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은희 시인 / 잃어버린 악보 외 6편
|
허은희 시인 / 잃어버린 악보
연민은 사기야 심장도 속일 수 있는 뻔뻔하거나 도가 튼 불완전한 미소
실비아가 테드의 뺨을 물어뜯을 때 이빨에 남겨진 질감으로부터 연민은 시작되었다고 나는 확신해 기타 줄을 일부러 끊어놓은 손가락, 그 굵은 힘줄로부터 너의 연민이 시작된 것처럼
#과 b 사이 어중간한 음계 정확한 소리를 찾지 못하는 불안한 악사 끝내 악보를 찢는 가여운 손가락
흩어져 떠돌아다니는 음 없는 음표들
- 2013년 <다층> 겨울호
허은희 시인 / 누수
고개 숙인 노을이 옵니다. 저 붉은 뺨에 등을 대고 그녀가 재봉틀을 돌립니다. 주머니가 많이 달린 그녀의 옷을 짓습니다. 주머니 속으로 올올이 박히는 밥풀. 해가 뜰 때까지 아궁이를 활짝 열어두는 상상을 하며 밑실을 갈아 끼웁니다. 달달달 마룻바닥이 기침을 합니다.
시침질 한 곳에서 삐죽, 터져 나오는 질문들. 꼬리를 물고 알알이 물음표가 달립니다. 실밥이 미끄러진 자리에 까만 현기증이 핍니다. 오래전에 마주친 손과 발의 추임새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그녀의 잘못이 아닙니다.
시곗바늘이 그리던 둥근 원이 툭툭 끊깁니다. 태엽을 조이는 손가락에 힘이 풀립니다. 액자에 걸린 얼굴들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봅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립니다. 고장 난 물음표처럼 시계추가 멈췄다 서기를 반복합니다.
허은희 시인 / 누가 씹던 껌을 붙여놓았다
오래된 말이 배달됐다 반찬이 하나 늘어 우리는 어금니를 하나씩 더 끼워 넣었다 맷집을 불려 돌아 온 말에 이빨 자국을 덧씌우느라 식사 시간은 길어졌다 만찬은 여럿이 이를 부딪쳐야 제 맛이지 턱을 끄덕이며 부풀어 오른 말의 배를 흘깃거렸지만 누구의 씨앗인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누구라도 상관없을 일이었으니 말똥만 한 눈동자들이 말 위를 구르는 동안 이빨은 부지런히 탬버린을 흔들고
말을 주워 기른 골목엔 귀 세운 발들이 넘쳐났다 바람에 쓸려 실밥이 터진 자리에 눈치 빠른 발은 다른 색의 무늬를 박아주었다 한뎃잠을 자던 말을 끌어다 씻기고 구석방을 내주는 발도 보였다 귀와 입들은 음식을 만들어 방으로 모여들었다 향신료는 매일 달라졌다 그들은 궁금한 것이 많아보였다 드나들 때마다 말의 매무새를 확인하는 데 공을 들였다 말 하나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입을 보탠다는 구역이었다 앓던 말은 금세 살이 올랐다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던 말이 쿡쿡 웃었다 누가 씹던 껌을 붙여 놓았다
허은희 시인 / 묵음
어느 구름에 비 들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종일 목을 꺾어 하늘만 보다가 노아의 방주에서 멈칫하는 건 벗어야 하나 입어야 하나 눈치 를 본다는 거지 여보세요 제발
안과 밖은 극단(劇團)이야
그 벼락은 오지 않을 거라고 몇 번을 말해
허은희 시인 / 알람시계는 편식을 하지 않는다
탯줄을 끊고 나온 후부터 울음을 그칠 줄 모른다. 닳지 않는 배터리를 품고 나왔나 보다. 울어야만 했다. 기저귀가 젖었다고 배가 고프다고 아프다고, 최초의 표정이 울음이었고 울음이 곧 말이었다.
울음보다 말이 더 많아지면서부터는 들키지 않게 우는 것에 익숙해졌다. 때때로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크게 들리는 날엔 귀를 막아버리는 습관이 생겼다. 제 울음소리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매정하다고 눈을 흘기는 표정도 만들어졌다.
지하철 안에는 울음소리로 가득하다.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저마다 들키지 않는 울음을 침묵으로 쓰다듬고 있다. 너도 울고 나도 울고 너도 듣고 나도 듣고 부디. 아는 척 모른 척.
-시집 『열한 번째 밤』 (현대시시인선 167, 2016년)
허은희 시인 / 피치카토 랜덤
삐끗, 이라는 악기. 토르소라 부르기도 하죠. 삐끗, 당신이 내게로 올 때의 걸음새. 사랑이라 부르려면 혀를 깨물어야 하죠. 노래의 성분은 퉁퉁 부은 발목, 짓무른 복숭아뼈, 거미 잔등의 붉은 무늬들. 움직이지 말아요. 노랜 어떤 사랑의 형식, 이를테면 덫. 그러니까 사랑은 구체관절인형 따위완 무관합니다. 눈을 감고 생각하세요. 부러진 뼛조각이 떠다니고 거미가 실을 짜고 단내가 풍기죠. 빈 방 하나를 떠올리셨나요? 당신은 희망적이군요. 뼈와 뼈 사이의 거리를 희망의 처소라 부르기로 해요. 당신의 빈방. 토르소 하나 보내드릴게요. 악사는 없지만 누군가는 그의 두 팔을 대신하고 당신은 입술을 내어줄 수 있겠습니다. 거미가 남았군요. 봉긋한 가슴 사이에 현을 건다면 이내 손가락이 자랄 거예요. 그리하여 삐끗, 당신과 나의 마침내. 그러나 악기인 동안 우린 무언가를 결정합니다.
허은희 시인 / 불치의 서사
한 입으로 여러 말 하기가 식은죽 먹기라지만 식은죽 먹기가 썩 내키지는 않아. 편식이 심한 혀를 달래는 게 쉽지 않거든. 가끔은 뒤통수에 혀를 가두기도 하지
간과 쓸개를 넣어 끓인 차 한 잔 드실래요. 이 잔은 당신의 어깨와 무릎의 위치를 결정할 거예요. 눈을 꼭 감고 삼키세요. 느끼지 마세요. 섣부른 분석은 방아쇠의 방향을 왜곡시킬 수 있습니다
주의사항은 층간소음만큼 친절하지 않아. 깨알같이 소심한 발자국. 건너뛴 문장 하나가 치통을 불러왔다. 발치한 곳에 알약을 끼워 넣고 절뚝이는 발음으로.
제발 눈을 크게 뜨세요
어제가 비로소, 내일 시작된다고 합니다 손을 높이 들고 수천의 입술이 허리를 꺾는다 저절로 접히는 거룩한 무릎들
한 문장에 달린 한 페이지의 각주처럼 양 떼들 우르르 쏟아지는데
당신은 누가 흘린 변명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