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언 시인 / 화산(花山)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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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언 시인 / 화산(花山)*
저 사내의 어미는 금가루 목욕의 창시자 한때 백월산 남사 목욕통으로 솔숲이 온통 들끓었다는데요 잘게 부순 황금달빛이 지상을 오래 떠돌다 가끔은 지하상가에 들이치기도 한다는데요 물소리 새로운데 길 잃어 잘 곳 없어라** 계단에 앉아있는 저 사내 난초향 사향 풍기던 여자 생각에 우두커니 구걸 바구니 바라보고 있는데요 한 계단 더 오를까 허리를 더 숙일까 쨍그랑 동전소리 날 때마다 한 병 소주 생각에 두 눈 반짝 빛나는데요 내 청만 들어주시고 누구인지 묻지 마오** 바람 한 조각 들이켜며 허기를 누르는데요 땀내가 사방으로 퍼지는 여름날 저녁 더 잃을 것 없는 마음 아이같이 바닥을 구르는데요 그에게서 금빛물결 일 것 같아 앉은 자리 연꽃이 필 것 같아 길손이 누구인지 묻지 마오** 신발 한 짝 들이밀고서 누군가 배낭을 털어 건네준 담배 반 갑, 사탕 몇 알, 지폐 하나에 깔고 앉은 신문지가 꽃봉오리로 꿈틀거리는데요 백월산 연화대에 오른 꿈속에선 꽃방석 구름을 타고 떠다닐 것만 같은 그날은 보름이었는데요
*화산(花山): 경남 창원시에 있는 백월산의 다른 이름 **『삼국유사』탑상 제4에 나오는 게송 변용
이주언 시인 / 보트피플
희망의 눈꺼풀 열고 안갯속으로 뛰어들었다 사냥개처럼 이빨 드러낸 바다의 내부를 통과한다 몸을 벽에 붙이고 한 꺼풀 속을 살피며 그믐밤에 안도하는 얼굴들 사내가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켜는 순간 아직 불을 켜면 안 돼 물결이 달려와 헤드록을 걸었다 바닥에 쓰러진 손가락이, 비틀 하얀 입술을 흘긴다 쿡, 비웃는 여자의 콩알 가슴 새들이 푸드득 젖꼭지 비틀며 날아들어 모유를 빤다, 쪽쪽 빨수록 뱃가죽이 낮게 울렁거린다 조금만 참으면 돼, 이제 곧 마콘도*에 도착하면 황홀한 일대기가 시작되는 거야 드디어 해안선에 발을 디밀자 해안경비대의 불빛이 다가와 보트피플 표정을 일제히 훑는다 뭐야, 온갖 것들이 다 있잖아 근친과 돼지꼬리와 연금술의 시간들 잠시 배가 휘청거린다 누군가 삽날로 지구의 꺼풀을 열었군 두 주먹이 음모를 꾸민 이래 울울창창 생겨나고 있어 오대양을 휘젓고 다니는 족속 끌려다니는 아이들만 불쌍하지, 안 그래? 지구의 일그러진 입술 열리자 머리에 손을 얹고 와르르 쏟아지는 사람들 이제, 멀미하지 않는 세상인 겁니까?
*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에 나오는 지명
이주언 시인 / 요양 꽃병 속에서
나도 복사꽃 같은 풍경인 적 있었네
침 흘리는 내 입술도 한때 사내의 귓불 뜨겁게 했었지 봉긋한 가슴 열어 어린 것의 입에 물리거나, 기저귀에 퍼질러진 똥내가 아닌 꽃향기 흘리며 사내의 코끝을 자극하기도 했었지
내 속으로 숱한 바람 불어와 닫힌 물관부 건조와 뒤틀림으로 훼손된 몸의 장치들 사이에서 기억이 헛돌고 한낮엔 잠이 쏟아져 날짜를 알 수 없고 혼자 닦지 못하는 배설에도 먹을 것만 떠올리니
사랑을 먹고 싸거나 음식을 먹고 싸거나 목숨들이 게워내는 일상은 매한가지겠지만 병실 침대에 나란히 누운 채 통로 쪽으로 발을 뻗어서 이어가는 목숨들 여기서 먹고 싸는 일은 참혹에 가까워
병에 갇힌 물 바닥이 뿌옇게 드러나는 시간 보호사 눈치보며 검게 말라가는 살거죽
아직 게워내야 할 무엇이 더 남아있는 것인지 생을 바닥낼 수 없어서, 종이꽃 태운 재처럼 가볍게 날아갈 수 없어서 애가 타는 날들이네
이주언 시인 / 북두
나는 빨판이 된 입술로 키스를 한다 먹이를 먹듯 사랑을 흡입하는
칠성장어처럼 일곱 개의 구멍으로 피리를 분다 일곱 개의 구멍으로 빛의 화음을 쏟는다
오선지의 음계를 연주하는 대신 예언의 운지법을 펼친다
사랑을 가장한 몸짓에 내 입술이 가 닿은 건 죽은 자위였다
안녕 내 사랑 네 심장은 검은 바위가 되었구나
밤하늘에 빨판을 대고 달군 송곳으로 몸에 일곱 개의 구멍을 내고
언약의 궤도를 헤엄쳐 폐기된 사랑을 이장해온 칠성판
이주언 시인 / 찢어진 혀 -상남동 밤풍경
헤아린다. 한 발, 두 발, 기어오른다. 미니스커트에서 치솟는 모반, 그곳을 거점으로 수천의 발걸음 지나간다.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밟힌다. 우린 뱃속부터 대가리 치켜든 족속인 걸요. 태연을 가장한 발설은 네온사인을 가장한 어둠이었다. 콜택시에서 씨펄 시집에서도 씨펄 공중을 날아다니는 씨펄. 가랑이 벌려놓은 말, 씨를 퍼나르는 말. 허공 핥으며 두 갈래로 찢어지는 말. 대체 넌 뭐가 될래? 이륙의 깃발 펄럭이는데 깃발 아래 삭신을 들여놓는다. 나뭇가지를 가장한 길이었어요. 승합차 속에 구겨져 허공으로 뻗어가는 길. 다른 행성으로 옮겨가는 길. 피도 안 마른 뱀은 슬픔을 몰라 홍등 아래서 운명을 점쳐보는 밤. 번뜩이는 가윗날이 두려운 밤. 가늘한 탯줄 잡아당길 때마다 떠오르는 기억들. 가장한 웃음이 허공에서 굴절된다. 미끈함을 가장한 두 개의 다리. 버둥거리며 거꾸로 찢어지는 혀. 당신의 늑골을 뽑아 온전한 문장이고 싶어요. 피도 안 마른 유혹이 밟히는 순간 이브의 방안 가득 퍼지는 황홀한 향기. 사내의 눈동자 속에 혀 한 가닥 파르르 떨고 있다.
이주언 시인 / 요양꽃
나도 복사꽃 같은 풍경인 적 있었네
침 흘리는 내 입술도 한때 사내의 귓불 뜨겁게 했었지 봉긋한 가슴 열어 어린 것의 입에 물리고, 기저귀에 퍼질러진 냄새가 아닌 꽃향기 흘리며 사내의 코끝을 자극하기도 했었지
내 속으로 숱한 바람 불어와 닫힌 물관부 건조와 뒤틀림으로 훼손된 몸의 장치들 사이에서 기억이 헛돌고 밤낮이 바뀌고 혼자 닦지 못하는 배설에도 식욕은 떠나지 않아
병실 침대에 나란히 누운 채 통로 쪽으로 발을 뻗어 이어가는 목숨들 요양 꽃병 속에서 끝물의 목숨 게워내는 일은 참혹에 가까워
내 안의 물 바닥이 뿌옇게 드러나는 시간 보호사의 손길 아래 말라가는 살가죽
아직 게워내야 할 무엇이 더 남은 것인지
생이 바닥나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네 소지를 태운 재처럼 나의 생, 가볍게 날려갈 수 있기를 바랄 뿐
-시집 <검은 나비를 봉인하다> 한국문연.
이주언 시인 / 뇌의 지형도
아버지의 뇌가 줄어들고 있다 병원 컴퓨터 화면에 지나온 생의 지도가 펼쳐진다
바람이 다녀간 골짜기엔
휘청거리며 귀가하던 영도 달동네 도깨비불과 밤새 씨름하던 북면 고갯길이 엊그제 일처럼 가까워졌고
오래전에 떠난 사람들이 뇌의 등고선을 따라 걸어 나온다 희미한 연기 속에서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는 듯
병동 바깥 계단에 쭈그려 앉아 혼잣말하며 담배를 피운다
반쯤 남은 꽁초를 문질러 호주머니에 넣을 때 여린 별빛 하나 따라 들어간다
계단은 병실과 장례식장 사이에 있다 어느 쪽으로든 갈 수 있는 아버지
동선을 따라가보면 침대 위에서 아기처럼 환하게 웃는 아버지가 앉아 있다
함박웃음에도 눈물이 고여 울음과 웃음이 뒤섞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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