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창환 시인 / 산수유꽃을 보며 외 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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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환 시인 / 산수유꽃을 보며
아직은 이른 봄, 바람 사나운데 찬비 내린 날 아침 노란 산수유꽃들 새앙쥐 같은 눈 뜨고 세상을 본다 연하고 어린 것들 마음 설레게 하여 메마른 가지에 바글바글 붙어 있는 산수유꽃들 시리게 바라본다 세 이레 강아지들 눈 처음 뜨고 마루 밑에서 오글오글 기어나오듯 산수유꽃들도 망울 터뜨리고 새 세상 냄새 맡으러 기어나온다 산수유 마른 가지에 노란 꽃들이 은행나무에 은행 열리듯 다닥다닥 맺혀 눈 뜨는 것을 보면 찬비 그친 봄날 아침, 흐윽 숨 막혀 아득한 하늘 보며 눈감을밖에
-시집 『피보다 붉은 오후』에서
조창환 시인 / 유혹
실비 내리는 풀밭을 맨발로 밟으면 아랫도리가 자리자릿하다 풀밭의 살 속엔 파닥거리는 작은 심장이 쉬고 있다 풋내 나는 풀밭과 하늘이 수줍게 서로의 젖가슴께를 쓰다듬을 때 잠에서 덜 깬 처녀의 머리채 같은 실비 내리고 어두워진다 풀밭은 몸을 떤다
-시집 『피보다 붉은 오후』 중에서
조창환 시인 / 안개로 쓴 편지를 읽고
안개로 쓴 편지 잘 받아보았습니다 그대는 멀지 않은 곳에서, 답답하고 뿌옇게 갇혀 살았다고 말하시지만 나는 그대의 살 속 깊은 곳에 자라는 뻘겋게 녹이 피는 닝닝한 봄날을 기억합니다 그 흥겨운 애절함은 아득하고 으시시한 대낮 속의 낮잠이며 황량한 황홀, 눈부신 눈물 푸른 꽃 깔려 있는 가시덤불입니다 그대가 멀지 않은 곳에서 살 속에 자라는 두터운 안개를 껴안고 울 때 나도 피 속에 스며 있는 저 팽팽한 쓰라림을 껴안고 살았습니다 사물은 완성되지 않고 다만 두터워질 뿐 말은 스스로의 두터움으로 안개를 만들어 사람 사이의 길을 덮으려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들 제각각 껴안은 흔적 속으로 난감한 아름다움 이루며 사는 것을 그대 아시는지요
-시집 『피보다 붉은 오후』 중에서
조창환 시인 / 절벽 앞에서
절벽 앞에서 길을 찾는다 천길 낭떠러지 앞에 곧게 서서 신발 끈 고쳐매고 허리띠 졸라매고 숨 깊이 들이켜면 완강한 허공도 한순간이다 절벽에서 절벽 사이 밑에는 푸른 강이 흐르고 달려와 두 발 모아 허공에 솟구치면 맞은 편 바위 위에 우뚝 서리라 이제부터 한순간 허공에 솟구쳤다 맞은편 바위 위에 서기만 하면 허공에서 하느님 저를 붙드사 거기에 내려놓은 줄 알겠사오니 절벽 건너서 길을 찾거든 쓰임새 있는 곳이 쓰시옵소서
조창환 시인 / 눈 속에 갇혀 언덕을 보면 ㅡ유타에서
눈이 허리까지 쌓여 있는 와사치 계곡에 또 눈 내린다 키 큰 나무들이 눈에 잠기고 하늘이 제 무게로 가라앉는다 눈 속에 갇혀 언덕을 보면 길 없는 길들도 따뜻해지고 두터운 슬픔까지 따뜻해진다
조창환 시인 / 한 방울
입원실 침상에 누워 포도당 수액이 한 방울씩 천천히 맺혔다가 떨어지는 것을 보는 일은 명상적이다
깊은 생각에 잠긴 성 어거스틴의 한숨 같기도 하고 누가 세례받던 날 숨어서 흘린 눈물 같기도 하고 장충동 분도회관 조광호 신부 방의 바늘 하나짜리 시계 같기도 하다
수액 한 방울 힘들게 맺혀 오래 망설인 후 단호히 결심하고 뚝 떨어진다
한 방울의 참회에 우주를 담아 오래 기도한 후 눈물로 떨어질 때 보석보다 아름다운 평화가 온다
조창환 시인 / 사월
내소사 앞마당에 분홍 겹동백 달빛 내린 봄밤에 벙긋 웃는다 ㅡ내 다 안다 청대숲 흔들던 바람 건너 산 흰 산목련을 끌어안는다
조창환 시인 / 설천雪泉 가는 길
설천샘터 가는 길이 눈처럼 희다 새벽바람에 풀풀풀 흩날리는 아카시아 잎 뒤처져 걸어오는 아내의 어깨 위에 향기처럼 머물다 흩어지는 작은 이파리들 해뜨기 전에 벌써 솔냄새에 취했는지 청설모 한 마리가 이웃처럼 따라온다 뒤따라오다가 제 먼저 가며 뒤돌아본다 설천샘터 옆 전나무 그늘에서 만나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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