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행은 시인 / 잠들지 않는 길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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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행은 시인 / 잠들지 않는 길
햄을 썰다가 동글, 동글동글 감자를 썰다가 동글, 동글동글 굴러가면 모두가 길이 되지
나무도 제 안에 바퀴를 달고서 동글동글 흔들리며 멀리까지 길을 뻗지 늘 싱싱하게 뻗어가도 되돌아오는 길
나뭇가지 동글동글 나이테를 키우고 허공도 동그랗게 문을 열어 주는 때 공중은 동글동글 날개를 접어서 동글동글 동그랗게 새들의 길을 품지
압화되는 발자국을 따라 들어간 길이 동글동글 동그란 우리의 한 때가, 동그랗게 길을 내는 알타미라 동굴에서 신비한 말言들로 동그란 춤을 추지
동글동글 동그랗게 40만 년 전으로 싱싱하게 풀이 돋는 인간의 이전으로 나선형의 길을 내는 잠들지 않는 길
오늘은 동글동글 양파를 썰어서 동그랗고 매콤하게 저녁 길을 만들지 길과 함께 길을 먹는 달콤한 저녁식사 길과 함께 길을 내는 매콤한 저녁식사
권행은 시인 / 관절염
3월에도 시린 밤을 짚으며 눈이 온다 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눈이불을 덮은 듯 바깥이 환하다 숲이 하얗게 얼고 있다
눈꽃에 덮인 나무들은 툭툭 불거지는 꽃눈의 산통에 여러 날을 앓겠다 병을 업은 사람들은 봄에도 여름에도 겨울이겠다 뼛속에서 얼어버린 체온이 체온을 얻으려고 희디 흰 눈밭을 맨발로 헤매겠다
남에서 등으로 북에서 서로 촛불은 촛농을 흘리며 콜록이겠다 어떤 종이들은 찢어질 듯 찢어지지 못하고 맞배지붕의 자세로 무릎이 닳겠다 그믐날 미래를 꺼낸 사람은 죽은 제 이마 곁으로 세 든 사람 풀숲에 버려진 잔설을 제 살처럼 품고 자겠다
얼어버린 손가락이, 손목이, 무릎이 거미줄에 걸려 있다 거미줄에 걸려서 시소를 타고 있다 누가 저 비대칭의 게임을 주관하고 있나 바람이 불 때마다 무거워진 쪽으로 한 무더기 별똥별이 쏟아진다
권행은 시인 / 비탈 길을 오르는 종소리
골목은 어둑한 바닥을 물고 있어서 이가 아프다 치통을 앓는 골목에게 시간은 독거노인 부어오른 골목이 바람에 휘고 있다
두부장수가 시간의 틈새에 빠진 발자국을 조심스레 거두어 언덕을 오른다 겨울마다 얼음 든 상처를 진물로 흘려서 음식을 씹지 못하는 골목은 오래도록 허술한 집들을 낳았다
누우면 하늘이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산동네 사나흘씩 사람들의 발목이 묶이는 골목으로 어떻게 찾아왔을까 두부장수' 종소리가 따뜻한 호명이 되어 사람들을 부른다
귀먹은 해거름을 깨우는 종소리가 앓아누운 할머니의 언 손으로 두부 한 모를 쥐어주자 내려앉은 창들도 그제야 꾸물꾸물 밥을 짓는다 오랜만에 할머니의 아궁이가 불을 먹는다
닫힌 빗장 속으로 두부장수의 종소리가 눈송이처럼 뛰어들 때 바쁘신 하나님도 모처럼 숨을 고르신다, 흰 눈처럼 이 세상 어디에나 부드러운 잇몸을 가지고
두부는 있다
권행은 시인 / 맨몸의 시간
바람이 노을의 목줄을 비트는 무렵 사과를 모두 떨군 사과나무가 시린 젖줄을 말리고 있다
여름이 남겨둔 벌레들은 나무의 순결을 다 먹어 치우고 새들이 떠나간 자리에 거푸집을 짓고 있다
등허리에 옹이가 생기면 별이 된다는 소문이 잎그늘 사이를 훑고 지난 후 나무의 옆구리에는 아픈 옹이들이 덕지덕지 늘어났다
거미줄 무성한 벌레구멍 속으로 노을이 깊어진 나무는 그 흔한 별똥조차 보지 못했지만 벌레와 함께 부푼 사과들은 단 맛 드는 살을 위하여 밤마다 홀로 황도를 횡단하는 나무의 터진 발등을 보았다
이제 제 치마 밑으로 한 세상을 떨구고 훗배앓이 하는 사과나무, 꿈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거룩한 낙타여서 꿈에 집착하지 않으려고 가늘어진 햇살을 환청과 섞고 있다
미안해 불덩이 같은 사과 알을 낳지 못해서 미안해, 벌레 먹힌 채로 별을 꿈꾸어서 미안해 몸이 밀어올린 사과의 참맛을 알지 못해서,
벌레집만 붐비는 사과나무가 마지막 남은 謝過를 조용히 바닥으로 떨구고 있다.
권행은 시인 / 지퍼 위에 단추 달기
지퍼가 달린 셔츠를 샀다 어느새 단추 때문에 허둥대는 나이가 되어 단추 달린 옷보다 지퍼 달린 옷이 편하다
외출 할 때 모자를 쓰고 지퍼를 올리면 가슴 저쪽 끝에서 희미하게 달려오는 기차 어린 시절 신작로에 철로가 깔렸을 때 호기심을 열고 닫았던 기찻길이 보인다
그 시절 내가 입던 옷에는 수많은 단추들이 달려있었는데 외출했다 돌아오면,단추 한두 개는 무단으로 가출하여 엄마한테 꾸중을 듣기도 하였다
커가는 사춘기의 테두리를 감추느라 단추들은 또 얼마나 가슴 조였던가 그 때마다 마음을 결단하듯 단추를 잠그던 구멍들
이제 내 옷에는 단추 대신 지퍼가 달리기 시작했다 정겹던 시골길의 징검다리가 사라졌다
맑은 개울 물소리가 그리워져 편해진 지퍼 옷 위에 유년을 들추어 단추를 단다 더는 구멍이 필요 없어진 단추들을 밤하늘의 별자리 더듬듯 눈빛으로 만진다
엄마 가슴에 남아있던 두 개의 까만 단추가 칸칸의 시간을 매달고 얼룩이 푸른 구멍 속으로 달려가고 있다
-『미네르바』 2014년 봄호
권행은 시인 / 허공삽
늦은 시간에 전철을 탔다 허공에서 빈 손잡이들이 흔들리고 있다 누군가의 손을 기다렸을 손잡이들
나는 손잡이를 꼭 잡고 흔들림의 주기를 읽는다 가만히 보니 손잡이는 삽을 닮았다, 허공삽 무엇을 파고 싶어 삽날을 허공으로 향한 채 흔들리고 있나
삶의 무게에 눌린 의자의 졸음을 파헤쳐 공중의 별에게 던져주고 싶은 걸까 한 치도 어긋남 없이 굴러 온 시간의 바퀴들을 파내어 공중에 자유로운 궤도를 만들고 싶은 걸까
멀리 흙의 냄새를 찾아서 삽의 손잡이를 그러쥔 사람들의 체온이 전철의 흔들림에 파동 치며 어디론가 가고 있다 허공삽이 퍼 올린 흙냄새를 맡았는지 곱사등이 아기별이 내려와 졸며 깨며 함께 간다
나는 다시 흔들림이 빨라진 허공삽을 올려다본다 아득히 허공 별빛에 뿌리를 묻었는지 삽날이 보이지 않는다
권행은 시인 / 모래 시집
그녀의 몸은 모래로 이루어져 있다 그녀는 부서지는 모래의 말을 하고 모래의 과거와 미래를 엮어 모래집을 짓는다
파도에 휩쓸린 흔적으로 떠도는 숨과 가라앉는 체온을 가지고 수시로 날아오르며 추락하며 삐걱거리는 시간으로 고립의 집을 짓는다
분절된 기억들로 벽을 두른 집 바람이 실어 온 번민을 평생의 양식으로 여기며 각질처럼 일어나는 모래언덕에 알을 품 듯 허구의 꽃씨를 뿌려 맨몸으로 땡볕과 맞서는 집
이곳에서 그녀는 늘 쪼그리고 운다 물기가 없어지는 사면을 붙잡고 날개 없는 문장들이 두려워 하루에도 수천 번씩 바람 부는 쪽으로 방향을 키질하며 스스로를 가두는 침묵을 풀어 글자 집을 짓는다
단단해지는 바람으로 밤마다 솟아나는 모래 기둥은 솟대처럼 높아지는 모가지를 그리움 속으로 파묻기도 해서 서걱거리는 몇 방울의 불면이 사금처럼 빛날 때도 있다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의 방언만이 하늘의 별자리를 따라 태생을 옮겨주는, 아무도 붙잡지 않고 아무에게도 붙잡지 않는 그녀를, 사람들은 모래의 집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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