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혜영 시인 / 아버지의 만년필 외 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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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혜영 시인 / 아버지의 만년필
만년필 늘 품고만 다녔을 뿐 그것으로 뭔가를 적는 아버지를 본 적이 없습니다 함부로는 쓸 수 없는 칼이나 권총쯤 되는 줄 알았어요 우유부단의 수뇌부였던 아버지
그 흔해터진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도 적지 못했던 어린 새끼들 데리고 어떡하든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유언장 작성 따위는 더구나 엄두도 못낸 아버지 돌아가시자 어머니
만년필 쑥 뽑아들더니 힘껏 내던져버렸습니다 한평생 가슴에 꽂았다 뺐다 하면서 만지작거리기나 했을 뿐인
아버지의 마음은 아랫집 함석지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왈칵 쏟아내면서 딱 한 번 일필휘지로 시원스럽게 육두문자를 휘갈겨 썼습니다
생에 대한 야유조차도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끝내 할 수 없었던 당신
아버지의 마음을 유품으로 챙겨드리지 못한 점을 이해하세요 저승에 가서도 아버지, 그 약해빠진 마음을 품고 다니며 전전긍긍할까 봐 그랬습니다
한혜영 시인 / 겨울을 잃고 나는
나는 흰옷을 걸쳐본 지가 오래된 종려나무, 소금기에 푹 절여진 꼬리를 끌고 해안가를 어슬렁거려요 마음은 죽을 자리를 찾는 늙은 늑대 같기도 하고 조문을 다녀가는 시든 꽃 같기도 하고 찢어질 대로 찢어진 깃발 같기도 하고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 같기도 해요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에요 겨울을 잃은 것들은 다 그래서 혀가 포도나무 덩굴처럼 길어졌어요 살려면 닥치는 대로 생각을 잡고 올라야 해요 아니면 녹아서 줄줄 흐르니까 얼음 조각처럼 잘생긴 배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얼굴이 바닥에 질펀해요 뱀은 늘어질 대로 늘어진 혈관을 끌고 서늘한 굴을 찾아가지요 저기서 시곗바늘을 휙휙 돌리는 여자! 아직도 홈쇼핑의 채널을 지키네요 세상엔 없는 계절을 파는, 소매가 긴 스웨터로 감춘다고 감췄지만 손가락을 보니 거미의 종족이에요 땀이라고는 흘릴 줄 모르는, 카펫 가게의 상인처럼 공중에 척척 펼쳐놓는 상술로 하룻밤에도 무성한 계절을 팔아치우지요 늙은 테이프처럼 늘어진 시간 속으로 예고 없는 눈보라가 휘날려요 영하라는 말은 춥디추웠던 옛 연인의 이름, 나는 그리움을 코트 깃처럼 세우고 무릎이 푹푹 빠지는 이름속으로 들어가요 라라의 노래를 들으며 닥터 지바고처럼 눈이 빨개지면서
눈보라 속에서 만났던, 네 개의 다리 중에서 겨울이 망가진 안락의자는 누가 쓰다가 버린 기호일까요 완벽하게 균형을 상실해 버린, 어떤 감동도 휴식도 줄 수 없는, 저 그런데 말이에요 벽난로가 어떻게 생겼지요?
-계간 『시와 사상』 2022년 가을호 발표
한혜영 시인 / 모래인간들
지하도로 쏟아져 들어가는 군중 속에서 나도 한 알의 뜨거운 모래로 휩쓸렸다 목마른 사막을 뭉쳐 모래인간으로 만든 신이 사람의 도시로 보낸,
모래 알갱이 하나하나에는 고독이라는 유전자가 각기 다른 내력으로 숨어 있다 사막에 버려진 송장을 뜯으며 서럽던 개의 영혼이 숨어 있고 죽은 새끼의 무덤을 다독거리던 늙은 낙타의 울음소리가 스며 있고 그곳을 떠돌다 몰락한 바람의 냄새가 배어 있다
이러한 주재료로 지어진 사람들은 태생적인 갈증으로 오아시스를 찾아 헤매는 거다 그러다 광장에서 모래와 모래가 재회하면 사막처럼 뜨거워져서 폭풍한테 배운 노래를 폭풍처럼 불러 젖히는 거다
사막에서 온 줄조차 모르는 승객들 틈에 나는 한 알의 모래로 골똘하게 앉아 있었다 도시의 숨통을 묶었다 끌렀다 하면서 시간놀이를 즐기던 지하철이 멈출 때마다 승객들은 멱살이라도 잡힌 것처럼 끌려오거나 떠밀려 나갔다
모이면 흩어지는 것 또한 모래의 운명이니 그들은 어디로 가서 그날의 해변이 되거나 그날의 사막이 될 터였다 -<계간 상상인> 2024년 겨울호 발표
한혜영 시인 / 기린이란 이름으로
아주 오래전, 나는 동물원에 놀러 온 당신의 머리칼을 뜯은 적이 있습니다 심심하기도 했지만 펜스에 기대 사진을 찍고 있는 당신에게서 풍기던 알 수 없는 풀냄새 때문이었습니다 낮은 울타리 따위로 당신과 나의 경계를 짓고 싶어 했던 유난히 긴 목을 가진 나를 헤아리지 못한 동물원 측의 불찰도 있었지만요 아무도 몰랐어요 그들은 내가 사육사가 주는 사료 대신에 구름을 먹고 산다는 거 아카시아 숲은 까마득하게 멀었으니까요 나는 밤마다 아카시아나무를 우물거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꽃과 이파리 속에 교묘하게 감추어둔 가시를 먹는 일이란 묘한 통증과 함께 즐거움이 있었지요 아카시아 숲은 언제나 멀고 혀가 닿을 수 있는 것은 구름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내 목뼈를 끄덕끄덕 밟아가며 천국까지 오를 작정을 했지요 포유류의 일곱 계단으로는 어림없다는 편견을 깨고 싶었습니다 때때로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슬픔을 배출할 수 있는 긴 통로도 가지고 있었고요 이제야 희미하던 기억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당신에게서 맡은 것이 아카시아 향기였다는 거 당신의 머리칼에 찔린 입술도 한꺼번에 이해가 되는군요 키를 낮춘다고 낮췄으면서 아직도 가시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당신 다시 만난다면 이번에는 영혼까지 깨끗하게 먹어드릴게요 기린이란 이름으로 -월간 『모던포엠』 2022년 9월호 발표
한혜영 시인 / 문득, 불러보는 혁명가
마디마디 이어 붙여야 하나의 이름을 갖는 것들이 있지 시간과 시간, 사건과 사건이 모여 역사가 되는 것들이 다 그렇지만,
철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따라 들어와 고통스럽게 끌고 다니던 척추를 부리고 있네 세월의 검은 뼈를 세느라 밤새도록 철커덕거리는 열차,
나는 지금 내 등에 깔린 무수한 침목枕木을 세며 가문을 달리는 중이라네
검은 입술을 가진 터널 입구에 아버지의 얼굴이 실패한 혁명군처럼 내걸리고 화통소리 한결 높이는 열차는 코끼리처럼 달려 아버지의 얼굴을 가차 없이 찢어버리네
하긴, 한낱 사소한 인생 때문에 역사가 멈출 수는 없는 법이지 시간이란 때때로 물이고 불이고 바람이고 광기니까 마디마디의 낱말, 문장과 문장으로 이어진 한 권의 책을 일으켜 세우는 아, 버거워 삐걱거리는 나의 척추여
누가 시대의 건반을 잘못 눌렀는가
한꺼번에 울음을 터트리는 내 마디마디의 뼈 지령도 밀명도 더는 오지 않는 이 시대의 외로운 혁명군인 나는 지금 어디를 달리는 중인가 -웹진 『시인광장』 2022년 5월호 발표
한혜영 시인 / 목련
방금 숨거둔 이의 가슴 여며준 듯싶은
손! 저 희디흰 손앞으로 이끌려가
이승에 더럽힌 이마 위에 종부성사를 받고 싶네
한혜영 시인 / 징검다리 건널 때면
토끼처럼 사뿐사뿐/ 반만 디뎌 건너봐요. 실개천 물소리는/ 흘러내린 풍금소리 물 젖은/ 조약돌 하나/ 반짝 눈을 뜹니다.
물빛이 흔들릴라/ 맘 조리며 건너가요. 말갛게 잠긴 하늘/ 곱게 씻긴 모래알들 생각은 여울진 물살/ 산빛 씻겨 갑니다.
송사리 떼 흩어질라/ 숨죽이며 건너가요. 물방개 잔등 위에 / 동동 실린 꽃잎 구름 한 자락 헹군 구름도/ 하늘 싣고 갑니다.
한혜영 시인 / 편지
물고 온 건 볍씨였다 싹을 내는 볍씨였다 몇 평 뙈기 물려받아 면면이 이은 물고 그 핏줄 받들어 지은 정이랑 미움이랑
피봉 채 뜯기도 전 쏟아지는 안부들이 파랗게 웃자라는 이국의 서러운 땅 뜸북새 목멘 소리도 따라와서 울고나
흙이랑 물줄기랑 천지간에 맺은 이치 젖줄 하나로 통하는 기가막힌 이 합리를 팜츄리 배경으로 앉아 총총 읽고 있나니
한혜영 시인 / 이름에 대하여
文樣도 색도 청청한 고려 청자 그쯤 되는 빛나는 이름 있다 한 생전 눈이 부신 모든 것 다 저물어도 저물지 않는 이름 있다
더러는 초벌부터 아주 틀린 그릇이라 일그러진 모양대로 비바람에 젖어 산다 서러운 손때 묻히며 이리저리 옮겨 산다
한번은 꼭 그렇게 깨질밖에 도리없는 그릇 이상 무엇도 아닌 더없이 困한 日常 그래도 사람들에게 이름이 있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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