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채민 시인 / 꽃은 길을 멈추고 외 10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27. 08:00
이채민 시인 / 꽃은 길을 멈추고

이채민 시인 / 꽃은 길을 멈추고

만난 적 없는 시인의 부고를 받았다

 

컴퓨터 옆에는

그녀가 남긴 백매도가 펼쳐져 있고

나는 햇볕이 떠나간 시간을

맨발로 밟고 있는데

그 시간 그녀가 죽었다

누구는 죽어라 견디고

누구는 죽도록 사랑하고

누구는 죽음을 껴안고 가던 길을 멈춘다

 

신의 가호가 당도하기 전에

사람들은

시퍼런 이름을 지운다

 

어제 꽃을 피운 매화나무가

오늘 꽃잎을 떨구고

 

어제 서 있던 자들이

오늘 꽃잎 속에 눕는다

 

떠나는 것에 익숙한

아주 잠깐의 우리는

살아서 죽고

죽어서 산다

​​​

-계간 『서정시학』 2022년 봄호 발표

 

 


 

 

이채민 시인 / 백신 보고서 1

 

 

- 코로나 백신을 맞고 죽음을 껴안았던

7일간의 기록이다

 

 21년 8월 18일

 은평구에 있는 지인이 경영하는 제법 큰 정형외과에서 '화이자' 잔여 백신이 있으니 5시까지 오라는 전화를 받고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에 도착해서 접종을 했다. 30분 정도 머물다 가라는 간호사의 말을 듣고 병원 건물 옆에 작지만 잘 꾸며진 공원에서 남편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정확하게 30분이 지나고 헛구역질이 나오며 몸이 휘청거리고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직감했다

 내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 응급실로 들어갔고

 들어서는 순간 이상증세를 알아차린 의료진이 달려오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

 

 링거 줄이 꽂히고

 수액이 들어가고

 심전도 기계가 삑삑거리고

 뇌파검사 기계가 들어오고

 의식은 점점 희미해지고

 잠들면 안 된다는 의사의 말에

 간호사들과 남편이 사방에서 흔들고 때리고 꼬집으며 잠을 깨웠다

 혈압이 200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간호사의 말을 들으며

 점점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첫날의 기억은 거기서 멈췄다

 

 


 

 

이채민 시인 / 백신 보고서 2

 

 

 8월 19일

 눈을 뜨니 새벽 3시

 

 검사 도중 깊은 잠이 들었고

 응급처치 후 병실로 옮겨졌고

 입은 옷 그대로 입원을 한 것이다

 

 오전 8시 회진시간

 친분이 있는 원장님께서 담당의사와 함께 들어오셨다

 

 "우리 병원서 5천여 명이 백신을 맞았는데 처음 있는 사례입니다 빠르게 응급처치를 했기 때문에 고비는 넘긴 것 같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원장님의 환한 미소에 마음이 놓였고

 살았다는 안도감에 눈물이 났고

 놀란 가족들에게 미안했고

 의료진에게 감사했고

 

 멈춰버린 삶의 조각들이 밀려왔다

 

 밤이 되자 다시 열이 오르고

 숨이 가빠졌다

 병실은 긴장감이 흐르고

 주사와 약을 2시간 간격으로 처방하는 의료진의 표정도 어두웠다

 

 다시, 깊은 잠

 

 


 

 

이채민 시인 / 백신 보고서 4

 

 

8월 21일

아침 회진 시간

퇴원은 환자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의사의 말이 이상했다

 

백신 부작용 환자를 처음 치료하는 병원 입장에선

모든 것이 조심스럽다는 의사를 나는 감사하다는 말로 안심시키고

퇴원하는 이상한 선례를 남긴 환자가 되었다.

 

12시에 퇴원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

오후 4시쯤 다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준 타이레놀을 먹고 1시간쯤 지났는데 열은 떨어지지 않고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병원에 전화를 하니 의사는 '심근염'이 의심스러우니

가까운 대학병원 응급실로 가라고 했다

 

처음보다 더 놀란 가슴으로

10분 거리의 한남동 순천향 병원으로 갔다

운전하는 남편이 신호등을 보지 못하고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고

지나가는 앰블런스의 요란한 사이렌이

나를 잡으러 오는 死者의 소리로 들렸다

우린 아무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그 무렵 대학병원은 폭증하는 코로나 환자로

일반 환자는 돌려보내는 상황이었지만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고 코로나 관련 환자로 응급입원을 하게 되었다

 

응급실은 초만원이었고

8월의 응급실은 냉동실 같았고 그만큼 나는 추웠는데

아무것도 덮지 못하게 했다

추워서 얼어 죽을 것 같다고 하니 오히려 입고 있는 옷을 벗으라고 한다

벗을 수 있는 모든 것은 벗어야 했다

 

몇 가지 검사를 하고 병실로 옮겨졌지만

미처 병실이 비워지지 않아 이동식 침대에 누운 채

병실 복도에 물건처럼 놓여 있었다

복도에는 여러 개의 침대가 있었고

환자들의 신음이 간간히 들렸다

 

낙타가 아닌 초록색 조랑말을 타고

페트라의 협곡을 지나고 있었다

나보다 작은 조랑말이 자꾸 넘어지려 했고

나는 내려달라고 소리를 쳤지만

조랑말과 나는 한 몸이었고

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모래알이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몹시 추웠고 그 상황에서 꿈을 꿨다

 

 


 

 

이채민 시인 / 백신 보고서 7

 

 

8월 24일

검사 결과에 큰 이상이 없으니 퇴원을 하고

외래로 오라고 한다

 

위중한 코로나 환자들이 몰려드는 대학병원은

전시사태였고 더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므로

눈에 안대를 하고 한 보따리의 약을 받아 퇴원을 했다

 

7일간의 삶과 죽음의 여정은

그 후

급격한 시력저하와 탈모증세로 이어졌고

입맛까지 잃게 되었다

 

나만의 코로나는 이렇게 마무리 지어졌지만

백신의 후유증은

아직 끝나지 않은 진행형이다

 

- 『미네르바』 2022-봄(85)호

 

 


 

 

이채민 시인 / 손톱

 

 

한 뼘 우주 속의 작은 섬

초대 받지 않았지만 나는 이곳에 있다

내 자리가 없으므로

시간을 긁적거리거나 떠돌아야 했다

꿈이 하나여서 무겁지는 않지만

속이 훤히 보여서

비밀을 넣어두면 뜨끔거렸다

간직해야 하는 비밀이 두꺼워질수록

아픔은 무뎌지고 파도는 순해졌지만

섬은 선홍의 피로 불이 들었다

가끔 바다의 호명을 받으면

가난한 꿈은 하나뿐인 불구의 날개로

파도의 현을 타고 날아다녔다

짓무른 기다림의 오지에서 마냥 서성이는

어느 태양계의 혈통인지

나는 내가 궁금하다

 

 


 

 

이채민 시인 / 엄마야, 동강할미꽃으로 다시 피어라

 

 

저 굳은 천년바위 어디쯤에

한 뼘 이슬의 텃밭이 있어

휘어진 그녀의 생이

저토록 꼿꼿할 수 있을까

석등을 밟고선 저 무량한 행진

을미년 초하룻날

순천향병원 응급실에 들어간

울 엄마 허리,여직 펴지지 않고 있다

홀로 혹한을 건너는

물기마른 그녀의 생에 엎드려

발목까지 내려오는 졸음에 기울다 온다

호흡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우중충한 풍경을 굽고 있는

내 병(病)이 더 깊다

 

 


 

 

이채민 시인 / 아픈 봄 4

-이혜정 시인의 부음에 부쳐

 

 

봄바람이 사납게 불던 날

지구의 창문 하나가 깨졌다

파편이 날아와 살 속에 박힌다

뼛속까지 박힌다

 

지난겨울 몇 가지 검사를 받으러 간

그녀가

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했다

 

예감은 무서운 속력으로 질주했고

잔인한 사월에

우리 모두를 서늘케 했다

 

석촌호수 앞마당과 제주의 바다를 다 팽개치고

그녀는 지금

이쁜 모자 하나 달랑 쓰고

벙글어진 국화에 파묻혀 웃고 있다

 

제주에서 보내준 성게로 미역국을 끓이고

은빛 갈치는 노릇노릇 구워지고있는데

 

빗소리 같은 詩들을 데리고

사나운 바람에 날아가는 그녀

 

아픈 봄이다

 

-『월간문학』 2022-7월(641)호

 

 


 

 

이채민 시인 / 상실의 시간 2

 

 

마치 파혼을 선언하듯

 

왼쪽 팔이 나를 떠나 정물처럼 오만하다

내가 모르는 천 개의 표정을 바꿔가며

낮과 밤의 모든 규칙을 학대한다

 

나의 일부는 살해되었고

억울하고 고독하고

사방이 섬이다

입고 벗는 일마저 격렬하고 날카롭다

 

천국의 입술은 한 발 떨어져 있고

비는 일요일의 눈물을 대신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마지막 유서를 돌돌 말아

나로부터 멀어지는

고독한 손가락에 끼운다

 

나는, 나를 모르는 타자가 되고

 

창틀에 매달린

유품처럼

모든 비를 맞는다

8,760시간이 지나고 있다

 

-시집 『까마득한 연인들』에서

 

 


 

 

이채민 시인 / 정말

 

 

눈 위에 겹겹이 쌓인 편지와 맹세가

아픈 봄을 지나고 사라졌다

 

눈부신 안개꽃다발도 간절한 바램을 망각하고

사과꽃무더기무더기 나비의 방도 녹이 슬었다

 

까보다로까* 땅 끝 절벽에서 나를 감싸 안은 안개가

빛나는 혀를 자르고 지나간다 사라진다

 

표지판을 놓치고

노랑을 상실한 해바라기에서

파란 피가 솟구친다

 

붉은 심장에서

마지막 징후가

새파랗게 쏟아진다

 

*포루투갈의 서쪽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마을

 

 


 

 

이채민 시인 / 슬픔에 관한 짧은 리뷰

 

 

 그을리고 쪼그라진 심장에 물집이 생겼다. 혈관을 뛰어다니던 피들도 제자리걸음이다. 수많은 전쟁에도 끄떡없던 내 안의 교회와 성당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누구의 뼈가 부러졌는지 바람도 나도 많이 휘청거렸다.

 

생의 중심에 고여 있던

너를 비워내는 일이

나무와

돌과

새들이

우는 일과 같다는 것을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채민 시인

1958년 충남 논산 출생. 본명: 이은경.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2004년 ≪미네르바≫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시집 『기다림은 별보다 반짝인다』 『동백을 뒤적이다』 『빛의 뿌리』 『오답으로 출렁이는 저 무성함』 등. 제7회 미네르바작품상과 서정주문학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사무총장 역임. 현재 계간『미네르바』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