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명수 시인 / 동전 한 닢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27. 08:00
김명수 시인 / 동전 한 닢

김명수 시인 / 동전 한 닢

 

 

오늘 낮, 차들이 오고 가는 큰길 버스 정류장에

10원짜리 동전 하나가

길바닥에 떨어져 뒹굴고 있었다

육중한 버스가 멎고 떠날 때

차바퀴에 깔리던 동전 하나

누구 하나 허리 굽혀

줍지도 않던

테두리에 녹이 슨 동전 한 닢

저녁에 집에 오니 석간이 배달되고

그 신문 하단에 1단짜리 기사

눈에 띌 듯 띄지 않던

버스 안내양의 조그만 기사

만원 버스에 시달리던 그 소녀가

승강대에 떨어져 숨졌다는 소식.

 

-(2006년, 2007년 태성고등문학 ) 수록

 

 


 

 

김명수 시인 / 낙과

 

달려 있는 열매와 떨어진 낙과 사이

무심(無心) 흐른다

가지와 바닥 사이

머무는 평정

열매들은 모두에게 한 번의 일생

시간과 자연은 무방하다지만

바람은 이따금씩 태풍이 되고

푸른빛에 붉은빛이 희미하게 지나갔다

아직 못다 익은 과피의 흔적

낙과는 떨어져도

나무 아래 떨어진다

비바람 흔적 찾을 길 없다

낙과가 스스로 비바람이거늘

 

 


 

 

김명수 시인 / 다시 들국화에 부쳐

 

내 마음 다다를 곳 어디 있다면

가을볕 외진 언덕 어느 산자락

들국화 고요히 피는 산자락

그 꽃 홀로 피어나 향기 지니고

그 꽃 홀로 제 향기 지니지 않고

청명도 향기도 서로 물드는

내 마음 다다를 곳 어디 있다면

 

 


 

 

김명수 시인 / 무지개​

아이가 걸어간다

혼자서

어여쁜 꽃신도 함께 간다

이 세상에서 때 묻지 않은 죽음이여

너는 다시 무지개의 칠색으로 살아나는가

아이가 걸어간다

아이가

한밤중 불 같은 머릿속 다 헹구고

간밤의 비바람 폭풍우 다 데리고

오늘은 다소곳이 걸어간다

눈물도 꽃송이도 다 데리고 걸어간다

아가야

네가 남긴 환한 미소

내 가슴에 남겨준 영롱한 기쁨

그런 것 모두 다 한데 모아

오늘은 비 개이고 맑은 언덕

아이가 걸어간다

혼자서

하늘나라로 하늘나라로

무죄의 층계를 밟아 오른다

 

 


 

 

김명수 시인 / 우리나라 꽃들에겐

 

우리나라 꽃들에겐

설운 이름 너무 많다

이를테면 코딱지꽃

앉은뱅이 좁쌀밥꽃

건드리면 끊어질 듯

바람 불면 쓰러질 듯

아, 그러나 그것들

일제히 피어나면

우리는 그날을

새봄이라 믿는다

우리나라 나무들엔

아픈 이름 너무 많다

이를테면 쥐똥나무

똘배나무 지렁쿠나무

모진 산비탈

바위틈에 뿌리 내려

아, 그러나 그것들

새싹 돋아 잎 피우면

얼어붙은 강물 풀려

서러운 봄이 온다

 

 


 

 

김명수 시인 / 발자국

 

 

바닷가 고요한 백사장 위에

발자국 흔적 하나 남아 있었네

파도가 밀려와 그걸 지우네

발자국 흔적 어디로 갔나?

바다가 아늑히 품어 주었네

 

 


 

 

김명수 시인 / 조개무덤

 

 

조개껍데기 조개껍데기, 빈 조개껍데기

썰물 지는 바닷가에 수북히 쌓여있는

진주를 품지 못한 빈 조개껍데기

바닷가 공동묘지에 새로 쓴 무덤 하나

묘비 없는 무덤하나

 

<시와사람> 2003년 겨울호

 

 


 

 

김명수 시인 / 내 오래도록 오르내리는 산길 중턱에

 

 

내 오래도록 오르내리는 산길 중턱에

튼실한 아름드리 참나무가 두어 그루 서 있다오

어느 때는 가끔, 가쁜 숨가라앉혀

나무 곁에 다가가 가만히 걸음 멈춰

두 팔로 나무를 감싸 안아보지요

그리고 부드러운 나무들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인다오

아마도 그런 날은 쓸쓸한 날이거나 우울한 날일게요

또한 그런 날은 가망 없는 기대가

우리를 실망케 한 날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나무를 안아보면

한자리에 뿌리내린 아름드리 참나무는

언제나 변함없이 묵묵하지만

그러나 나는 이따금 느낀다오

마치 우리가 철없던 어린 날 엉뚱한 잘못으로

부모님께 꾸중을 듣고 혼이 났을 때

근엄하면서도 자애롭던, 그리고 언제나

말수가 적으시던 백부나 조부님이

조용히 우리 곁에 다가와 우리 등을 감싸주던 그때 그 순간처럼

내가 나무를 안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나를 안아주는 것이라고

그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평온함을 느끼면서

나무와 내가 한 몸이 되는 순간을 맛본다오

그리하여 나는 꽃피는 봄날, 혹은 가을날

비록 우리네 하루가 덧없이 속절없이 흘러갈지라도

나도 또한 든든한 아름드리나무들로 인하여

새로운 힘을 얻어 세간의 도시로 발걸음을 돌린다오

 

 


 

김명수 시인

1945년 경북 안동 출생. 안동사범학교 졸업. 대구교대 전문학사 학위. 방통대 초등교육학과 학사 학위.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대학원 독어독문학과 문학석사 과정 수학. 197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 1980년 '오늘의 작가상' 수상. 시집 <월식> <하급반 교과서> <피뢰침과 심장> <침엽수 지대> <바다의 눈> <아기는 성이 없고> 등.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1980년에 오늘의 작가상, 1984년 제3회 신동엽창작상과 그 후 만해문학상, 해양문학상 수상. (아동문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