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명은 시인 / 마른 풀잎 부표되다 외 8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29. 08:00
김명은 시인 / 마른 풀잎 부표되다

김명은 시인 / 마른 풀잎 부표되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바람의 영혼이 깃든 탓일까

애초부터 닻 없는 배였다

저 빙하 어디쯤에서부터

흔들리는 세월 타고 내리는

박차오를 의지마저 꺾인 가벼움

수없는 자책 탓에 이 몸 찢기드라도

상관없는 그 누구도 더는 아프지 않고

청춘보다 더 아름답기 바랐건만

바램조차 무너지기를 몇 번이던가

나를 앞질러 사라진 이를 따라

세상 끝까지 달리고 싶었는데

한 사람 두고 무릎 꿇고 산다는 것

함께하는 기쁨으로 눈 멀었으면

물 바람 같기 원하여도 물 바람 아닌탓에

지금은 마른 풀잎으로 있을 수밖에

내 뒤척인 몸부림

이제 삶의 바다에 부표되어 떠 있다

 

 


 

 

김명은 시인 / 가죽가족

 

 

멋지다 가족치마를 입었네 아이는 아니에요 가죽치마예요

 

거친 수피를 뚫고 어린 싹이 돋고 가죽나무 백녹색 꽃 피어나고

 

가족의 묵은 냄새는 어떤 돌기의 미로에서 미뢰로

 

가죽이 그리 두꺼워서야 얼굴을 고치고

다시 뜯어고쳐도 더럽게 부패해도 가족

 

핏줄이 실핏줄이 검게 감기는 서곡에서 서막으로

한 줄로 이어진 대오에서 한 사람씩

한 사람도 빠지지 않게 허리를 굽히고

 

느그 아버지 옷 갈아입힐 때 보니 가죽밖에 안 남았더라

주저앉은 엄마 말이 가족밖에 안 남았더라는 말로 박힌다

 

계간 『사이펀』 2023년 여름호 발표

 

 


 

 

김명은 시인 / 차갑고 먼

 

 

강물이 젖은 귀를 세우고

먼 곳으로 깊다 안으로 멀어진다

슬픔이 빠진 수면에 구멍을 뚫어볼까

그 사람도 신이 있는 곳으로 갔는지

신을 만든 사람들은 떼 지어 몰려다니고

사랑을 노래로 다 소비하고 멀어져간다

두 손을 포개

가슴 위로 올릴까

잔해 위로 올릴까

태우기 쉬운 종이와 낡고 오래된 기록들

침묵이 고요해? 마디마디 끊어지는 생각들

쥐새끼가 목울대를 찾는다 털목도리를 갉아댄다

햇빛을 좋아하는 생화는 반드시 시들고

어떤 날은 어느 날 강의 표정으로 바뀐다

물살이 세차게 달려와요

그 길이 아니잖아요 빨리 뛰쳐나와요

뒤돌아보지 말아요 멀리 내다봐요 다음으로

어둠이 동그랗게 자리를 잡으려고

알알이 맺히기 시작한다 열리기를 거부하는

한 사람의 영혼이 뜨거워 강물이 붉다

 

계간 『사이펀』 2023년 여름호 발표

 

 


 

 

김명은 시인 / 버스를 기다리며

 

 

정해진 대로 정지선에서 동쪽으로

달리는 버스 유리창이 번쩍인다

 

열린 창문에서 밥 냄새가 난다 끼니는 건너뛰고

횡단보도도 건너뛰고 버스번호를 확인한다

 

타일 벗겨진 골목은 딱딱한 이빨을 머금고

좁고 어두운 창문들에게 손을 내민다

일상은 버스를 오르고 내리는

사소한 과정일 뿐

일이요 그냥 하는 거죠 대충 사는 거죠

원자폭탄이 이로운 가 해로운 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든 말든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향해

로켓을 쏘든 말든 버스는 출발한다

 

경계도 숨을 곳도 없다 흰 손은 더욱 희고

전문가들은 마음을 읽는다 피의 량이 달라

이미 마음의 혈관에서 감정을 찾아냈다

 

어린 것들 죽이지 말고 너 혼자 죽어

댓글 창에서 악플과 생각을 쓸어 담는다

 

정면은 홑겹

낮은 콧날이거나

선만 남은 귓바퀴이거나

 

아직 돌아가지 못한 달의 속옷은 얇고 엷은 푸른빛

 

사는 게 전쟁터죠 글쎄 태어난 게 무슨 잘못

서쪽으로 서쪽으로

꽃 필 자리로 돌아오는 두 눈이 눈부실 것이다

 

계간 『시산맥』 2023년 겨울호 발표

 

 


 

 

김명은 시인 / 콩과 총과 꿩

 

 

 꿩 꿩 꿩 장끼 한 마리 너른 들판을 가로질러 날아온다

 호미는 콩 두어 알 들어갈 자리를 만든다

 꿩이 늙은 여자 굽은 등을 바라본다 콩을 파먹는다

 나무막대기 위에서 흰 비닐들이 펄럭거린다

 오매 나 못 살 것네잉 저 놈의 꿩이 또 와불었구만잉 콩 다 파묵어부네잉 인쟈 힘아리 없다고 저것도 나를 아주 사무 허네 염빙하것다 갬옥살이 허더라도 총이 있으면 콱 쏴 불고 싶네잉

 꿩은 부리에 검은 콩알을 물고 있다

 여자가 밭둑을 지나 검은 햇빛차단막을 끌고 온다

 네 번째 심은 콩밭에 그늘이 포개진다

 콩과 콩 사이 낡은 구멍이 촘촘하다

 

무크지 『화성작가회의』 4호 2023년 발표

 

 


 

 

김명은 시인 / 아르카디아 평원

 

 

하얀 종이배를 띄운 바다를 두 번 빼앗겼다

고향과 고향보다 오래 살고 있는 이곳에서

 

물길을 따라가던 새들이 무리지어 붉게 날아오른다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고층 아파트를 넘는다

 

달을 정복한 지구인들이 대재앙을 피해

이주하려는 행성이 붉은 별 화성

착륙지로 물을 구할 수 있는

아르카디아 평원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손가락을 펴면 한 줌 별이 흘러내린다

한잎 한 잎 날아가는 씨앗과 깃털을 태운다

지구 안의 작은 화성에서 둘만의 시간이 사라졌다

 

디스토피아에서 아르카디아로 다시 디스토피아로

 

짐승은 어디로 가야할까 극복할 수 없으면

굴복밖에 없으니 머무는 곳마다 이별이다

바다에서 호수로 변한 이곳까지

 

훼손을 막고 싶은 시원지, 나의 낙원

흔들렸다 일어서는 수풀 속에 몸을 숨긴 짐승들

 

평원에서 경비행기가 잠자리보다 낮게 날아올랐다

독사가 있습니다 조심하세요!

독사보다 무서운 사람의 머리 위로 검은 구름이 지나갔다

 

차가 멈출 때마다 붉은 등이 켜진다

낭자한 빛이 길바닥으로 스며든다

불 지펴 밥을 짓고 싶다

아름답지 않은 집에서 식물은 그리움을 키우고

별이 반짝일 때마다 어떤 실패는 추락을 거듭한다

 

 


 

 

김명은 시인 / 동굴

 

 

내 심장은 어떤 냄새일까 등 밑이 무덤이다

정수리로 피가 몰리면 심장이 목구멍으로 올라와

 

동백이 지니까 장미가 핀다 줄장미 핀다 경계가 붉다

혼자니까 벌거벗어도 괜찮아

죽은 젖가슴을 왜 심장 위에 올려놓았나

통증이 몸을 뚫고 폭발 직전이고 웃음도 폭탄이다

 

새우의 심장은 머릿속에 있고 내 심장을 조이는 듯

살아있는 주목나무를 칭칭 감고 알전구들이 반짝인다

탐욕이 사람의 눈빛을 본다 나무의 팔다리에 못이 박히고

못은 박혀서 전구보다 환하게 빛을 쏟아낸다

 

뇌가 두근거린다 심장이 뛰는 속도는 저속

심장이 마음에 닿지 않는다 마음은 어디에서 타고 있나

 

생각은 노래보다 느리고 파인 등이 동굴을 판다

알전구 하나가 반짝이지 않는다

불이 붙은 심장이 기어간다

 

 


 

 

김명은 시인 / 직면

 

 

 더 추워지기 전에 나를 바라봐야지

 멀리서도 희고 빛나는 미소 속으로 돌아가야지

 

 마른 잎을 피해 걷다가 핏빛 단풍에 눈이 찔린 아이를 만난다

 

 아이는 그날 밤의 손가락을 기억해내려고

 숨을 죽이며 지나가는 발소리에 귀를 세운다

 

 내 몸에 피가 나요 씻고 들어와 봐 영생을 줄게

 

 마른 잎들은 넘쳐흐르고 사라질 때까지 마르고

 부끄러움은 어디든지 상처 내고 다녔다

 

 고해는 고개를 들 수 없다 얘야 말을 하렴

 선물상자를 받은 아이들은 떠나고

 내용을 모르는 무거운 선물을 안은 아이만 남아

 

 내 첫 구멍 속으로 손가락을 넣은 너와 네 몸을 넣은 너와

 너의 그것을 잠든 내 손에 쥐여준 너는 다르다

 너를 모르는 나는 내 유년의 토끼를 끌어안고 울지

 

 그날 이후 아이는 무엇으로 천진했을까

 

 생명을 주신 신의 뜻이니까 얘야 내 몸을 받아들이렴

 둥글게 만 몸을 일으켜야지 마주 보면 가해자가 웃는다

 

 십자가는 무슨 불기둥을 지고 가야지

 없음에서 와서 없음으로 가야지

 

 한 겹 두 겹 내 얼굴을 벗기고 알몸의 마음으로

 더 늦기 전에 나를 바라보는 어린 나를 안고 떠나야지

 

 


 

 

김명은 시인 / 네 번째 느낌 속의 잠

 

 

계절은 구멍이 비대칭인 누에섶 격자무늬 사이로 지나갔다

날짜를 놓친 옹이 무늬에서 나이테를 풀거나 되돌아가는 시간을 거꾸로 감았다

 

생사를 뽑고 있던 여자가 고치 한 개 던져 주었다는 나의 태몽,

누가 내 머릿결을 쓰다듬으면 밤낮 구분 없이 잠만 잤다

 

세 번째 잠에서 시작된 초경

나는 어둠을 뒤집어쓴 나와 웅크려 앉아 있었다

네 번째 잠으로 들어가는 굽힌 무릎을 잃어버린 채

 

떨어지는 곧은 머리카락은 원형을 복원하며 휘어졌다

꿈을 복원하려고 웅크린 몸은

둥근 공간에 음지를 들여 젖멍울을 길렀다

 

네 번째 잠에서 누에 머리처럼 움직이는 손끝으로 수음을 했다

하초에 뜨개질한 뽕잎 크기의 왼 손바닥이 몸 밖에서 그림자로 자라났다

 

잠 밖으로 나선 나는 느낌 안에 갇혔다 빠르고 격렬하게

 

사람들 목소리가 고막을 눌러 댈 때마다

그림자는 매번 다른 모양으로 찌그러졌다

 

그때부터 애인들이 다가와 오늘 밤엔 누구와 자느냐 묻기 시작했다

 

 


 

김명은 시인

1963년 전남 해남 출생. 경희사이버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졸업. 2008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 시집 『사이프러스의 긴 팔』. 현재 〈빈터〉 동인으로 활동 中. 현재 계간 『시와 표현』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