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해 시인 /시詩를 버리다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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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해 시인 /시詩를 버리다
쓰레기 종량제 봉투에 담아서 버려야 할 쓰레기 속에 아직 못다 버린 쓰레기 시詩들이 너무 많다 시인들이 쏟아내는 쓰레기 같은 시詩들 아무 의미도 감흥도 생명마저도 갖지 못한 시 한 번도 남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 시 수많은 시인들이 쓴 쓰레기 시詩속에 내가 쓴 쓰레기 시도 포함된다 쓰레기 분리 배출장에 가서도 내가 갖다 버릴 쓰레기 때문에 나는 혼란에 빠진다 시인들이 의미 없이 세상에 쏟아내는 엄청난 분량의 쓰레기 시들, 오, 고민 없는 시인들만의 자기만족 사회! 종량제 봉투 속에 함께 넣어서 버려야 할 저 무의미한 시들 혹독한 겨울이 한세상 지나기까지 한 번쯤 사람들 마음속에 따뜻한 군불마저도 지피지 못했던 시들 쓰레기 분리 배출장에 가서도 버려야 할 저 시詩들 때문에 나는 괴롭다
—시집 『서로 사랑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다』 문학세계사, 2023.
김종해 시인 / 가족
천마산 눈썹 아래 초장동 산비탈이 있고 천마산 코딱지 같은 우리 집이 있고 충무동 푸른 바다가 있고 새벽 별을 보며 생선도가로 내려가는 이모 집이 있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소리치는 외삼촌 집이 있다 이른 새벽부터 우리 집에 와서 해장술에 취한 천마산은 어머니에게 술국을 더 달라 한다 아버지와 형은 말없이 절구에 떡을 치고 누나와 나는 맷돌을 돌린다 콩나물시루에 물 주는 아우가 손을 놓을 때쯤 누더기 같은 우리의 희망이 빨랫줄에 펄럭일 때쯤 천마산은 바람과 안개를 거느리고 넌지시 산을 오른다
김종해 시인 / 시인 선서
시인이여.
절실하지 않고, 원하지 않거든 쓰지 말라.
목마르지 않고, 주리지 않으면 구하지 말라.
스스로 안에서 차오르지 않고 넘치지 않으면 쓰지 말라.
물 흐르듯 바람 불듯 하늘의 뜻과 땅의 뜻을 쫓아가라.
가지지 않고 있지도 않은 것을 다듬지 말라.
세상의 어느 곳에서 그대 시를 주문하더라도
그대의 절실함과 내통하지 않으면 응하지 말라.
그 주문에 의하여 시인이 시를 쓰고 시 배달을 한들 그것은 이미 곧 썩을 지푸라기 시詩이며, 거짓말 시詩가 아니냐.
시인이여, 시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대의 심연을 거치고 그대의 혼에 인각된 말씀이거늘, 치열한 장인의식 없이는 쓰지 말라.
시인이여, 시여, 그대는 이 지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위안하고 보다 높은 쪽으로 솟구치게 하는 가장 정직한 노래여야 한다.
온 세상이 권력의 전횡專橫에 눌려 핍박받을지라도 그대의 칼날 같은 저항과 충언을 숨기지 말라.
민주와 자유가 억압당하고, 한 시대와 사회가 말문을 잃어버릴지라도 시인이여, 그대는 어둠을 거쳐서 한 시대의 새벽이 다시 오는 진리를 깨우치게 하라.
그대는 외로운 이, 가난한 이, 그늘진 이, 핍박받는 이, 영원 쪽에 서서 일하는 이의 맹우盟友여야 한다.
김종해 시인 / 별똥별
공구가 죽은 얼마 뒤 청산가리를 먹고 구짱이 죽고 우리들의 대장 만출이 녀석도 세상을 떴다
우리는 그 녀석들이 사라진 하늘에 방패연을 띄웠다 천마산은 곤충들을 보내어 우리를 위로하였으나 초또패의 잔당인 우리는 풀이 죽었고 곡정패는 더 이상 공격해 오지 않았다
유난히 달 밝은 날 밤에는 구짱의 하모니카 소리가 대나무숲에서 우리를 불렀고 그런 날 밤이면 나는 똥을 누고 싶었다
가위에 눌린 채 어머니를 깨우고 옥수수밭에 쪼그리고 앉으면 녀석들은 별똥별로 나타나 긴 옥수수 잎사귀로 내 등을 찔렀다
똥은 나오지 않고 앉은 채로 걸음을 옮기면 녀석들은 또 별똥별로 따라왔다가 멀리 구덕산 쪽으로 차르르 흘렀다
김종해 시인 / 서정시인 허페즈의 무덤을 밤에 찾아가다
페르시아에서 가장 사랑받는 서정시인 허페즈의 무덤은 그의 고향 시라즈에 있다 허페즈 공원 안에 안치된 그의 유해는 14세기의 대리석 관 안에 그대로 누워 모든 페르시아 영혼들의 사랑을 받는다 여름밤에 그의 무덤을 찾아가서 경배했는데 히잡을 쓴 젊은 여성들이 그의 관에 기대어 허페즈 시집을 읽고 있다 부러워라 사랑과 평화와 안식의 아름다움 이란 사람들은 누구나 허페즈를 사랑한다 이란 사람들의 집집마다 서가에 꽂혀있는 두 권의 책 한 권은 코란 한 권은 허페즈 시집 올해의 운수, 그날의 길흉을 점치려면 파랑새 점을 쳐보세요 새장 안에서 새가 물고 나온 점괘에는 이란 시성 허페즈의 시 한 구절이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길을 환하게 안내한다
김종해 시인 / 잔치국수
어머니 손맛이 밴 잔치국수를 찾아 이즈음도 재래시장 곳곳을 뒤진다 굶을 때가 많았던 어린 시절 그릇에 담긴 국수면발과 가득 찬 멸치육수까지 다 마시면
어느새 배부르고 든든한 잔치국수 굶어본 사람은 안다 잔치국수 한 그릇을 먹으면 잔칫집보다 넉넉하고 든든하다 잔치국수 한 그릇은 세상을 행복하게 한다
갓 삶아 무쳐낸 부추나 시금치나물, 혹은 아무렇게나 썰어놓은 김장김치 고명 위에 어머니 손맛이 밴 양념장을 끼얹으면 젓가락에 감기는 국수면발이 입 안에 머물 틈도 없이
목구멍을 즐겁게 한다 아직 귀가하지 않은 식구를 위해 대나무 소쿠리엔 밥보자기를 씌운 잔치국수 다발 양은솥에는 아직도 멸치육수가 뜨겁다
김종해 시인 / 따뜻한 지폐
원효로 옛 전차 종점 부근의, 원효로 4가 5번지, 박목월 선생님이 이승을 떠날 때까지 사시던 지번地番 주소지. 추석이나 설날 명절 때가 아닌 시협詩協 일로 혹은 시詩 월간지 《심상心象》 일로 선생님이 자주 나를 불러들이던 선생님의 서재. 대문 밖에서 초인종을 누르면 철문이 철컥 열리고 사모님이 다급하게 신발을 끌며 나오셔서 “김 선생, 오늘은 정치 이야기하지 말아요.” 선생님의 지병인 고혈압 때문에 나는 선생님 앞에서 시국 이야기를 할 수도 없다. 시협 일과 《심상心象》지의 진행 상황만 브리핑해 드린다. 나는 선생님을 사랑하지만 선생님의 고혈압을 걱정해서 젊은 시인이 생각하는 정치 현실 이야기를 할 수조차 없다. 사모님이 차려주시는 저녁 식사를 끝내고, 선생님께 인사드리고 현관 바깥 감나무를 지나 철문 앞까지 걸어 나오면 사모님이 내 옷 주머니에 찔러 넣어주시던 따뜻한 지폐 몇 장, 청량리 지나 상계동 변두리 끝까지 타고 갈 수 있는 택시비. 끝끝내 거절하지 못한 따뜻한 지폐 몇 장. 철문 담장 위에는 아아, 밝고 환한 달이 떠서 세상을 비추던 날도 있었다.
— 『서로 사랑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다』, 문학세계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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