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박제영 시인 / 개밥그릇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29. 08:00
박제영 시인 / 개밥그릇

박제영 시인 / 개밥그릇

 

 

시는 개밥그릇이니

개밥그릇이라 먹다 남은 찬밥이 대부분이니

산해진미山海珍味를 기대하지 마시라

그렇다고 야박하다 타박하지는 마시라

그 밥 채우는 마음만은

어미가 자식 밥 챙기듯 곡진하다

그러니 사양하지 말고 드시라

비록 개밥그릇이지만 그 한 그릇으로

당신의 허기를 조금이라도 면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물론

개밥그릇이니 발로 차버린들

당신을 탓하진 않을 것이다

 

 


 

 

박제영 시인 / 여보, 우리

 

 

사랑이라는 말

한 사람에게 한 사람의 일생을 거는 일, 그것이 사랑이란 걸

영원이라는 말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를 영원히 사랑할 수는 없다는 걸

이제야 알겠네

 

그러니 여보, 우리

살아 있는 동안만 사랑하자

사랑하는 동안만 살아 있자

그렇게만 살다 가자

 

사랑 없이 사는 일은 얼마나 궁색한 일이냐고

죽은 뒤의 사랑은 또 얼마나 쓸쓸한 일이냐고

되뇌다가 되묻다가 되새기느니

 

여보, 우리

사랑이란, 그러므로 얼마나 절박한 일이냐

 

 


 

 

박제영 시인 / 늙은 거미

 

 

 늙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 당신, 늙은 거문개똥거미가 마른 항문으로 거미줄을 뽑아내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당신, 늙은 암컷 거문 개똥거미가 제 마지막 거미줄 위에 맺힌 이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당신, 죽은 할머니가 그러셨지 아가, 거미는 제 뱃속의 내장을 뽑아서 거미줄을 만드는 거란다 그 거미줄로 새끼들 집도 짓고 새끼들 먹이도 잡는 거란다 그렇게 새끼 들 다 키우면 내장이란 내장은 다 빠져나가고 거죽만 남는 것이지 새끼들 다 떠나보낸 늙은 거미가 마지막 남은 한 올 내장을 꺼내 거미줄 치고 있다면 아가, 그건 늙은 거미가 제 수의를 짓고 있는 거란다 그건 늙은 거미가 제 자신을 위해 만드는 처음이자 마지막 거미줄이란다 거미는 그렇게 살다 가는 거야 할머니가 검은 똥을 쌌던 그해 여름, 할머니는 늙은 거미처럼 제 거미줄을 치고 있었지 늙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 당신

 

 


 

 

박제영 시인 / 시 좀 봐달랬더니

 

 

여섯 번째 시집을 준비하면서

교정 좀 봐달라고 했더니

며칠 후 반으로 접은 쪽지를 쥐여주는 거다

나중에 혼자 있을 때 보란다

 

당신 시 읽는 게 무척 힘이 드네

그 사이 많이 시들고, 궁상도 많이 늘었네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 줄 왜 몰랐을까

교정보다 위로가 필요한 내 남편

당신 덕분에 우리 식구

지금까지 잘 살아왔으니까

자책하지 말고 힘내요

 

시 좀 봐달랬더니

엉뚱한 것만 보고 있는

참말로

얄궂은 당신

당신 때문에 시도 못 쓰겠다

 

 


 

 

박제영 시인 / 작약

 

 

구례 촌놈이 서울놈들 변호를 하고 있으니

'이만 하면 출세한 건데

가슴팍은 왜 맨날 지랄맞은지 모르겠다

꽃이나 심어야지

산수유 핀 고향으로 돌아가야지

술만 걸치면 그놈의 꽃을 입에 달고 살던 덕구형

 

그해 유월이었나

아내와 딸을 꺾어버린 뺑소니범을 찾겠다며

덕구형이 사무실을 닫고 훌쩍 자취를 감췄던 게

 

오년 만에 편지가 왔다

봉투 속엔 달랑 사진 한 장뿐이다.

-유월에 구례 한번 내려와라 작약 보러 와라

색시도 새로 구하고 덤으로 예쁜 딸도 하나 얻었다

작약 밭에서 덕구형이 웃고 있다

작약 같은 몽고 여자와 산수유 같은 이국의 소녀가

함박 함박 웃고 있다

 

 


 

 

박제영 시인 / 내 젖이 참젖이여

 

 

횡계사거리 국밥집 두 아지매

부산에서 어찌어찌 흘러서 이곳 횡계까지 왔는데

고향붙이라고 언니동생으로 산 게 이십 년이라

어찌나 서로 살가운지

친자매도 그런 친자매 없고

부부도 그런 부부 없는 기라

과부 아지매들 입심은 또 얼매나 찰진지

국밥보다 두 아지매 이바구 들으러 갈 때도 있어야

어제 낮에도 그랴

국밥 하나 말아갖고 와서는

아고 동상, 궁상맞게 혼자 먹어서야 쓰나

두 아지매 떡 하니 밥상머리에 앉더라구

아예 내 국밥을 안주 삼아 주거니 받거니

소주 세 병을 게 눈 감추듯 해치우더니

불쾌해진 두 아지매 그러는 거 아니겠어

동상, 오늘 함 주까?

동상, 그라믄 내도 주께

저년 젖은 물젖이니까 보도 말어 쪼매해도 내 젖이 참젖이다 안카나

백주대낮에 두 아지매 젖을 훌러덩 까보이는데

환장하겠더라고

암만? 정히 못 믿겠거든 횡계사거리 국밥집 가보더라고

 

 


 

 

박제영 시인 / 해바라기

 

 

 일년 중 가장 뜨거운 날, 하루 중 가장 뜨거운 시각, 언제나 그 순간이었어

 

 빛은 산란을 일으키고 신기루인양 당신을 보았지 사랑을 찾아 우, 우, 숲과 초원을 헤매고 있더군 동굴 속 마녀가 비밀을 말해주는 것도 보았어 "기린아, 네 사랑은 숲 너머에 있구나" 숲의 덩굴이 너무 높았던 당신은 모가지를 늘이고 늘였지 우, 우, 울음은 끝내 삭정이가 되고 불이 되고 불꽃이 타올라 활 활

 

 오, 해바라기

 당신의 가늘고 긴 목을 사랑해

 덩굴너머 노랗게 타오르는 그, 가늘고 긴

 

 


 

 

박제영 시인 / 詩집 밖의 詩人들은 얼마나 詩답잖은지

 

 

 詩인 김연숙이 전화로 시방 詩인 문혜진이 옆에 있다고 인사동 무슨무슨 술집으로 오라고 해서 물어물어 갔는데 마침 詩인 박정대가 소월詩문학상을 받은 날이라 뒤풀이를 하고 있던 모양인데 워낙에 詩(집)밖에서 詩人들 만나는 일을 꺼렸던 터라 갑작스레 모詩인모모詩인 詩人떼를 맞닥치고보니 당황스럽기 그지 없었지만 저쪽 구석에서 그래도 친한 詩인 김연숙이 손을 들어주고 그 옆에 보고싶던 詩인 문혜진하고 고영민도 앉았길래 그 옆 한자리 슬그머니 끼어 잠시 조용히 있다 갈려고 한 것인데 詩인 김연숙이 생뚱맞게 상받고 뒤풀이하는 자린데 주인공한테 가서 술 한 잔 권하는 게 좋지 않겠냐 떠미는 바람에 기왕지사 언죽번죽 "나 박제영인데 축하합니다 술 한 잔 받으소" 했던 건데 詩인 박정대 앞에 앉았던 詩인 김상미가 "당신이 박제영인가, 푸른... 뭐라던가 썼던" 하고 거드는 탓에 건넸던 술잔만 머쓱해지고 한 술 더떠 그 옆의 詩인 박완호가 "그 친구 정대형 학교 후배요 고대" 하고 거드는데 詩인 박정대는 뜬금없이 "난 고대가 아니고 정대야" 하는 통에 이거야 원 멀뚱멀뚱 난감하고 계면쩍어 다시 슬며시 詩인 고영민 옆 자리에 앉았다가 지며리 생각해봐도 詩집 밖의 詩人들은 얼마나 詩답잖은지

  

 


 

박제영 시인

1966년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 1992년 《시문학》을 통해 등단. 1990년 고대문화상 시부문 수상. 2015년 제1회 공간시낭독회 문학상. 시집 『소통을 위한, 나와 당신의』 『뜻밖에』 『식구』 『푸르른 소멸』. 현재 '빈터'의 동인. a4 동인. 한국작가회의 회원. 현재 달아실출판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