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박은형 시인 / 바닥에 귀를 대고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9. 30. 08:00
박은형 시인 / 바닥에 귀를 대고

박은형 시인 / 바닥에 귀를 대고

 

 

죽음의 순간에

무슨 말 듣는 걸까

버려진 담배꽁초

까치가 쪼다 놓친 홍시

방음벽 지나던 어린 참새

차에 치인 얼룩무늬 길고양이

도로에 나뒹구는 재생 타이어 조각

강풍에 뿌리째 뽑혀버린 개잎갈나무

활짝 핀 채 떨어진 동백꽃 그녀가 들었을

 

하지만

살아 있어

아무도 알 수 없는 그 말

 

-《서정과현실》2018. 상반기호

 

 


 

 

박은형 시인 / 무지

 

 

무지(無地)는 여름용 화두다

꽃치자 흰 내음도 무지의 일족이다

여름이면 채도 낮은 침묵을 설파하는 일몰을 기다린다

민무늬 감각을 어떻게든 얻어 보려고 조바심 한다

기억 안에 깊숙이 버려진 나쁜 장면을 벗겨 낸다면

흉터는 무지로 둘 것이다

애인이라는 지위가 우울한 애인들에게

선호도 낮은 이 절기를 권한다

초록 물갈퀴 우거진 중국단풍나무는 마른 잎을 매달고

색깔 빠지는 기분을 내년 봄까지 고수한다

식탁에 둘러앉은 일가족의 여름이 훤히 열려 있다

툭하면 밀려오는 낭떠러지를 수선해서 무언가를 지켜야만 산다

끝나지 않는 사랑을 발명한다 해도

몰(沒) 혹은 졸(卒)의 발목에 차이는 설계도는 오차가 없다

입술이 즐겁게 침묵할 오늘의 방향은 민무늬 감정

이별도 꽤 쏠쏠한 감정이 꽃치자에 붐빈다

기다리던 일몰이 겹치고 나는 조금, 무지를 얻었다

더운 바람에 뭉개진 얼굴에 무지가 들러붙는다

 

 


 

 

박은형 시인 / 머나먼 이름

 

 

처서 지나고 몸숙 물결 옅어진다

 

투신 소식에

남은 매미 울음이 후생의 방향으로 튄다

 

허공과 눈부시게 충돌한 건

후일에도 완결되지 않을

희망이나 약속 따위 머나먼 이름

 

엊저녁 밥물 끓을 때보다 조금 더 당겨 놓은 창으로

당신이라는 잘 모르는 신념과

굳게 닫혀 버린 허공이 은유 없이 흐르는 늦여름

 

외판 비와

산나리 구두코와

나비 농막을 배회하던 구름을 끌고

세상의 모든 음악 속으로 난청의 저녁이 돌아오고

 

나는 흰 양말 한 켤레 찾아 신는다

꺼졌다 넘어졌다 하는, 몸속 물결을 오래 듣는다

 

 


 

 

박은형 시인 / 북쪽 얼굴

 

 

생이 뜯겨 나오듯 기침하는 어머니

봄을 기다리면 낫겠거니 한다

동무들 남쪽 섬구경 갈 약속의 봄,

아직 남았다 한다

북쪽얼굴로 이름난 가계의 분홍신으로

기침의 맨 마지막 진동지인 발을 덮어드린다

뻗친 겨울 정수리를 건너지 않고는 오지 않는 분홍

그 분홍 거진 다 써 버린,

앞섶에 북쪽만 그득한 어머니 늙은 기침이 까무룩해진다

자꾸 신을 쓰다듬는 저 손끝에 어쩌면 분홍물 배어

어머니의 북쪽, 조금 줄지도 모르겠다

 

 


 

 

박은형 시인 / 꽃집이 있었다

 

 

생활의 맞은편 첫 번째 횡단보도를 건너면

왼발의 그늘 지점에 잎이 머금은 산소 면적과

꽃의 윙크 무게를 궁구하던 녹색지대가 있었다

겨울이면 어깨가 좁아지는 식물들 사이에서

마음껏 둥글어지는 연탄난로 허리를 목격하던 집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 동승할 볕을 기다리다

마치 청혼의 정류장처럼

신비하면서도 쉬이 무료해지는 순간들이

그 집에서 선뜻 꽃이 되는 장면을 보았다

한때는 모든 꽃집을 두고

지상의 북극성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것은 단골 점성가인 흰나비 떼의 점괘로 판명되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사람들 덩달아 그 소문에 희망을 올려놓고

세계의 접경이 죄 꽃집이면 좋겠다 설레발치기도 하였는데

지금, 눈치 챌 수 없게 천천히 당신과 내가

오래 지녀왔던 사이가 짤막해지고 있는 것일까

내 아이들 복사뼈처럼, 여름 저녁 박꽃처럼

선명한 별자리 되어주던 꽃집이

얼룩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밤사이 사라지고 없다

 

 


 

 

박은형 시인 / 주걱

 

 

개망초 흰 머릿수건 사이 여름 오후가 수북한

그 집은 가득 비어있다

인기척에 반갑게 흘러내리는 적막의 주름

컴컴한 부엌으로 달려간 빛이

삐걱, 지장을 놓으며

눈썹처럼 엎드린 먼지를 깨운다

 

밥상을 마주했던 날들을 배웅한 징표일까

남은 것들로는 그림자도 세울 수 없는 회벽

그을음으로 본을 뜬 그늘 주걱 하나가 거기

테 없는 액자처럼 걸려 있다

 

무쇠솥이며 부엌 바닥의 벙어리 주발들

눈이 침침한 채 아직 남은 밥 냄새, 만지작거린다

누군가와 마주앉아 먹던 모든 첫 밥에는

허밍처럼 수줍고 고슬한 기억이 들었을 것이다

 

선명한 그을음이 빚은 밥 냄새의 화석에서

뭉클한 식욕의 손잡이가 돋는다

멀리 수평의 여름 저녁이 이고 오는

고봉밥 한 그릇

산마루를 지나 평상으로 식구들 불러들인다

 

- 2013년 《애지》 신인상 당선작

 

 


 

 

박은형 시인 / 꽃집이 있었다

 

 

생활의 맞은편 첫 번째 횡단보도를 건너면

왼발의 그늘 지점에 잎이 머금은 산소 면적과

꽃의 윙크 무게를 궁구하던 녹색지대가 있었다

겨울이면 어깨가 좁아지는 식물들 사이에서

마음껏 둥글어지는 연탄난로 허리를 목격하던 집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 동승할 볕을 기다리다

마치 청혼의 정류장처럼

신비하면서도 쉬이 무료해지는 순간들이

그 집에서 선뜻 꽃이 되는 장면을 보았다

한때는 모든 꽃집을 두고

지상의 북극성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것은 단골 점성가인 흰나비 떼의 점괘로 판명되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사람들 덩달아 그 소문에 희망을 올려놓고

세계의 접경이 죄 꽃집이면 좋겠다 설레발치기도 하였는데

지금, 눈치 챌 수 없게 천천히 당신과 내가

오래 지녀왔던 사이가 짤막해지고 있는 것일까

내 아이들 복사뼈처럼, 여름 저녁 박꽃처럼

선명한 별자리 되어주던 꽃집이

얼룩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밤사이 사라지고 없다

 

 


 

박은형 시인

경남 창원에서 출생. 부산대 대학원 국문과 수료.  2013년《애지》로 등단. 시집 『흑백 한 문장』 이 있다. 제17회 김달진 창원문학상 수상.