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조창환 시인 / 산수유꽃을 보며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25. 08:00
조창환 시인 / 산수유꽃을 보며

조창환 시인 / 산수유꽃을 보며

 

아직은 이른 봄, 바람 사나운데

찬비 내린 날 아침 노란 산수유꽃들

새앙쥐 같은 눈 뜨고 세상을 본다

연하고 어린 것들 마음 설레게 하여

메마른 가지에 바글바글 붙어 있는

산수유꽃들 시리게 바라본다

세 이레 강아지들 눈 처음 뜨고

마루 밑에서 오글오글 기어나오듯

산수유꽃들도 망울 터뜨리고

새 세상 냄새 맡으러 기어나온다

산수유 마른 가지에 노란 꽃들이

은행나무에 은행 열리듯

다닥다닥 맺혀 눈 뜨는 것을 보면

찬비 그친 봄날 아침, 흐윽 숨 막혀

아득한 하늘 보며 눈감을밖에

 

-시집 『피보다 붉은 오후』에서

 


 

조창환 시인 / 유혹

 

실비 내리는 풀밭을 맨발로 밟으면

아랫도리가 자리자릿하다

풀밭의 살 속엔 파닥거리는 작은

심장이 쉬고 있다

풋내 나는 풀밭과 하늘이 수줍게

서로의 젖가슴께를 쓰다듬을 때

잠에서 덜 깬 처녀의 머리채 같은

실비 내리고

어두워진다

풀밭은 몸을 떤다

 

-시집 『피보다 붉은 오후』 중에서

 

 


 

 

조창환 시인 / 안개로 쓴 편지를 읽고

 

안개로 쓴 편지 잘 받아보았습니다

그대는 멀지 않은 곳에서, 답답하고 뿌옇게

갇혀 살았다고 말하시지만

나는 그대의 살 속 깊은 곳에 자라는

뻘겋게 녹이 피는 닝닝한 봄날을

기억합니다 그 흥겨운 애절함은

아득하고 으시시한 대낮 속의 낮잠이며

황량한 황홀, 눈부신 눈물

푸른 꽃 깔려 있는 가시덤불입니다

그대가 멀지 않은 곳에서

살 속에 자라는 두터운 안개를 껴안고 울 때

나도 피 속에 스며 있는 저 팽팽한

쓰라림을 껴안고 살았습니다

사물은 완성되지 않고 다만 두터워질 뿐

말은 스스로의 두터움으로 안개를 만들어

사람 사이의 길을 덮으려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들 제각각 껴안은 흔적 속으로

난감한 아름다움 이루며 사는 것을

그대 아시는지요

 

-시집 『피보다 붉은 오후』 중에서

 

 


 

 

조창환 시인 / 절벽 앞에서

 

절벽 앞에서 길을 찾는다

천길 낭떠러지 앞에 곧게 서서

신발 끈 고쳐매고

허리띠 졸라매고

숨 깊이 들이켜면

완강한 허공도 한순간이다

절벽에서 절벽 사이

밑에는 푸른 강이 흐르고

달려와 두 발 모아

허공에 솟구치면

맞은 편 바위 위에 우뚝 서리라

이제부터 한순간

허공에 솟구쳤다

맞은편 바위 위에 서기만 하면

허공에서 하느님 저를 붙드사

거기에 내려놓은 줄 알겠사오니

절벽 건너서 길을 찾거든

쓰임새 있는 곳이 쓰시옵소서

 

 


 

 

조창환 시인 / 눈 속에 갇혀 언덕을 보면

ㅡ유타에서

 

눈이 허리까지 쌓여 있는

와사치 계곡에 또 눈 내린다

키 큰 나무들이 눈에 잠기고

하늘이 제 무게로 가라앉는다

눈 속에 갇혀 언덕을 보면

길 없는 길들도 따뜻해지고

두터운 슬픔까지 따뜻해진다

 

 


 

 

조창환 시인 / 한 방울

 

입원실 침상에 누워

포도당 수액이 한 방울씩 천천히

맺혔다가 떨어지는 것을 보는 일은

명상적이다

 

깊은 생각에 잠긴 성 어거스틴의

한숨 같기도 하고

누가 세례받던 날 숨어서 흘린

눈물 같기도 하고

장충동 분도회관 조광호 신부 방의

바늘 하나짜리 시계 같기도 하다

 

수액 한 방울 힘들게 맺혀

오래 망설인 후

단호히 결심하고

뚝 떨어진다

 

한 방울의 참회에 우주를 담아

오래 기도한 후

눈물로 떨어질 때

보석보다 아름다운

평화가 온다

 

 


 

 

조창환 시인 / 사월

 

내소사 앞마당에

분홍 겹동백

달빛 내린 봄밤에 벙긋 웃는다

ㅡ내 다 안다

청대숲 흔들던 바람

건너 산 흰 산목련을 끌어안는다

 

 


 

 

조창환 시인 / 설천雪泉 가는 길

 

설천샘터 가는 길이 눈처럼 희다

새벽바람에 풀풀풀 흩날리는 아카시아 잎

뒤처져 걸어오는 아내의 어깨 위에

향기처럼 머물다 흩어지는 작은 이파리들

해뜨기 전에 벌써 솔냄새에 취했는지

청설모 한 마리가 이웃처럼 따라온다

뒤따라오다가 제 먼저 가며

뒤돌아본다

설천샘터 옆 전나무 그늘에서 만나자 한다

 

 


 

조창환(曺敞煥) 시인

1945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문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문학박사). 1973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1985년 <라자로 마을의 새벽>으로 제17회 한국시인협회상, 제5회 한국가톨릭문학상 수상. 아주대학교 인문대학 교수 역임. 시집 <빈 집을 지키며> <라자로 마을의 새벽> <그때도 그랬을 거다> <파랑눈썹> <피보다 붉은 오후> <수도원 가는 길> <마네킹과 천사> <신의 날> 등.  저서<한국 현대시의 운율론적 연구> <문학의 이해와 감상> <한국현대시인론>. 현재 아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