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영 시인 / 눈 밝은 사자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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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영 시인 / 눈 밝은 사자
1. 고대 테베의 뒷골목에서 눈 먼 새들이 거짓 예언을 지껼여대다 흠씬 두들겨 맞았고 고위 관료는 젊은 정부의 사랑에 눈이 멀었고 눈을 뜬 거지들은 돌에 맞아 죽거나 외곽 문둥병자의 동굴로 쫓겨났다 소나무가 줄지어 선 로마 거리를 절뚝절뚝 걸어가는 외디푸스 붉은 손으로 두 눈을 찔러 눈먼 새가 되어서야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거울은 아무 말이 없다 2. 두 눈을 뜨고 있어도 눈 먼 꽃잎이었네 소림사 동굴에서 벽만 쳐다보던 그 남자는 눈꺼풀을 아에 싹뚝 잘라버렸다, 두 눈이 부리부리한 초상화가 벽만 한 귀퉁이에서 날 노려보고, 나는 그를 뚫어져라 응시한다 자신의 눈은 들여다보지 못하고 타인의 눈만 쳐다보는 한심함...... 거울이 지친 걸레를 닦는다 3. 문득 숨을 헐떡이며 질주하던 외뿔소가 거울 속으로 쳐들어온다 시체처럼 끌려가는 돼지 한 마리 돈을 쫓아 증권거래소를 떠돌다 책가방을 들고 대학의 강단을 오르다가 재즈가 흐르는 코헨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으로 된장국을 만들다가 드르렁 드르렁 코고는 남편 옆구리를 쑤시다가 침대에서 떨어져 짜증을 부리다가 식은 밥을 꾸역꾸역 물에 말아먹다가 거울이 있는 방에서 잠이 든다 너무 오래도록 잠이 들어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르는 잠 안방에 걸린 커다란 눈동자가 나를 깨운다 눈 밝은 사자가 거울 속에서 고함을 친다 거울은 천 개의 귀를 연다 -현대시작품상 추천작-
김혜영 시인 / 거듭난 삶
어디로 가는지 모를 때 하늘 유리창 안개 속이다
내 탓인지 모르고 타인을 향한 탓만 한 못난 죄인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모를 때 쌀을 물고 쥐구멍을 오가듯 눈이 먼 자였다
깨달았네 지금까지 지내온 것도 하나님의 은충
김혜영 시인 / 영사기를 돌리는 배꼽시계
봄이 오는 길목 경우내 숨 죽이다 기지개를 켜는 설중매
삶의 굴곡이 묻어나는 동네 골목길 환한 꽃 등불을 밝힌다
패터슨의 시를 읊으며 한 편의 드라마를 찍는 마을 영화관
망막에 꽂힌 고등어 구이집 배꼽시계가 영사기를 돌린다
김혜영 시인 / 나른한 튤립
사진 액자 안은 회색빛이다 두 개의 튤립 줄기가 서로 목을 끌어안고 빛이 반사되는 서쪽 창가로 올라간다 마주 잡은 두 손이 소곤거린다 가만가만히 달빛에 몸을 말리는 게 어때? 샤워를 끝낸 후 크리스찬 디올 향수를 손목에 뿌린 후 침대 안으로 들어갔어 하나의 침대에 둘이 누웠지만 다른 창을 응시하는 두 개의 꽃이었지 밀린 서류가 축축하게 쌓여만 갔어 태풍이 그녀의 허벅지를 더듬는다 일렁이는 파도 물결이 여러 겹의 레이스 치맛단을 입는다 가느다란 검은 리본에 묶인 다리의 상체는 보이지 않는다 바이올린 연주자의 손끝에서 파르르 파르르 전율하는 소녀의 비명 강간이었는지, 거래였는지, 진부한 사랑이었는지 진홍빛 랩소디가 울려 퍼질 때 사진 액자 안의 튤립이 아리아를 부른다
김혜영 시인 / 순천만의 슬픈 알몸
저 멀리 흑두루미가 날아오른다. 가을이 오면 순천만의 갈대는 울었지. 서녘 하늘에서 밀려온 해무가 바다의 얼굴을 지운다. 얼굴이 사라진 순천만 갯벌에 붉은 노을이 일렁인다. 자라지 않는 소년처럼, 사내는 아내의 거친 맨발을 잃어버렸지. 진흙 바닥에 몸을 부비며 짱뚱어가 갈대 사이를 지나간다. 돈 가방을 사무실에 감추고 불안을 잠재웠지. 가면이 벗겨질 때마다 고함을 질렀지. 사내는 축 처진 어깨로 갈대밭을 따라 걷는다.
강의 목숨이 다하고 바다로 이어지는 해무의 늪
정박할 포구가 사라진 배는 알몸의 슬픈 기억을 더듬는다. 불안한 소년은 침대 끝에서 잠이 든다. 욕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애인을 만지던 손을 씻는다. 마음을 들킬까 두려웠지. 소년은 갈대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렸지. 하늘을 활공하던 흑두루미가 수면으로 내려앉는다. 노을이 지는 순천만에서 물길은 곡선으로 휘어지고 갈대가 흔들린다. 낙천적인 짱뚱어는 진흙 속으로 기어간다. 내일 아침에 식당 주인에게 잡혀갈지라도 짱뚱어는 환하게 웃는다. 숭고한 오늘을 위해!
김혜영 시인 / 나무와 하얀 뱀이 있는 숲
얼음을 주세요 입술에 물집이 부풀고 이마가 뜨거워요 눈 먼 약사처럼 머리카락은 얼굴을 가려요
비늘이 돋아나요 나의 방에서 혀를 날름거리는 하얀 뱀, 혀에 불이 났어요 비밀의 숲은 떠올라요
얼음을 주세요 당신의 숲은 두터운 갑옷을 입고 태양과 싸우지요 오븐의 식빵은 부풀고 제발, 얼음으로 빚은 계절을 데려다줘요
북극성에서 쏟아지는 별똥별
검은 늪에 떠 있는 새
거품으로 변하는 나의 방, 촛불은 꺼주세요 부활은 아직 멀었어요. 꽃의 입술에 뱀의 혀가 닿고, 숲
하얀 뱀을 따라 나의 방에 이슬이 떨어져요, 숲, 숲,
-『부산일보/오늘을 여는 詩』2021.12.28.
김혜영 시인 / 뱀을 그리는 일곱 가지 비밀
반지를 도둑맞았네. 범인의 손을 보았지만 묻지 않았네. 의심이라는 뱀이 자라는 유월, 언니는 숲속으로 걸어갔네. 앗, 뱀이다! 비명 소리에 숲은 어깨를 움츠렸네. 초록 뱀은 덤불로 달아나고 문장을 도둑맞았네. 뱀 꼬리는 행간으로 미끄러지고, 호두나무가 상을 받았네. 자동차 눈매는 사나운 표범을 닮았지. 눈동자는 잃어버린 문장을 찾아 숲으로 떠나고 나비를 액자 바깥으로 날려 보낼까. 천경자는 새들의 입안에서 녹아버렸네. 꿈틀거리는 뱀을 그린 그녀는 그림을 도둑맞았네. 물감을 쏟아버리고 붓을 꺾었네. 그녀는 초록 뱀이 되었네. 벽에 걸린 그녀의 머리에 등꽃이 피어났네. 발자국을 지우는 사막 태양의 분화구처럼 붉게 타버린 심장을 훔치는 유월 의심이라는 뱀이 신성한 숲으로 들어가는 계절 뱀을 그리는 일곱 가지 비밀은 은밀히 전수되고 그림 속 하늘은 고요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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