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금녀 시인 / 지리산으로 간다 외 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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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금녀 시인 / 지리산으로 간다
가끔씩 그 여자를 찾아간다 서방을 맞이하듯 갓 떠온 생수로 따뜻이 밥을 지어놓아 사철 내가 그리워 하는 여자
밥상 모서리로 뻐꾸기 소리 불러 모으고 칠불사 운판소리와 산나물과 솔가지 냄새로 장단을 쳐주는 여자 이롭지 않은 옛일은 안개와 구름으로 가리워 내색 않는
아무도 보고싶지 않은 날에는 그 여자를 찾아간다 나무들 얼굴을 씻어놓고 노고단 안개길을 햇살로 씻어 내리며 내 젖은 몸의 물기를 말리울 채비를 하는
그 몸에 붙여 키우던 당귀, 도라지, 야생차도 마련해 놓는 어머니 같은 여자 그 여자가 그리운 날에는 먼 길 다섯 시간을 단걸음에 달려간다.
최금녀 시인 / 금연 구역
난 아직도 담배 피우는 남자가 깊이가 있어 보여 60년대 식이라고? 창가에서 고민하며 피우는 극중 미남의 연기장면이 아니라도 회백색 연기가 자욱하게 번지며 허공에 알듯 말듯 그려놓는 갈등의 전말 예사롭지 않게 보여
카페나 어느 한적한 장소 금연 구역에서 조심스럽게 갈등과 마주 앉는 남자에게는 도 닦는 남새가 나 도 닦는다는 것은 곰삭는 일이지 시퍼런 하늘에서 내려치는 천둥 번개 맞아본 사람만 아는
익숙한 솜씨로 불을 당기고 허공에 회백색 연기를 천천히 피워 올리며 삭임질 하는 남자에게서는 말 대신 달관이 연기처럼 피어나 맞아, 60년대 식이야.
최금녀 시인 / 큐피드의 독화살
누군가 내게 말했다 한번 명중되면 그 독이 온몸에 구멍 뚫는다고 목숨 다 하도록 구멍 뚫는다고 큐피드의 화살보다 천 배나 강한 독성으로
그 독화살 맞고 나 지금 방바닥 치고 있다 맹독이 전신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오늘도 피를 쏟아내듯 파지 한 묶음씩 쏟아내며 벌집 같은 구멍 뚫리는 중증의 증상들
꼬리 좌우로 흔들며 구멍 구멍에 까놓은 시의 애벌레들 물 좋은 시여, 천 배의 독화살이여
최금녀 시인 / 슈바빙의 안개비
뮌헨에 가면 전혜린이 생각난다 그의 침묵이 생각난다
카페 한 귀퉁이 칸데라 불빛아래 그녀가 앉아있던 자리에 아직도 지독한 안개는 진을 치고, 내 친구의 언니 오늘 너무 보고 싶어라
뮌헨의 삐걱이는 옥탑방 주홍색 커튼 사이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밤마다 울었다고 죽음의 속삭임이 행복하다고 일기에 적어놓고 안개 속으로 사라진 그녀
찰거머리 같은 슈바빙의 안개비 잠시 지나는 내게 또 속삭이며 다가와 유혹한다
사랑하는그녀의 딸 지금 얼마나 자랐을까.
최금녀 시인 / 서쪽을 보다 우리는 동쪽에 있다 남편은 늘 동쪽 벽에 기대어 앉아 서쪽 벽을 보고 있다 액자 속 인물들은 표정을 바꿀 생각이 없다 40년 된 소철은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도 놀라지 않는다 반가운 적이 없는 기억들이 꽃 진 화분에서 기어 나와 틈새를 찾아다니며 핀다 르누아르의 여자는 그림 속에서도 르누아르를 사랑한다 꼭 하고 싶은 말은 냉동실에 넣어두고 죽음은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매일 정장 차림으로 날씨를 읽는다 서쪽 벽은 늘 춥고 어둡다 바라보는 중이다
최금녀 시인 / 알츠하이머
어느날 부터인가 냉 온수기 앞에서 "충성" 하고 손을 올려 붙이기도 하고 며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귀관은 군번이 몇 번인가?" 묻기도 한다
가족들 벌에 쏘인듯 눈두덩이 퉁퉁 부어올랐다 "원대복귀"를 호령하기도 하고 두 손 번쩍 들고 생포되어가는 일인극을 한다
포연 자욱한 골짜기 후미진 곳에서 날로 치열해지고 있는 작은 아버지의 전쟁을 바라보며 나는 패잔병처럼 뒷걸음질쳐 나왔다 고립무원 골짜기에 그를 혼자 놓아두고
어느 보이지 않는 적의 손에 끌려 돌아오는 길 잃어버린 작은 아버지.
최금녀 시인 / 내 영혼 속에 엎지른 잉크 흔적
포동화 꽃잎은 젊은 날 내 영혼 속에 엎지른 잉크 흔적 같은 것
아무도 모른다 한 다발씩 덩어리로 피어나던 스무 살의 보랏빛 빛의 그물 속에 가두어진 나를
보랏빛 그 문 열고 들어가면 부르지 못한 이름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피고 지던 꽃잎마다 삶과 죽음을 골똘히 새겨 넣던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까
푸르디 푸른 잉크빛으로 영혼 속에 선연하게 남은 내 젊은 날의 포동화 꽃잎들.
최금녀 시인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코크스
석탄을 태우면 코크스가 남았다. 코크스로 밥을 지어 먹으며 코크스가 너무 좋아서 죽으면 코크스나 되었으면 했다. 영도 섬 한국도자기 공장 마당에는 몇천 도의 온도로 도자기를 구워내고 버린 석탄재가 산더미 같았다. 피난민들은 두엄을 헤집으며 벌레를 잡아먹던 시골 닭들처럼 마구 재를 헤집고 코크스를 주웠다. 머리카락에도 얼굴에도 재가 붙었다. 트럭이 와서 새로 붓고 간 재는 손도 댈 수 없는 불덩이였다. 가마에서 나온 불덩이 속을 손이 드나 들었다. 말갛고 고운 물방울이 생겼다.
최금녀 시인 / 흰 종이 앞에 멈추다 오늘 내가 걸을 숫자는 만보 골목이 좋아 그냥 연자매처럼 돌고 돌아
그들은 애인과 함께 앞에서 오고 있다 나는 길을 비키고 흰 종이 앞에 멈추어 10시에 열고 4시에 쉬고 7시에 닫아요, 읽는다
도무지 어렵지만 만보를 걷는 것은 좋은 일이야 시를 쓴 것도 좋은 기억이야 골목을 바꾸지 않은 것도 잘했어 앞에서 또 한 무리가 연장을 들고 오네 임대라고 써 붙인 창문 앞에서 번역이 안 된 문자 앞에서 시를 임대 함, 시인의 인생은?
잠시 멈추었다가 나는 또 길을 비키고 만보를 생각해
아픈 허리에 손을 얹고 내가 걸어야 할 숫자 만보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는 거야
골목이 좋아 그냥 연자매처럼. 계간 『유심』 2023년 겨울호 발표
최금녀 시인 / 주황색과 검은 색의 추억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한다고 향수 대신 한 가방 챙겨온 프랑스를 버린다 고흐를 버린다 사랑을 버린다 젊음이라고 사랑이라고 이름 붙인 그 책 이사 다닐 때 마다 사랑하던 그 빗금 아르르 언덕의 주황색과 검은 색 사랑들 추억들 지금은 다 버리는 때 프랑스를 버린다 내 젊음도 버린다 지금은 다 버리는 때 고흐가 폐지 속으로 가고 있다 버려지는 빗금이여 버려지는 사랑이여 버려지는 프랑스여 안녕 고흐. 반연간지 『미당문학』 2024년 상반기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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