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충규 시인 / 구름의 장례식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27. 08:00
김충규 시인 / 구름의 장례식

김충규 시인 / 구름의 장례식

 

 

비를 뿌리면서 시작되는 구름의 장례식,

가혹하지 않은 허공의 시간 속에서 행해지는,

날아가는 새들을 휙 잡아들여 깨끗이 씻어 허공의 제단에 바치는,

죽은 구름의 살을 찢어 빗줄기에 섞어 뿌리는,

그 살을 받아먹고 대숲이 웅성거리는,

살아있는 새들이 감히 날아갈 생각을 못하고 바르르 떠는,

하늘로 올라가는 칠일 만에 죽은 아기의 영혼을 아삭아삭 씹어 먹는,

산 자들은 우산 속에 갇혀 보지 못하고 죽은 자들만이 참여하는,

지상에 흥건하게 고이는 빗물에 살 냄새가 스며 있는,

그 순간 나무들의 이파리가 모두 입술로 변해서 처연하게 빗물을 삼키는,

손가락으로 빗물을 찍어 먹으면 온몸에 구름의 비늘이 돋는,

 

비를 그치면서 끝나는 구름의 장례식.

 

 


 

 

김충규 시인 / 먹구름을 위한

 

 

세탁을 해도 깨끗해지지 않을 먹구름이 평야를 이루고 있다

새의 몸을 가진 듯한 까만 점 두 개가 먹구름을 비켜간다

일각수처럼 선 채 풍경이 점점 사납게 어두워지는 것을 본다

아무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 있다 지금이 그런 때

하프를 연주하는 처녀의 목덜미에 이빨을 깊이 박아 넣는

흡혈귀의 형상으로 먹구름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있다

피를 빨린 처녀가 흡혈귀를 몹시 숭배할 수 있듯

나는 저 먹구름을 숭배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내 피는 지극히 어둡고 나는 무엇엔가 흡입되고 싶다

지금 내게 아비가 누구냐고 물으면 저 먹구름이라 말할 수 있다

질서 없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영토이므로 먹구름은

몽롱한 동경이다 불안하므로 더 애틋한 불륜이다

내 입술에서 흘러나온 노래는

먹구름을 위한 것이다 나는 태양을 숭배하는 자들로 우글거리는

이 지상에서 먹구름을 숭배하기로 한 자

신앙이라고 말할 단계는 아니지만

먹구름을 내 혈관 가득 채우고 싶은 자

하프를 배워 먹구름을 위한 연주를 하고 싶은 자

먹구름이 비를 내리지 않아도 나는 이미 흥건 젖어 있다

 

 


 

 

김충규 시인 / 지금 보스턴에도 보슬비가 올까

 

 

지금 보스턴에도 보슬비가 올까

당신의 어깨 위로 보슬비 소복소복 쌓이는 소리

내 어깨 위로 검은 침묵이 쌓일 때 당신은 자꾸 말을 건다

가보지 않은 보스턴에도 보슬비가 온다면 그곳에서도

한쪽은 말하고 한쪽은 침묵하고 보슬비에 젖고 있을까

개가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도 짖으며 지나간다 주인을 끌고

성대를 제거한 개는 얼마나 제 소리가 그리울까

하물며 보슬비도 소리를 내는데

그런데 나는 성대를 제거하지도 않았는데 소리를 못 내고 있다

내 어깨가 누추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뭘까

단지 말하지 않음을 침묵이라고 할 수 있나

비에 젖은 침묵을 뭐라 부르나

당신은 자꾸 무언가를 말하고 내가 대답을 하지 않는데도 말하고

그래도 화를 안 내는 게 신기하다

정말 침묵하려고 한 게 아닌데 보스턴이 나를 왠지 입 닫게 한다

보스턴에 그리운 누가 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보스턴에서 누군가 나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보슬비 쌓인 보스턴이 까닭 모르게 내 입을 닫게 한 것

우리의 등 뒤로 항구가 서 있다

참 그러고 보니 보스턴도 항구의 도시

왠지 항구는 떠나기만 하는 곳이란 생각

지금 훌쩍 당신이 보스턴으로 떠나버렸으면 좋겠어! 당신의 말에

내가 화들짝 놀란다 보슬비가 허공에서 잠시 멈칫

그래 보스턴으로 간 내 어깨 위로 보슬비가 쌓일 때

이 항구에서 당신도 보슬비에 젖으며 배를 기다릴까 떠나려고...

나는 여전히 침묵이고 보슬비는 왠지 보스턴 쪽으로 몰려갈 듯하고

 

 


 

 

김충규 시인 / 수렁

 

 

수렁은 비어 있어요

오늘밤 몰래 누굴 던져넣을까요

첨벙이는 소리가 나지 않는 수렁입니다

그 흔한 발자국도 빠지지 안흔군요

수렁에서 건진 나무가 젖어 있습니다

아직 좀 지쳐 있군요

달이 없으니 고려가요를 부르기도 민망합니다

수렁에 달빛이 내릴 때 우리는 가없이 측은해지니까요.

달의 노예로 한평생 살아도 그다지 나쁜 일생은 아니겠지요.

달은 표절하기에도 좋은 노래니까요

다만 좀 지겹지만 수렁의 달이라면 좀 다르지요

수렁에서 건진 달은 딸이니까요

젖은 발로 수렁에 들어가는 건 어리석은 짓입니다

젖음이 젖음에 섞이는 건 수렁의 입장에선 불쾌한 일입니다

가련 죽어가는 나무를 던져넣어주면 수렁이 흔쾌히 웃지요

살릴 수 있으니까요 수렁은 숨이기도 합니다

고양이는 글쎄...고양이도 젖은 노래를 부르는 족속이니까요

젖이 늘 고픈 외로운 짐승입니다.

불쌍하다고 머리를 쓸어주면 화를 내는 짐승입니다

그냥 고양이 소리를 흉내내야 합니다

가소롭게 웃으며 지나가지만요

수렁 곁을 어슬렁어슬렁 거니는 고양이를 보지 않았군요

제 영혼인 듯 들여다봅니다

오래 쳐다보면 좀 무섭지요.

고양이가 다녀간 뒤에 수렁을 바라보면 고양이의 눈동자 같습니다

깊이를 알 수 없습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것들은 모두 다 수렁입니다

 

 


 

 

김충규 시인 / 냇가로 끌려간 돼지

 

 

냇가로 끌려가면서 돼지는 똥을 쌌다

제 주검을 눈치챈 돼지는

아직 익지 않은 똥을 수레 위에 무더기로 쌌다

콧김을 푹푹 내쉬며 꿀꿀거렸다

입가에는 거품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늘은 창자처럼 붉었다

내일 있을 동네 잔치로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한껏 부풀어 있었다

돼지가 냇가에 도착했을 때

거기 먼저 도착해 있는 것은

숫돌을 갈고 있는 칼이었다

칼이 시퍼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체념한 듯 돼지는 사람들을 둘러본 뒤에

씩 웃었다 그 순간, 쑥 들어오는 칼을

돼지의 멱은 더운 피로 어루만졌다

 

 


 

 

김충규 시인 / 우체국 계단

 

 

우체국 앞의 계단에

나는 수신인 부재로 반송되어 온

엽서처럼 구겨진 채 앉아 있었다

빨간 우체통이 그 곁에 서 있었고

또 그 곁에는 늙은

자전거가 한 대 웅크려 있었다

여름의 끝이었고 단물이 다 빠져나간 바람이

싱겁게 귓볼을 스치며 지나갔다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기 위하여

나는 편지 혹은 엽서를 안 쓰고 지낸 지

몇 해가 지났다

생각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애써 기억의 밭에 파종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길 건너편의 가구점 앞에서

낡은 가구를 부수고 있는 가구점 직원들,

그리움도 세월이 흐르면 저 가구처럼 낡아져

일순간 부숴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낡은 가구처럼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정 그리워서 미쳐버릴 지경에 이르면

내 이마에 우표를 붙이고 배달을 보내리라

우체국의 셔터가 내려가고 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져 갔다 여름의 끝이었고

나는 아직 무성한 그리움의 계절을

맞이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시집 『그녀가 내 멍을 핥을 때』(문학동네, 2003)

 

 


 

 

김충규 시인 / 꽃멀미

 

 

새가 숨어 우는 줄 알았는데

나무에 핀 꽃들이 울고 있었다

화병에 꽂으려고 가지를 꺾으려다가

그 마음을 뚝 꺾어버렸다

피 흘리지 않는 마음, 버릴 데가 없다

나무의 그늘에 앉아 꽃 냄새를 맡았다

마음속엔 분화구처럼 움푹 패인 곳이 여럿 있었다

내 몸속에서 흘러내린 어둠이 파놓은 자리,

오랜 시간과 함께 응어리처럼 굳어버린 자국들

그 자국들을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을 때

깊고 아린 한숨만 쏟아져 나왔다

꽃 냄새를 맡은 새의 울음에선 순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의 힘으로 새는

사나흘쯤 굶어도 어지러워하지 않고

뻑뻑한 하늘의 밀도를 견뎌내며 전진할 것이다

왜 나는 꽃 냄새를 맡고 어지러워

일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그늘에 누워

올려다보는 하늘에는 구름이 이동하고 있었다

구름이 머물렀던 자리가 움푹 패여,

그 자리에 햇살들이 피라미처럼 와글와글

꼬리를 치며 놀고 있었다

아니, 황금의 등을 가진 고래 한 마리가

물결 사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마흔도 되기 전에, 내 눈엔 벌써

헛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걸까

사후(死後)의 어느 한적한 오후에,

이승으로 유배 와 꽃멀미를 하는 기분,

저승의 가장 잔혹한 유배는

자신이 살았던 이승의 시간들을 다시금

더듬어보게 하는 것일지도 몰라, 중얼거리며

이 꽃 냄새, 이 황홀한 꽃의 내장,

사후에는 기억하지 말자고

진저리를 쳤다

 

 ―100호 사화집『詩가 오셨다』(천년의 시작, 2008)

 

 


 

김충규 시인 (1965-2012)

1965년 경남 진주 출생. 서울예대 문창과 졸업. 1998년 《문학동네》 하계 문예공모로 등단. 시집 『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그녀가 내 멍을 핥을 때』 『물 위에 찍힌 발자국』 『아무 망설임 없이』, 유고시집 『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 등이 있음. 계간 『시인시각』 발행인 역임. 제1회 미네르바작품상 등 수상. 2012년 3월 심장마비로 타계.(향년 46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