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숙 시인 / 목련의 서정(抒情)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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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숙 시인 / 목련의 서정(抒情)
최루성이 심한 날들이여
목련이 진다.
한 세계의 조롱을 열고 하얀 울음들이 사락사락 떨어져내린다.
네 울음의 영토는 어디까지 퍼져나가는가
네 눈물의 안쪽이 궁금한 건 이 세계가 참담과 망각의 페이지로 한 장 한 장 찢겨나가기 때문이리.
일그러지고 널브러지면서 걸어온 길 위에서 너는 잿빛 날개로 대지를 변주한다.
한 잎의 스러짐에 너의 등잔이 빛나고 한 잎의 그리움에 나의 미추(尾椎)가 습하다.
추락의 깊이와 넓이를 너는 아는가
오늘 우주의 조롱은 스산하고 나는 너의 서정(抒情)에 점점 무뎌지기만 하는데
나는 언제까지 이 대지에 남겨질 것인가
시간의 태엽은 부질없이 감기고 나는 겁 없이 햇발을 구걸하며 눈물의 바깥을 골몰한다.
빛의 주발 속에서 매일 내가 의미없이 발굴될 때 너의 중심이 바깥에게 꽃말을 음유(吟遊)할 때
창백한 네 입술의 연가(戀歌)는 순결한 처녀처럼 대지에 바쳐진다.
너의 마지막 노래에 취한 바다를 사는 이 봄날, 나는 불멸의 꿈으로 끝없이 몰두하는데
연애와 식욕은 왜 향기가 없는 것일까
몰락은 왜 중독으로 치닫는 것일까
네 눈동자들이 마지막 조문(弔文)으로 달려오고 바람과 구름이 그것들을 곡해한다.
누가 우리를 이 우주에 신탁했을까
너의 서정이 아프게 아프게 요절하는 이 봄날,
그러나 끝내 인생은 읽히지 않는다.
정원숙 시인 / 막창
여름날 저물녘 소막창 구이집 빈 화덕 위 두 노인이 장기를 두고 있다. 벌겋게 달아오른 숯불처럼 장기 두는 소리 허공으로 탁탁 튕겨오른다.
한 노인이 부채를 부친다. 붉은 갓등이 도리질을 한다. 다른 노인은 장기알을 만지작거리며 담배 연기를 뿜어댄다. 구불구불한 연기가 한 줄기 길을 낸다.
옆 화덕 중년 사내 둘 때절은 전대를 두른 주인 여자의 쇠철판 위 손놀림을 무심히 바라본다. 쇠철판 위의 소막창, 구절양장 생의 길이 몸을 뒤틀기 시작한다.
숯불에 구워지는 저 길 끝엔 막장 같은 또다른 막창이 있다. 구릿빛으로 그을린 막창이 두 새내의 입속으로 들어간다. 모질게 씹히는 막창의 몸뚱어리 두 노인은 태연히 장기판을 노려보고 있다.
삶이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듯 나는 두 노인의 생의 판세를 알지 못한다. 개 한 마리 화덕 밑에 코를 박는다. 주인 여자 소리치며 개에게 발길질을 한다. 두 노인은 신중하게 장기를 둔다. 소걸음처럼 무겁고 단호한 삶이 장기판 위를 걸어간다. 막창 타는 냄새 매캐한 저녁 공기를 부채살이 서쪽으로 쓸어넘기고 있다.
정원숙 시인 / 월요일
침묵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귀에서 입으로 가는 길은 짧았다. 당신은 말했다. A급은 스페셜이고 질이 좋아. B급은 거짓 낭만이고 소설의 끝처럼 씁쓸하지. 길 위 꽃을 꺽어 방을 장식했다. 보이지 않는 향기가 시간을 왜곡했다. 노래는 아무것도 건설하지 못했지만 B급 세상을 적셨다. 내겐 정전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들을 것이다. 결코 나는 발설되지 않을 것이다. 서정의 방식으로, 거짓 낭만이 비에 젖고 있었다. 불멸의 방식으로, 보도블록이 장맛비에 부서지고 있었다. 향기와 시간이 걸어간 길을 따라 길이 흘렀다. 월요일은 모레일 수도, 영원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도살장으로 향하는 돼지들의 엉덩이가 보석처럼 빛났다. 입에서 항문으로 가는 길은 짧지 않았다. 아침이면 걸레 같은 태양이 떠올랐다.
-시집 <수요일의 텍스트>에서
정원숙 시인 / 별
그대는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 죽어 그 가슴의 열(熱)로 불을 당겨 맑디맑은 창문마다 들려주는 저번 생의 이야기입니다.
그대는, 그 이야기에서 풀려나오는 비애 몇 자락 위로 흘리는 눈물방울과 여행자의 젖은 발자국입니다.
또 그대는, 낮은 초가지붕 굴뚝의 연기를 따라 펼쳐지는 길, 그 길 위 수많은 얼굴들과 모래알들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리고, 태양과 달빛의 사구를 넘어 사막의 길을 가는 쌍봉낙타 한 마리와 길을 잃은 거친 호흡입니다.
그대는, 생사의 길 위 낙타의 짱봉에서 솟구치는 샘물과 삶이 죽음을 부둥켜안고 기어코 터뜨리는 울음입니다.
정원숙 시인 / 해변의 카프카가 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
밀레나, 나의 밀레나, 이곳의 바람엔 비릿한 아카시아 냄새가 배어 있다오. 빗방울 떨어지는 해변의 묘지에는 포도나무 일가 당신 종아리처럼 말라가고 있소. 이곳 수도원은 황혼의 물결 사붓사붓 풀어지고 수평선 끝자락 먼 고장의 발전소 불빛들, 당신께로 향하는 내 사랑의 발전기를 힘차게 돌리고 있다오. 그리하여 저 붉은 황혼은 새들이 당신의 나라로 실어나르는 내 피인 것이오.
뱃고동 울릴 때마다 맨발로 달려나가 선착장에 서면 내 눈동자 속에서 부서지며 사라지는 하얀 포말들. 이 편지지 위의 얼룩들은 내가 흘린 눈물이 아니라 당신께로 달려가는 긴 호흡들이라오. 막막한 눈동자들이라오. 이 순간에도 새들은 어느 식물의 팔을 베고 잠들어 있소? 이곳 사람들의 눈빛에 일렁이는 낯선 적의는 어느 바다에서 건져올린 그늘의 무게란 말이오?
이 비 그치면 바닷길 너그럽게 품을 펼쳐주고 구름을 거느린 빗방울 식솔들 먼 국경 너머로 잠행할 것이오. 당신이 수용소 바닥에서 웅크리고 잠든 지금, 내가 자정의 해변을 불침번 서고 있는 까닭은 당신의 열정으로 내 죽음의 시간을 끝없이 유보하기 때문이오. 물결이 물결을 밀고 오는 이 그리움의 시간 우리의 사랑은 황혼기를 맞아 클클거리고 지금 물의 결이 목선을 흔드는 것은 연약한 당신의 영혼을 잠재우기 위해 자장자장 흥얼거리는 바다의 음악들이오.
간혹 폭풍을 앞세워 불어오는 북쪽의 전갈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소. 우리가 함께 바라보았던 세계의 창들은 빛을 잃어가지만 이 빗줄기 뚫고 이 폭풍 건너 바다 속으로 걸어들어가면 우리의 전부였던 자유가 기필코 펼쳐질 것이오. 밀레나, 이제 새벽이 오면 수평선 위로 붉은 피를 뿜어대는 태양이 되고 싶소. 불멸로 다가가기 위해 나의 죽음도 당신의 죽음도 바다로 모두 흘려보낼 것이오. 치욕처럼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정원숙 시인 / 철도원
그것이 내 속에 머물러 있어서 아마 열 두 개의 달을 떠나보낸 뒤였을 것이다. 가을이 들창을 서성이고 여섯 량의 객차가 낡은 침목을 꼼꼼이 읽어나가고 있었다. 백태가 백파白波로 밀려들어 어리석은 질문을 청종했다. 세계를 연모할수록 삶은 누추한 관을 벗고 전대를 두른 채 어디로 바삐 떠나려 했던가
그것이 내 속을 헤집고 있어서 아마 두 쌍의 이별과 별똥별을 두렁에 파묻고 난 뒤였을 것이다. 가을은 늦은 노을을 데리고 멀리까지 마중나오고 다섯 량의 객차가 낡은 침목을 천천히 짚어나갔다. 그 뒤엔 세 량의 객차가 삐걱이는 철로를 탁류처럼 흘러갔던가
하얀 물결 일렁이는 내 눈 밖으로 푸른 눈이 나리는 겨울이 두 량의 객차에 실려 철로 위로 내려섰다. 수천 개의 다리를 가진 이매魑魅들이 내 몸을 꽁꽁 묶어 오도가도 못할 때였다. 장미와 시계는 설산을 오르내리고 한 량만 남은 객차는 눈 쌓인 철로 위에서 쓰디쓴 낭만을 추억했다.
누군가 새로운 역사驛舍가 들어설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머나먼 세상의 이야기일 뿐이었지만 다만 이 대륙의 백치들을 끌어안은 쓸쓸한 마지막 객차 하나 내 눈에 오도카니 붙들려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얼어붙은 침목과 어지러운 내 침묵이 날마다 눈부신 설원에 차려지고 있었다.
정원숙 시인 / 고독한 독도 -청춘 연가(戀歌)
1. 청춘 역사(驛舍)
우연히 들른 <多多>
광화문 한복판 비좁고 삐걱거리는 목조계단을 밟고 들어서자 청명하게 울리는 종소리 검은 옷의 주인 언니 여전히 주근깨 송송 미소로 반겨주는 내 청춘 역사(驛舍) 술에 취한 이문재 선생님과 시벗들과 함께
팝콘이 파르르 떨려오는 추억의 목울대에 걸리고 콧날이 시큰거리고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해서 소슬소슬 쓸쓸한 이슬비는 내리고 너의 침묵 콘드라베이스 음계로 낮게 깔리는데 너의 이름을 잊기 위해 애쓰던 날들과 너 있는 어느 항구도시 밤 등불이 새어나오는 오래된 전축 불빛
이십대의 청춘 역사 <多多>
뒤늦은 안부를 물어오는 주인 언니 주름살 깊게 패일 때 깜빡거리는 촛불 사이로 걸어오는 그리운 너의 실루엣 취하기 위해 청춘 역사의 시계바늘을 현재로 되돌리기 위해 술잔을 들며 흔들거리는 내 눈동자
그렇게 너의 이름을 나는 잊었다
망각도 추억의 일부라고 등 두들겨주는 화장실 백열등 매미처럼 속으로 속으로 울음을 삼키는 목조 계단
2. 청춘 만彎
겨울, 경포대
아무것도 손에 쥘 수 없는 마음으로 찾아든 <소망> 민박 여장을 풀고 바닷가로 나가자 노을이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파도는 너 있는 항구도시의 부유물을 해변가에 실어나르고
그렇게 너의 이름을 나는 잊었다
토해낼 울음이 많아서가 아니다 그저 너 있는 항구도시의 공기를 마시고 싶어 심호흡을 하고 또 하는
이십대의 청춘 만(彎) <경포대> 폐 속 깊이 밀려들어오는 노을빛 연서(戀書) 저물녘 파도는 치유의 힘 희망을 연주하는 부드러운 손길
그리고 그렇게 저문 해변가에 앉아 캔 맥주 세 개를 추억의 정수리에 부었다
3. 고독한 독도
달래가 지천으로 피어나고 미나리가 흐벅지게 몸 푸는 곳 섬과 섬 사이 고독하게 숨죽이며 밤마다 자줏빛 달을 순산(順産)하는 섬
내 생의 마지막 역사(驛舍)
굴을 따고 소라를 잡고 바지락을 캐고 늦은 저녁상에 앉으면 횡경막을 텅텅 두드리는 청춘 노래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피고 또 지는 꽃잎처럼 달 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연가가 슬퍼라
그렇게 너의 이름을 나는 잊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자꾸 솟아오르는 잡초를 뽑아올려도 꽃잎은 시들고 남는 것은 청춘의 부장품들뿐
내 마음의 고독한 독도 <자월도>
자궁을 삼켜버린 바다
너는 그곳 어디쯤에서 엄마 없는 아기들과 함께 푸른 인광으로 빛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바위에 앉아 달무리치마를 뒤집어쓰고 어느 항구도시, 너 있는 별자리를 향해 몸을 던지고 또 던지며
그렇게 너의 이름을 나는 잊었다
내 마음의 고독한 독도(獨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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