녀를 부축해 준다

마치 키 큰 애인이기나 한 것처럼

그녀의 우산과 가방을 대신 든 그녀의 거리는

정답게 그녀의 어깨를 감싼다

그녀의 거리도 그녀도

하루 낮 동안의 고된 빗소리를 끄덕이며 넘는다

 

-시집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민음사, 1992

 

 


 

 

이진명 시인 / 앉아서마늘까'면 눈물이 나요

 

 

처음 왔는데 이 모임에서는 인디언식 이름을 갖는대요

돌아가며 자기를 인디언식 이름으로 소개해야 했어요

나는 인디언이다! 새 이름 짓기! 재미있고 진진했어요

 

황금노을 초록별하늘 새벽미소 한빛누리 하늘호수

어째 이름들이 한쪽으로 쏠렸지요?

하늘을 되게도 끌어들인 게 뭔지 신비한 냄새를 피우고 싶어 하지요?

 

순서가 돌아오자 할 수 없다, 처음에 떠오른 그 이름으로 그냥

앉아서마늘까입니다 잘부탁합니다

완전 부엌냄새 집구석냄새에 김빠지지 않을까 미안했어요

하긴 계산이 없었던 건 아니죠

암만 하늘할애비라도

마늘 짓쪄 넣은 밥반찬에 밥 뜨는 일 그쳤다면

이 세상 사람 아니지 뭐 이 지구별에 권리 없지 뭐

 

근데 그들이 엄지를 척 세우고 박수를 치는 거예요

완전 한국식이 세계적인 건 아니고 인디언적인 건 되나 봐요

이즈음의 나는 부엌을 맴돌며 몹시 슬프게 지내는 참이었지요

뭐 이즈음뿐이던가요 오래된 일이죠

 

새 여자 인디언 앉아서마늘까였을까요

마룻바닥에 무거운 엉덩이 눌러 붙인 어떤 실루엣이 허공에 둥 떠오릅니다

실루엣의 꼬부린 두 손쯤에서 배어 나오는 마늘냄새가 허공을 채웁니다

냄새 메워 오니 눈물이 돌고 주욱 흐르고

 

인디언의 멸망사를 기록한 책에 보면

예절 바르고 훌륭했다는 전사들

검은고라니 칼까마귀 붉은늑대 선곰 차는곰 앉은소 짤막소...

그리고 그들 중 누구의 아내였더라

그 아내의 이름 까치...

하늘을 뛰어다니다 숲속을 날아다니다

대지의 슬픈 운명 속으로 사라진 불타던 별들

 

총알이 날아오고 대포가 터져도

앉아서마늘까는 바구니 옆에 끼고

불타는 대지에 앉아 고요히 마늘 깝니다

눈을 맑히는 물 눈물이 두 줄

신성한 머리, 조상의 먼 검은 산으로부터 흘러옵니다

 

 


 

이진명(李珍明) 시인

1955년 서울 출생. 서울예술전문대 문예창작과를 졸업. 1990년 계간《작가세계》 제1회 신인으로 등단. 시집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 『단 한 사람』 『세워진 사람』. 제4회 일연문학상과 제2회 서정시학작품상 수상. 대산재단창작기금(1994)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