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함석헌 시인 / 기다림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29. 08:00

함석헌 시인 / 기다림

 

 

나는 미래의 신인(新人)을 기다리노라

아직 태 속에 있는 세기의 고동을 들으려 하노라

 

들 위론 겨울바람이 아우성을 치며 달리는 때

골짜기 얼음 밑에서 기도를 하는 시내 같은

 

자정을 겨우 지나 어둠이 아직 깊은 때부터

새는 날을 외쳐 밝도록 내처 우는 홰 위에 닭 같은

 

미래의 신인아 너는 아니 오려나?

저도 모르는 노래를 미친 듯 부르는 사람아 아니 오려나?

 

 


 

 

함석헌 시인 / 불의 빛, 빛의 불

-<씨알의 소리> 창간 10주년에 부쳐

 

 

  저 것은 빛이네

  활활한 당신의 불이네.

 

  빛이 빛으로 더불어 일어나고

  불이 불로 더불어

  활활 이네.

 

  캄캄한 흙 속의 뿌리

  침묵의 바위

  흩어진 낱낱의 모래알

  잠자던 바람 속에서

  일어나고,

 

  계곡의 골작물

  꿈꾸는 늪

  돌아서 흘러가는 강물

 

  태풍의 바다의

  바다 소용돌이 속에서 일어나네.

 

  삼동을 움츠렸던 동면의 땅버러지

  동굴의 짐승

  날짐승

  길짐승의

  뜨거운 혈관,

  생명의 박동서 일어나는

  함성,

 

  저항과 패배

  참음과 분노

  가장 참되고 값진 것을 위해

  치뤄온

  피와 아픔

  눈물과 뼈저림에서

  일어나는

  자유,

  자유,

 

  속박과 억압

  불순과 불의

  추악과 횡포

  비겁과 주저의

  일체를 정화하는

  

  불,

  불멸의

  불,

  다시는 내리워질 수 없는 깃발

  다시는 꺼트릴 수 없는

  불길,

 

  저것은 불이네

  우리들 저마다의 안에서

  넋에서 활활 이는

  

  끝없는 불이네

  끝없는 빛이네.

 

 (1980. 4. <씨알의 소리> 4월호)

 

 


 

 

함석헌 시인 / 내 마음 다 팔았고나

 

 

내 마음 다 팔았고나

다 팔아먹었고나!

아버지가 집에서 나올 때

채곡채곡 넣어 주시며

잃지 말고 닦아내어

님 보거든 드리라

일러주시던 그 마음

이 세상 길거리에서 다 팔아먹었고나!

 

다 팔아먹고,

다 헤쳐먹고

이젠 껍데기만 남았고나

님 생각이 나는 오늘엔

바쳐야 할 그 맘은 없고

세상 풍파에 부대끼고

더러운 기록을 그런

이 껍질 밖에 없으니

무엇으로 님을 만나?

무슨 맘에 님을 찾나?

 

속았구나!

세상한테 속았구나!

그 사탕에 맘 팔고,

그 옷에 맘 팔고,

고운 듯 꾀는 눈에

뜨거운 맘 다 팔고

피리 소리 좋은 듯해

있는 맘 툭 털어주고 샀더니

속았구나,

속 없는 세상한테 속았구나!

 

해는 서산 위에 뉘였이 눕고

내 몸은 피곤하고

저녁 바람은 가벼이 불 때

다 팔고 남은 내 맘의 껍질은

물 마른 우물같이

텅빈 쓸쓸함만 길었는데

님은 저 언덕을 올라가시네

저녁 영광 안으시고

 

저 님이 가시기전,

저 님이 저 언덕을 아주 넘으시기전,

가자, 내 맘아,

아 가엾은 내 맘아,

팔다가 남은 부스러기라도 모아 가지고

가서 바치자.

받으시거나 아니 받으시거나

발 앞에나 쓰러지자!

 

세상아 네 맘을 도로 주어!

아 껍데기 세상아

내가 날 속여 껍데기로 만들었지만

네게 줄 내 맘이 아니었더니라.

님께 바쳐야 할 내맘을

도로 내놓아, 어서 내놓아!

내가 본시 네게서 받은 것이 없었노라

 

 


 

 

함석헌 시인 / 맘

 

 

맘은 꽃

골짜기 피는 난蘭

섞어진 흙을 먹고 자라

맑은 향을 토해

 

맘은 시내

흐느적이는 바람에 부서지는 냇물

환란이 흔들면 흔들수록

웃음으로 노래해

 

맘은 구름

푸른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

한때 한곳 못 쉬건만

늘 평안한 자유를 얻어

 

맘은 높은 봉峯

구름으로 눈물 닦는 빼어난 바위

늘 이기건만 늘 부족한 듯

언제나 애타는 얼굴을 해

 

맘은 호수

고요한 산속에 잠자는 가슴

새벽 안개 보드라움 속에

헤아릴 수 없는 환상을 길러

 

맘은 별

은하 건너 반짝이는 빛

한없이 먼 얼굴을 하면서

또 한없이 은근한 속삭임을 주어

 

맘은 바람

오고감 볼 수 없는 하늘 숨

닿는 대로 만물을 붙잡아

억만 가락 천의 소리를 내

 

맘은 씨알

꽃이 떨어져 여무는 씨의 여무진 알

모든 자람의 끝이면서

또 온갖 형상의 어머니

 

맘은 차라리 처녀

수줍으면서 당돌하면서

죽도록 지키면서 아낌없이 바치자면서

누구를 기다려 행복 속에 눈물을 지어

 

 


 

 

함석헌 시인 / 마음

 

마음은 꽃

골짜기 피는 란

썩어진 흙을 먹고 자라

맑은 향을 토해

마음은 시내

흐느적이는 바람에 부서지는 냇물

환란이 흔들면 흔들수록

웃음으로 노래해

마음은 구름

푸른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

한 때 한 곳 못 쉬건만

늘 평안한 자유를 얻어

마음은 높은 봉

구름으로 눈물 닦는 빼어난 바위

늘 이기건만 늘 부족한 듯

언제나 애타는 얼굴을 해

마음은 호수

고요한 산속에 잠자는 가슴

새벽안개 보드라운 속에

헤아릴 수 없는 환상을 길러

마음은 별

은하 건너 반짝이는 빛

한없이 먼 얼굴을 하면서

또 한없이 은근한 속삭임을 주어

마음은 바람

오고 감 볼 수 없는 하늘 숨

닿는 대로 만물을 붙잡아

억만 가락 청의 소리를 내

마음은 씨알

꽃이 떨어져 여무는 씨의 여무진 알

모든 자람의 끝이면서

또 온갖 형상의 어머니

마음은 차라리 처녀

수줍으면서 당돌하면서

죽도록 지키면서 아낌없이 바치자면서

누구를 기다려 행복 속에 눈물을 지어

-시집 <수평선 너머>에서-

 

 


 

 

함석헌 시인 / 살림살이

 

영원무한 산 얼에서 잘라내인 이 한 토막

인생이라 이름하니 다시없는 살림이라.

다시없는 이 살림을 없이 봐온 오천 년에

쭈그려 쪼든 생명 어이 다시 살려낼꼬

푸른 하늘 우러러서 잊음 없이 바랄 거니

한이 없이 높이높이 끝이 없이 널리널리

하늘로다 머리 두고 허리펴는 대장부라

몸 하나를 꼿꼿이 함 근본 인생 제 꼴이오

두 다리에 힘을 주어 두터운 땅 밟고 서면

만 오천 리 땅 속까지 그 울림이 내려갈 듯

배에 중심 얹고 나면 태산 갖다 심어논 듯

보기 싫게 눕기라곤 잠깐 사는 밤동안 뿐

닭 울기에 일어 앉아 하룻살림 준비할 제

백 스물 뼈마디를 고루고루 놀려보고

이삼백만 털구멍을 맑은 물로 닦아낸 후

꿇어앉아 명상으로 새는 날을 맞이하자.

만물 주인 이 몸이요 우주중심 이 맘이니

손 끝 발 끝 가는 곳을 허수하게 두지말고

내 몸거둠 내가 하여 남의 힘을 빌지마라

남의 짐질 겹쳐 짐이 종살이의 시작이라

먹고 입음 간단하게 낮음하게 절약하여

남는 거로 남을 돕고 널리 동무 사귈거요

술 담배에 빠져들어 더럽는 일 분히 알아

한 방울에 한 모금을 입술에도 대지 마라

일이거나 운동이나 하루 한번 힘껏 놀려

이마 위에 흘린 땀에 얼굴 빛을 낼 것이오

'이따 잘'을 믿지 말고 하루 한 줄 맛봐 읽어

끊지 않는 독서로써 마음 닦기 잊지 마라

높은 산에 올라보기 넓은 바다 나가보기

인간세상 돌아보기 때로때로 할 것이요

생명 불꽃 타고난 것 풀이거나 짐승이나

사랑하여 보호하고 쓸데없이 해치 말라

세상 갖은 모든 죄악 돈에 팔려 나는 거니

빚 지고서 구차하게 살잔 생각 꿈에 말고

천하 더럼 모아놓고 문화라고 취해 살다

멸망하는 도시 불집 어서 바삐 도망하라

열두가지 조목조목 어렵다야 하랴마는

꾸준하게 이어감이 산 생명의 줄이더라

산 생명의 그 줄 잡아 날로날로 딲아내면

굽이치는 큰 물결이 온 누리에 넘치리라.

-시집 <수평선너머>에서

 

 


 

 

함석헌 시인 / 아름다운 돌

 

 

  거친 결 드나드는 푸른 바다가

  찬 눈에 잠긴 모래밭 위에서

  무엇을 참음도 없이 오며 가다가

  나는 아름다운 돌을 보았노라.

 

  잘고 잔 깔깔한 그 모래 틈에서 부대껴

  늘 출렁거리는 늘 변하는 걷잡을 수 없는

  그 사나운 물결 밑에서 억만 년 씻기어

  그 돌의 굳음 아름다움을 닦아냈더라.

 

  그 아름다움 쓸쓸해 우는 내 눈에 들어

  올려보고 하소연하는 까만 맑은 동자 같아

  덮고 있는 찬 눈 헤치고 주워들었을 때

  그 돌 내 손을 엘 듯이 차고 차더라.

  파리한 내 손가락 얼이 빠질 듯하건만

  그 고움 아까와 버릴 수 없고

  모쭐한 그 맛 바닥에 녹아 박히는 듯해

  떨리는 손을 품에 넣고 나는 모래밭을 걸었노라.

  

  손은 점점 더 얼어가고 가슴은 점점 더 떨려오고

  그러나 돌은 갈수록 따뜻해지고

  바람 불고 물결 설레는 거친 바닷가에서

  인제는 어느 손을 그 돌에 녹이며 나는 걸어가노라.

 

  이 세상도 쓴 바다 찬 눈 날리는 모래밭

  누구를 찾음도 모르고 헤매어들 오고 가는 길 위에서

  꺼져가는 등잔같은 내 맘 위에 저녁빛이 비칠 때

  나는 아름다운 혼을 만났노라

  아아 아름다운 혼아, 옥같은 혼아

  아름답건만 굳고 차고나

  굳고 차건만 아름답고나, 그 아름다움

  이 인생의 모진 풍파 네 가슴에서 닦아냈고나.

 

  풍파에 아니 녹고 닦이어난 그 맘이 고와

  차고 날카로운 빛살 쏘며 모래밭 위에 떠는

  거룩한 외로움에 우는 그 눈이 애처로와

  나는 내 뼈만 남은 손을 그대에게 주노라.

  뼈만 남은 뜨거운 식은 손을 그대에게 주노니

  멎으려는 심장의 마지막 들뜀으로 그대를 떠미노니

  그대여, 그대 맘 뜨거워 이 모래밭 이김으로 걷는 날 오거든

  찬 물결에 잠기려는 내 지친 영을 그대 또한 일으키라.

 

 


 

 

함석헌 시인 / 내사랑아

-아시아의 꽃동산을 지키는 처녀에게

 

 

  1

  내 사랑아!

  아아, 내 사랑하는 아름다운 혼아

  내 만일 샘물 되어

  너를 씻을 수 있었더라면,

  뚫려 비치는 내 가슴 위에

  그림자지는 네 얼굴을

  샛별처럼 빛나도록까지 씻을 수 있는

  맑은 시내가 될 수 있었더라면

  아무리 곡절 많은 이 인생이라도

  나는 늘 노래하며 흘러갔으리라.

 

  2

  내 사랑아!

  내 사랑하는 아름다운 혼아, 아아!

  내 만일 푸른 바다 되어

  너를 안을 수 있었더라면

  끝이 없이 넓고 넓은

  하늘에 닿은 깊은 가슴 벌려

  스완 같은 너를 그 위에 안고

  마음껏 안고 놀려둘 수 있었더라면,

  아무리 풍파 많은 이 세상이라도

  나는 즐거움으로 늘 뛰놀았으리라.

 

  3

  내 사랑아!

  아아, 내 사랑하는 혼아, 아름다운 혼아!

  내 만일 맑은 호수 되어

  고요한 저녁 영광에 가라앉은 내 맘을

  암사슴 같은 네 입이 맘껏 마셔

  그 가슴을 시원케 하고 날쌔게 한다면

  어떻게 쓸쓸한 탄식의 골짜기 속에서라도,

  얼마나 긴 눈물의 흐름 틈에서라도

  지루함을 모르고 참 모르고

  나는 늘 기도하며 즐거이 기다렸으리라.

 

  4

  내 사랑아!

  아아, 아름다운 혼아, 내 사랑아!

  내 만일 등불되어

  네 앞을 비출 수 있었더라면.

  타는 내 가슴의 가는 빛살의 율동에 맞춰

  거친 들을 가벼이 걸어가는 네 걸음을

  히물히물 웃으면서 앞서가는

  작은 등불이 될 수 있었더라면,

  비록 애타는 일 많은 이 인생이라도

  나는 늘 기쁜 열정에 타올랐으리라.

 

  5

  내 사랑아!

  아름다운 혼아, 아아 내 사랑아!

  내 만일 풀무되어

  너를 녹일 수 있다면,

  펄펄 붙는 밝은 불길에

  네 옷을 태우고 네 살을 사르고 네 뼈 네 넋을 녹여

  수정처럼 비치게 하고야 마는

  뜨겁고 맹렬한 풀무가 될 수 있다면,

  몸과 맘이 다 녹아나고야 마는 이 사바에서라도

  나는 사양함 없이 길이 견디었으리라.

 

  6

  내 사랑아!

  내 사랑하는 혼아, 아아, 아름다운 혼아!

  내 간절한 맘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빛 되어

  그윽한 신비의 길을 달려

  골짜기 백합 같은 네 입술에 맘껏 빨려 사라진다면,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견우 직녀 사이와 한가지로

  무한의 거리와 너와 내 몸 사이에 있다 하더라도

  나는 차라리 싫어함 없이

  영원의 미소로 너를 늘 건너다보고 있었으리라.

 

  7

  내 사랑아!

  아름다운 혼아 내 사랑아, 아아!

  내 혹은 가벼운 바람되어

  내 귀에 속삭일 수 있었더라면,

  오직 너 하나를 즐겁게 하자는 바람에

  하늘이나 나무나 꽃이나 만나는 대로 붙잡아

  만물의 소식을 제대로 맘대로 네게 전할 수 있었더라면

  일생을 동서남북 떠도는 이 인생이라도

  나는 늘 가벼운 맘으로 달음질을 하였으리라.

 

  8

  내 사랑아!

  아아, 내 사랑아 아름다운 혼아!

  내, 내 사나운 폭풍 되어

  너를 내 맘대로 흔들 수 있었더라면,

  네 집을 무너뜨리고 네 잠을 깨우고

  붙드는 네 덧붙이들을 사정없이 차던지고

  네 옷을 벗기고 네 살을 찢어 날린 후

  떨리는 격동 속에 힘껏 너를 쓸어안을 수 있었더라면,

  이 땅 위에선 비록 머리 둘 곳 없이 쫓겨가는 나그네라도

  나는 기뻐 소리치며 늘 몰아쳤으리라.

 

  9

  내 사랑아!

  아아, 내 사랑하는, 사랑하는 이 아름다운 혼아!

  내 만일 내 참말 억세인 하늘 바람되어

  단숨에 너를 들고 올라갈 수 있었더라면,

  떨어지는 꽃 속에서 너를 빼앗아 내 품에 꼭 품고

  놀람에 입 벌리는 해, 달, 별 다 뒤에 두고

  영원의 나라에 길이 나래칠 수 있었더라면,

  어디서 모여 어디로 가는지 몰라 오다가다 죽는

  저 인생들 속에서

  오, 무엇을 내 꺼려 머뭇거렸으리오!

 

 


 

함석헌 시인(1901-1989)

1901년 평안북도 龍川에서 출생. 1923년 五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8년 일본 東京고등사범학교를 졸업. 귀국하여 모교에서 교사생활. 1940년 평양 근교의 松山農士學院을 인수하고 원장에 취임. 곧 계우회사건으로 1년간의 옥고. 8·15광복 때까지 은둔생활. 광복 후, 평북 자치위원회 문교부장. 같은 해 11월에 발생한 신의주학생의거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북한 당국에 의해 투옥. 1947년 단신으로 월남, 1956년 《사상계》를 통하여 주로 사회비평적인 글을 쓰기 시작. 1958년 자유당 독재정권을 통렬히 비판하여 투옥. 1961년 5·16군사쿠데타 직후부터 집권군부세력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비판. 1970년 《씨알의 소리》를 발간. 저서《뜻으로 본 한국역사》, 《수평선 너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