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유 시인 / 가랑잎 세상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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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유 시인 / 가랑잎 세상
무심코 썩은 가랑잎 한 장 들추니 그 아래 한 세상이 고스란하다
고물고물고물 뭔가 고물거리고 있다
살고 있다
남의 창구멍 숨구멍 이렇게 왈칵 열어젖혔으니 내가 더 놀라
황급히 가랑잎을 제자리에 놓는다
힘없어서 당한다는 말, 그 심정
썩은 가랑잎 한 장이 퍽 조심스럽다
- <현대시학> 2016년 8월호
박소유 시인 / 노을 끝까지 따라가도 좋으냐고 물어볼걸 그랬지 붉다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데 사랑하기 때문이라면 어떻게 하지 금괴를 온몸에 감고 밀입국하려는 사람처럼 햇빛은 무모하게 갈 데까지 가서는 피투성이 몸을 던지고 두 손으로 한사코 어둠을 밀어내며 시간을 벌어보겠지만 저 붉고 검은 것 한데 뒤엉켜 밀고 당기는 몸부림 시간이 좀 남아 있을 줄 알았는데 눈앞이 캄캄해진다 잡은 손 뿌리치지도 못하고 따라가긴 가는데 어딘지도 모르고 가는 세상의 저쪽 끝까지 가야만 하느냐고 물어볼걸 그랬지
박소유 시인 / 무진객사
어디에도 없는 곳에 매화나무를 심고 짐승 한 마리를 길들이려 했다 꽃은 잠깐이고 아무리 다독거려도 내 사랑은 도무지 사람다워지지 않는데
봄밤은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어야겠다
훗날 내가 향기도 없이 서 있을 때 어디에 짐승 같은 울부짖음이 있었나, 사람들이 의아해 하면 그때 말해도 될까 마음이란 게 어디까지 갔다 올 수 있었는지를……
박소유 시인 / 양떼 저 많은 양들이…… 어미 울음과 새끼 울음이 뒤섞이고 난 뒤에 알았다 울어야만 서로 쳐다본다는 것 멀리서 보면 한 폭 그림 같지만 우리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날마다 울어야 하는 울음의 일가一家 우리도 저 울음에서 벗어난 적 없다 -시집 『너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려고』
박소유 시인 / 어두워서 좋은 지금
처음 엄마라고 불러졌을 때 뒤꿈치를 물린 것같이 섬뜩했다 말갛게 말랑한 것이 평생 나를 따라온다고 생각하니 어디든 도망가고 싶었다 너무 뜨거워서 이리 들었다 저리 놓았다 어쩔 줄 모르다가 나도 모르게 들쳐 업었을 거다
아이는 잘도 자라고 세월은 속절없다 낯가림도 없이 한몸이라고 생각한 건 분명 내 잘못이다. 절대 뒤돌아보지 말라는 말이 복음이었나 앞만 보고 가면 뒤는 저절로 따라오는 지난날인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깜감 무소식이다
그믐이다 어둠은 처음부터 나의 것 바깥으로 휘두르던 손을 더듬더듬 안으로 거두어들였을 때 내가 없어졌다
어둠의 배역이 온전히 달 하나를 키워내는 것, 그것뿐이라면 그래도 좋은가, 지금
박소유 시인 / 울음
단숨에 밤하늘을 두 쪽 내고 튀어 오르는 울음이 있다 누워있던 골목가지 다 따라 솟구친다 몸속에 날선 칼이 있어야만 저렇게 울 수 있을게다 저 울음이 자유로울 동안 모두들 숨죽이고 있어야 한다 어둠도 목덜미 물린 채 꼼짝 못하고 자지러지게 울던 아이도 새파랗게 울던 삐삐주전자도 시도 때도 없이 울던 알람시계도 소리 내지 못한다 울어라 울어 실컷 울어, 고양이만 우는 게 아니다 너도 울고 나도 울지만 한 번도 곁을 주지 않은 울음에는 평생 주인이 없다.
-시집 <어두워서 좋은 지금>에서
박소유 시인 / 사랑이라는 잡화
무슨 신파처럼 사랑에 빠졌다 사랑도 소용없더라. 다 소식이 끊겼다 병을 얻었다 소문만 무성하다 돌아온 친구가 던진 말
아파트 담 밑에 뒤죽박죽 내다버린 수천 가지 물건들 눈여겨보면 다 우리가 쓰던 것이다 그걸 쓰고 버리기 위해 우리는 수천 가지 동작을 썼던 것인데 사랑도 그중에 하나다 제것이 되는 순간 함부로 막 쓰게 되는 잡화 중의 잡화
사람은 가고 사랑이 남거나 사랑은 가고 사람이 남는 불일치의 재활용
어떻게 시작되고 끝이 났는지 쓰레기더미에서 허옇게 칠 벗겨진 저 많은 속살들이 보여주는 건 더 이상 소용없는 한때의 감정
-시집 <너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려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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