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나석중 시인 / 저녁이 슬그머니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27. 08:00
나석중 시인 / 저녁이 슬그머니

나석중 시인 / 저녁이 슬그머니

 

 

어스름을 입은 저녁이 슬그머니 이녁으로 오고

푸르른 봄날 뜬구름에 실려간 황금수틀은 아름다웠네

 

노란색 일색으로 황사에 흐려지는 눈총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꽃다지며 산수유며 수선화 물릴 수 없는 봄은 누구의 봄입니까

 

지난해 바싹 마른 낙엽 한 장이 빈 소리를 굴리는 저녁이 오니

서쪽 하늘을 바라보는 얼굴이 살굿빛으로 물들어도 좋겠습니까

 

이제 오늘을 다독이며 안아줄 수 있는 내일은 없으니

저녁이 슬그머니 와도 후회할 저녁이 아니오니

 

 


 

 

나석중 시인 / 작은 꽃

 

 

이것도 꽃이더냐

간신히 피었다는 생각이 든다

 

포기하지 않고

핀 꽃은 눈물이 난다

 

바늘귀만한 작은 꽃이라고 해서

작은 꽃이 아니다

 

잊지 말라고 눈에 들어박혀서

작은 꽃은 아프다

 

 


 

 

나석중 시인 / 풀꽃 독경

 

 

어제 은꿩다리를 찾아 읽고

오늘은 금꿩다리를 찾아 읽네

야생의 *풀꽃 경(經)에 빠지다 보면

더러 한 끼의 밥때를 놓치는 마당에

외로움이란 감정의 사치에 불과한 것

돌이든 풀꽃이던 시(詩)든

거기에 마음 앗기다 보면

백수 같은 외로움 맞아 놀아날 새 없네

 

강아지풀을 보면

나도 강아지풀이나 되어서

무엇이 좋다고 저렇게 꼬리를 흔들흔들

세상에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싶은데

강아지풀 너도 나를 보면

산으로 들로 쏘다니고 싶은 거냐

 

장마 그치고 바야흐로 가을로 들어섰지만

이제야말로 연애하기 좋은 시절이듯

매미들 시퍼런 소리 갈아대며 극성인데

숲속 오솔길 거침없이 솟아오른

*깨벗은 *무릇 한 쌍이

나를 조금 부끄럽게 하네

 

*. 풀꽃 경 : 길 가다 눈에 띈 풀꽃 이름을 읊조리는 일

*. 깨벗은: '벌거벗은'의 전라도 사투리

*. 무릇 : '꽃무릇'의 준말

 

 


 

 

나석중 시인 / 수석론(壽石論)

 

 

돌 한 점 만남은 필연이다

여기까지 이끼 낄 새 없이 굴러온 돌이 빛난다

이 돌 한 점이 가슴 속에 깊이 박힌 돌 하나 파낸다

수석은 하나님이 퇴고를 마친 시(詩)이다

세상을 둘러보신 하나님이

깊은 슬픔에 빠지실 때 미처 퇴고를 끝내지 못하고

밀어놓은 석편(石篇) 한 권도 있겠지만

수석을 만지다 보면 질긴 목숨의 희열을 느끼나니

작은 돌 속에다 큰 자연을 묻어둔 뜻을 깨치나니

스승이 없는 이 시대에 돌 스승을 만나서

무량겁의 고독을 일깨우는 일, 그것 또한 창조의 기쁨

당신도 그 무량겁의 고요를 일으켜보심이 어떨는지,

그리하여 내가 세 번 허리 굽혀 돌 한 점 들어올리듯

당신도 세 번 찾아가 모신 돌 한 점이

당신이 퇴고를 마친 필생의 시(詩)임을 알 것이니

 

 


 

 

나석중 시인 / 더위가 한풀 꺾였다는 말

 

 

엊그제 모란시장에 가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린 적 있다

사람과 상품과 시끄러운 소리가 요리조리 섞이는 걸 보는 재미로

어릴 적 어머니 꽁무니를 놓치고 지금 내가 무얼 구하러 왔나를 잠시 잊는

그렇게 복작대던 여름 끝에 와서, 더위가 한풀 꺾이었다는 말은

한철 잊힌 외로움이 다시 시작된다는 말

 

홀로 산성을 오르는 길

떡갈나무 숲을 지나 산사의 풍경 소리를 내고 살갗에 와 닿는 이 서늘한 바람은

지금 어디서부터 오는 길인가?

 

불현듯, 더위가 한풀 꺾이었다는 말 속에는

짐승이 살찌고 나무가 마르고 나무 같은 사람도 꾸둑꾸둑 여위어갈 것이니

하염없이

빽빽한 토란잎 그늘에서 기어나온 작은 풀벌레 같을 것이니

 

* 모란시장: 성남에 있는 5일장

 

 


 

 

나석중 시인 / 딸그락딸그락

 

 

 붕ㅡ붕ㅡ

 

 조금 전, 여객선 뱃고동 울리며 넘어간 수평선 끝자락에 아직도 몇 알의 알섬들 풍뎅이같이 가물가물하다.

 

 이도 저도 더 나아가거나 물러설 수 없는 데까지 흘러온 각진 제 몸과 마음이 있다

 

 닦고

 깎고

 용맹정진하고 있는 몽돌밭이 있다

 

 예까지 와서 그들은, 한세상 되는 대로 살고 싶은 생각도 불쑥, 불쑥 나기도 하겠지만, 그때마다 철썩, 철썩 서로 뺨을 때리며 기울어 가는 정신을 깨운다. 일으킨다

 

 내 몸도 기꺼이 거기에 섞이고 싶다 섞이어 온몸 몽그라지고 둥글어지고 싶다

 

 딸그락 딸그락····

 

 


 

 

나석중 시인 / 산수유나무

 

 

시월은 무른 생

젖 먹던 힘까지 보태어

붉게 여물게 하는 달이다

 

요 나란한 열매들을 보면

토끼 눈 치켜뜨고

 

감탄사 연발하던 사람 생각난다

 

잎도 내지 않고

노란 꽃 우산살 펼치어

맨 먼저 봄 소식 전해주던 그,

 

산수유나무,

산수유꽃,

산수유,

 

이 나무에 얽힌

가상한 사연들 오래 듣다 보면

서서도 편히 잠이 오는 나무다

 

 


 

 

나석중 시인 / 마로니에 블루스

 

 

지나놓고 보면

사랑과 이념과 혁명도 불분명하다

 

세상은 수상하지만 역시 대학로에는

사각사각 깨물어먹고 싶었던

실패한 청춘의 달고나가 있다

 

토요일 마로니에공원 15시

은행나무는 가을의 늦은 퇴직서를 쓰지만

자연에 실직이란 이름 없다는 것쯤은 안다

 

나는 솜사탕을 들고 싶고

공갈빵에도 한참 동안 시선을 빼앗기는 것은

잊은 추억을 다시 살고 싶은 걸까

 

재잘거리며 걷는 연인들은 소양강 향어 같고

아이들이 공중을 걷어차는 태권도를 보면

내 휴경기에 들었던 가슴 밭은

파릇파릇 그 무엇으로 싹이 트나니

 

당신의 다크서클은 당신의 깊은 기도

우리는 이미 사랑을 앓을 나이를 지났지만

개밥바라기 스러진 이른 저녁 비로소

맑은 밀월이다

 

 


 

나석중(羅石重) 시인

1938년 전북 김제 출생. 아호: 송재(松齋). 이리농림고등학교 졸업. 2004년 월간 『신문예』 신인상으로 등단. 2005년 시집 『숨소리』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목마른 돌』 『외로움에게 미안하다』 『풀꽃독경』 『물의 혀』 『촉감』 『나는 그대를 쓰네』 『숨소리』. 미니시집(전자) 『추자도 연가』, 디카시집(전자) 『라떼』 『그리움의 거리』. 2019년 성남시문화예술발전기금 수혜. 김제문협 회원.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석맥회(石脈會)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