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소 시인 / 고슴도치선인장 외 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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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소 시인 / 고슴도치선인장
울고 싶을 땐 그냥 울어라 내 딸아
울음을 너무 참으면 네 몸뚱이가 눈물단지로 변한단다 네 영혼이 가시방석으로 변한단다
내 딸아 울고 싶을 땐 그냥 울어라
너무 오래 울음을 참으면 사막과 결혼하게 된단다
-시집 [이것은 바나나가 아니다] (2016)
유지소 시인 / 넝쿨들
네 잘못이 아니야! 시퍼런 탱자의 발목을 문지르며 나는 숙모처럼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시퍼런 탱자의 손목을 잡아 주며 나는 변호사처럼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시퍼런 탱자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며 나는 과학자처럼 말했다
저기요, 아니야가 지금 거기 집에 없나요? 그런데 저기요, 아니야가 누구예요?
탱자는 시퍼런 탱자를 야구공처럼 내던지며 키들키들 웃었다 탱자는 박새를 시퍼런 탱자처럼 울타리 밖으로 내던지며 피식피식 웃었다 탱자처럼 나도 탱자를 떠나고 싶어졌다 나도 탱자의 울타리 밖으로 박새처럼 날아가고 싶어졌다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시퍼런 내 손이 시퍼런 내 손을 감싸 쥐고 엄마처럼 다정하게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나보다 더 시퍼런 하늘이 시퍼런 내 마음을 어루만지며 전문가처럼 단정했다
나는 다시 손을 만들었다 탱자를 위하여 밤에도 낮에도 쉬지 않고 새로운 손을 만들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시퍼런 탱자의 어깨를 쥐어흔들며 나는 영험한 주술사의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네 잘못이 아니야! 시퍼런 탱자의 입을 틀어막으며 나는 노련한 정치가의 공약처럼 소리 질렀다 네 잘못이 아니야! 시퍼런 탱자의 머리를 움켜잡으며 나는 정직한 노동자의 망치처럼 헐떡거렸다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잘 못이 아니야!
탱자의 얼굴이 노랗게 변했다 나는 잘못, 잘못을 훔치지 않았어요 도대체 잘못이 어떻게 생긴 물건입니까?
유지소 시인 / 꽃나무
바람이 분다 또다시 흔들려야겠다
비가 온다 또다시 젖어야겠다
네가 떠난다 또다시 네가 떠난다 이번엔 눈을 감아야겠다
유지소 시인 / 찔레꽃
철책을 따라 걷고 있었다……다시 묻는데 내 죄가 뭐죠? 등 뒤에서 불쑥 누군가가 물었다 뒤돌아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사월의 끝이었고 대낮이었고 얼룩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밤새 훌쩍훌쩍 울던 소쩍새도 조용하였다
가끔 산비둘기 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나는 어렸을 때 저것은 구렁이가 우는 소리다 그렇게 말했었다 나보다 여린 동생은 저것은 귀신이 우는 소리다 그렇게 말하면서 이불을 덮어썼었다 대낮이었고 집에는 어른이 없었고 우는 벌레도 없었다
내 죄가 뭐죠?……말씀해 보세요 누군가 또 말했다 철책에는 사유지라고 쓴 나무 팻말이 걸려 있었다 출입 금지라고 쓴 나무 팻말도 걸려 있었다 지금 여기,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철책 안에 두 기의무덤은 없었다고 칠 것
잊지 말자―비석 밑에 노란 리본을 매어 놓은 것처럼 노란괴불주머니가 만발한 무덤은 없었다. 그렇게 말할 것 감자밭이 있었고 감자밭 둘레에는 옥수수 들깨 고추 호박 그리고 찔레 덤불이 있었다 어떤 찔레꽃은 피고 있었고 어떤 찔레꽃은 지고 있었다
다시 묻겠는데, 내 죄가 뭐죠? 내 죄가 뭐예요? 내 죄가 뭐냐구요?
누구일까 나를 따라 걷고 있는 이 목소리는 방금 내 왼발과 함께 웅덩이에 빠진 이 목소리는 웅덩이에는 어제 내린 비가 고여 있었고 작년에 떨어진 낙엽이 가라앉아 있었고 오늘 떨어진 꽃잎이 몇 개 떠 있었다
음력 사월이었고 음력 사월에는 내 생일이 있었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나는 철책을 따라 걷고 걷고 걷고 있었다 찔레수염 진딧물은 찔레 순을 따라 걷고 걷고 걷고 있었다
유지소 시인 / 배달
검은 원피스, 여자가 걸어온다 맞은편에서 누가 오든 말든 나는 아무런 상관없는데
여자는 505호 멈춰 서서 내 눈치를 살핀다 내 집도 아닌데 내 집 현관문에 오줌을 누다 들킨 개처럼
나는 여자를 쉽게 지나 갈 수 없다 꼭 이런 때 모텔 복도는 진흙 갯벌처럼 변해서 나 두 발을 끌어안고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이건 현실이어서 여자는 어쨌든 내가 보는 앞에서 노크를 해야만 한다
누구세요?
배달 왔습니다.
문이 열리고, 여자가 들어간다 문이 닫히고, 여자가 나오지 않는다
여자가 들고 있던 것이 초콜릿 상자만한 작고 귀여운 핸드백뿐이었으니 여자는 핸드백을 배달하러 왔을 것이다
핸드백을 주문한 남자에게 핸드백의 인간적인 맛과 영양에 대해서 인간을 넘어선 핸드백의 미래 가치와 효용성에 대해서
여자는 더듬더듬, 빠르게 외워대겠지 실수로 빠뜨리고 온 설명서의 기억을 더듬어서
유지소 시인 / 매일 밤 그믐 밤
매일 밤 베개를 끌어안고 말했지
—이젠 돈을 좋아할 거야. 너보다는 돈, 시보다도 돈.
불을 끄고 자리에 누우면 베개가 속삭였지
—이봐, 미련 곰탱이. 돈보다는 돈 크라이, 돈보다는 돈데 보이.
―세드나 vol.5,『풀밭에 버려진 감자처럼』(도서출판 전망, 2020)
유지소 시인 / 썰물
첫눈…… 하는데 첫눈이 온다. 밀물…… 하는데 밀물이 온다. 내 생각은 창문이 너무 많다. 창문이 많은 집은 얼룩도 많다. 등대…… 하는데 등대는 보이지 않는다. 사각의 창틀에는 사각의 유리가, 서른 개의 계단에는 서른 개의 걸음이, 오늘의 일기예보에는 내일의 날씨가. 내가 하는 말을 내가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다. 번개…… 하는데 나비가 날아간다. 나비…… 하는데 천둥이 친다. 모래는 모래를 이해하기 위해 백사장으로 왔는지도 모른다. 물방울은 물방울을 이해하기 위해 바다로 왔는지도 모른다. 하필이면 인생이 가장 작아졌거나 가장 커졌을 때.
오전과 오후, 밤과 낮, 여자와 남자, 차도와 인도, 해와 달…… 너와 나의 이분법들. 안개…… 하는데 꽃이 두근거린다. 구두…… 하는데 총소리가 난다. 3초간의 불안, 3초간의 광기. 검은 해안선에는 얼굴이 없다. 바다와 바닥 사이에서 젖었다 말랐다 젖었다 말랐다 반복하는 작은 갯바위 하나. 꽃은 죽어도 꽃이다.
내 사랑의 수위를 낮춘다. 네 쇄골보다 낮게, 네 명치보다 낮게, 네 배꼽보다 낮게. (콩팥이란 말 참 좋다, 네 콩 팥보다 더 낮게.) 그만하자. 이건 너무 통속적이다. 다시 시작하자, 전략적으로. 너에 대한 내 사랑의 수위를 낮춘다. 네 무릎보다 낮게, 네 발목보다 낮게, (네 노란 생각의 깊이보다 더 깊이.)
거미…… 하는데 한 사람이 서 있다. 말미잘…… 하는데 누군가 쿡쿡 웃는다. 자연은 비밀이 너무 많다. 뻘은 비밀의 글자로 적은 비밀 편지 같다. 한번 빠진 발을 더 깊이 빨아들이는 물컹물컹한 글자들. 너는 너무 쉽게 움직이는 물질이어서, 나는 나를 고정시킬 수가 없다. 홍합처럼 족사(足絲)를 가지고 싶은 이 마음.
이렇게 솔직해도 좋은 것일까, 가령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면. 이렇게 예측 가능해도 괜찮은 것일까, 누군가를 진짜 속여야 한다면. 이렇게 용의주도해도 슬픈 것일까, 결국 그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면.
나는 모른다, 아무것도 몰라서 계속할 수 있다.
유지소 시인 / 새로 세 시, 24시 돼지국밥 집에서
멀리서 보았을 때 그 여자가 철학인 줄 알았다
빨간 스카프 아래 달랑 묶은 머리가 참새 꽁지처럼 까닥까닥거리는 뒤통수하며 바지 밑에 팬티 대신 G컵 브래지어를 입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불룩 튀어나온 엉덩이하며 특히나 그 목소리 빈 소주병에 돌멩이를 넣고 마구 흔들었을 때나 나올 수 있는 그 목소리
철학이 언제 여기 왔지? 천국에서 김밥 마는 걸 그만두었나?
내가 아는 철학은 아이가 셋 남편은 무능한 술주정뱅이 시모는 돈타령만 하는 노파 낮에는 식당에서 일하고 (또한 하루 세끼를 해결하고) 밤에는 모텔에서 일하고 (또한 매일 밤잠을 해결하고)
그 여자는 처음 만나는 누구에게나 그랬었다 언니, 내가 철학을 하잖아 그런데, 철학관이 지금 수리 중이야. 놀면 뭐해, 팔자는 못 고치는 걸!
투헤븐(하늘 끝까지? 하늘에 맹세코?)에서는 이틀만에 쫓겨났다더니 이젠 24시간을 24시 국밥 집에서 해결하기로 했나?
그러나 물통과 물컵과 물수건을 들고 나를 향해 곧장 걸어오는 여자는 철학의 얼굴이 아니었다 어머나, 여기 있었어? 하마터면 내가 아는 척할 뻔한 철학이 아니었다
내가 아는 철학은 순대국밥 허여멀건 국물을 휘휘 저으면 문득 떠올랐다 이내 사라지는 검붉은 순대 같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 접시에서 저 접시로 이 식탁에서 저 식탁으로 하루 종일 옮겨 다닌 양파처럼 테두리가 불분명한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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